< 1722화 > 1722. 암상인
카넥스가 있는 도시 중앙의 사원으로 들어왔다.
카넥스는 아까 봤던 것처럼 제단 중앙에 두둥실 떠 있었다. 다시 봐도 역겨운 외형이었다.
나는 놈에게 화련비도의 끝을 겨누었다.
“게이트를 닫은 거, 네 짓이냐?”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하찮은 것들이 너에게 당하는 순간 게이트를 닫았다. 아직 나는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 원래 내 힘에 비하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내 계획을 위해서도 너를 밖으로 보낼 수 없다.”
“몬스터 주제에 꿈이 너무 원대하군.”
직감이 말한다. 이놈은 위험하다. 될 수 있으면 지금 당장 죽이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아직 놈에게 들어야 할 게 있다.
카넥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카넥스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린다.
“덜떨어진 것들과 나를 똑같이 보지 마라.”
“네가 여기 던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몬스터라는 증거다. 네가 정녕 신이라면 이런 곳에 있진 않았겠지.”
“나는 힘을 잃고 영락했을 뿐이다! 힘을 되찾는다면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브라마센을 찾아내 죽일 것이다!”
“브라마센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래. 너도 브라마센을…. 그 이계의 신을 알고 있나 보군. 우주의 자연 재해 같은 놈이지…. 차원을 떠돌며 세상을 집어삼켜 강해지는 놈이지. 너희가 사는 세계를 지구라고 했나? 네가 브라마센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지구 또한 놈의 목표가 된 모양이로군.”
“너보다 브라마센이 상위 신인가?”
“그딴 놈이 나보다 위에 있다고?! 웃기지 마라! 날 모욕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브라마센에게 져서 그 꼴이 됐다며. 그럼 브라마센이 더 강하다는 거잖아.”
“놈이 가진 건 힘밖에 없다! 출신도 명확하지 않은 놈이다! 냐겐 나를 위한 세계가 있었다! 내게 신앙을 바치는 귀여운 것들도 있었다! 브라마센이 나의 세계를 침략하기 전까지는! 브라마센은 그저 힘만 탐할 뿐인 침략자일 뿐이다! 그딴 걸 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저 재앙일 뿐이다!”
내가 볼 땐 브라마센이나 카넥스나 다 거기서 거기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가 전신으로 퍼진다. 빠직. 화련비도의 칼날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인간. 네게 제안 하나 하지.”
카넥스가 방금보다 훨씬 침착해진 어조로 말했다.
“자칭 신께서 인간 따위에게 제안도 하시나? 거참 대단하신 신이군.”
“비아냥거리지 마라.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약해져 있다. 브라마센에게 대부분을 잡아 먹힌 탓이다. 허나 나는 이렇게 존재한다. 적절한 제물과 신앙이 있다면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지겨운 변명은 됐다. 제안이나 말해봐.”
“지구에는 신이 없다.”
“……어떻게 확신하지?”
“너희 인간이 강화제라고 부르는 나의 일부. 신이 있었다면 그 일부를 허락하지 않았겠지. 아니, 그 이전에 직접 나를 찾아와 소멸시켰을 것이다. 나라면 내 세계에 침범한 신을 방치하지 않을 테니까.”
“신이 없다. 그래서?”
“지구는 신이 없는 것 치곤 아주 잘 발전했다. 브라마센이 힘을 못 쓰는 것도 지구의 문명 수준이 다른 세계보다 높아서 그런 거겠지. 허나 그 한계는 찾아올 것이다. 그놈은 보기와 다르게 매우 음흉한 놈이니… 너희가 모르는 곳에서 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지구에는 신이 없으니 더욱 수작을 부리기 쉬울 테지.”
한하린이 죽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브라마센은 전 세계에 있는 사이비들을 이용해 지구에 강림했다. 그리고 놈이 강림한 순간 지구의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힘을 선보였다. 회귀권이 없었다면 지구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니 니가 지구의 신이 되겠다는 거냐?”
“그렇다. 적절한 제물과 신앙을 바친다면 본래의 내 힘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거기서 나아가 지구의 모든 인간이 나를 숭배한다면… 브라마센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까는 소리 하고 있군. 네가 갑자기 나타나 신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널 믿을까? 장담하건대 넌 몬스터 취급받을 뿐이다. 내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처음부터 숭배받을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처음에는 거래를 통해 차근차근 다음 단계로 밟아가야지. 너희 인간이 제물을 바치면, 나는 그에 맞는 대가를 내린다. 너도 강화제를 원하지 않나? 네게 내 첫 번째 사도가 될 영광을 주겠다.”
“좆까고 자빠졌네. 그딴 거 필요 없어. 내가 궁금한 건 브라마센에 대한 자세한 정보다. 특히 놈을 죽이는 방법에 무척 관심이 가는군.”
“브라마센을 죽이겠다고? 인간 따위가? 흐흐. 오만하기 짝이 없군. 광대보다 주제 파악을 못 할 줄이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군.”
“네가 원하는 것이 브라마센의 죽음인가? 그럼 답은 간단하군. 내 사도가 되어라. 내가 브라마센을 죽여주겠다. 지구는 나로인해 구원받을 것이다.”
“지랄도 작작 해라.”
“계약의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새끼가 전지전능한 신인 척은. 네가 정말로 전지전능하다면 보지나 만들어 봐.”
“보지? 아, 여성기 말인가. 시시한 걸 원하는군. 좋다. 이번 한 번만 네놈에게 어울려주마.”
철퍼덕.
허공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
보지였다.
여성의 음부를 도려낸 듯한 살덩이였다. 보지의 형태가 있고, 털이 있고, 질이 있고, 자궁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었다.
“이 씨발.”
이 음부가 누구의 것인지 안다.
그럴 수밖에.
20분 전까지 이 보지를 따먹은 게 나였으니까. 가시처럼 뻣뻣한 보지털과 보지 입구에 주르륵 흐르는 정액. 도해영의 보지였다.
자궁과 함께 음부가 도려내진 도해영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다.
“죽여버리겠어!”
내 감정에 반응하듯 마나가 폭발하며 흘러나온다.
“흠. 분명 동요했는데… 정신에 파고들 틈은 조금도 없군. 정신을 보호하는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뒤져라!!”
화련비도를 휘두르며 놈에게 도약했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붉은 번개에 휘감긴 푸른 검기가 놈에게 날아간다. 검기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부서졌다. 벽이 완벽한 건 아니다. 검기와 부딪치는 순간 격렬하게 흔들리는 걸 확인했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질풍신뢰와 찰나를 이용한 이중 가속. 체중을 담은 화련비도로 보이지 않는 벽을 가른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2]
허공을 밟는 것과 동시에 찰나를 사용해 놈에게 쇄도한다.
화련비도의 칼끝이 놈의 커다란 얼굴에 닿기 일보 직전에 내 몸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마냥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멈춘 것이다.
‘…염동력? 아니, 이건….’
공간이 멈춘 것이다.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내 몸이 자유로워진다. 나는 카넥스에게 칼을 휘둘렀다. 카넥스가 사라졌다가 뒤쪽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다시 허공을 밟으며 그를 향해 도약했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내 몸을 노리고 쇄도하는 게 감각에 잡혔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천안을 사용했다.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
‘검기가 아니야. 공간의 비틀림이다. 비틀어진 공간을 검기처럼 사용하는 거야.’
화련비도라면 공간의 비틀림에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도박은 안 한다. 안 그래도 화련비도에 금이 간 상태인데…!’
저런 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
이리저리 피한다. 마냥 피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총과 미사일을 소환해 놈에게 쏘았다. 소용없었다. 카넥스를 지키는 보이지 않는 벽에 모조리 막힐 뿐이다. 그리고 천심의 효과가 끝나자마자 나는 제압당했다.
공간째로 붙잡혀서 놈의 앞으로 끌려갔다.
“대단하군. 고작 인간 주제에 내가 그동안 모은 힘의 대부분을 쓰게 만들 줄이야…. 너는 내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
“누가 네놈 같은 놈의 사도가 되겠다고 했나?!”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놈의 부서진 두개골 속에서 가느다란 분홍빛 촉수가 뻗어 나와 내 머리에 파고든다.
푹!
촉수가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감각은 무척이나 더러웠다.
‘버틸 만해. 조금 더… 조금 더 방심해라.’
한 번의 찰나와 완전 회복을 남겨뒀다.
“대체 뭐지? 직접 정신을 건드리는데도 안으로 파고들 수 없다니…. 어떻게 되먹은 정신력이냐. 너는 인간이 아닌 건가? 어쩔 수 없군. 네놈의 뇌를 직접 읽어봐야겠다.”
“뭐?”
촉수가 뇌를 훑는다. 머릿속에 작은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아프지는 않다. 그러나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불쾌하다.
“흐음. 출생은 별거 없군. 평범한 인간 종자다. 너를 낳은 부모에게도 특별함은 없다. 유년기를 살펴보니… 너는 지능이 떨어지는 개체인 것 같군. 호오. 어렸을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많았구나. 아직 성기도 발달하지 않았을 터인데… 유치원 선생을 발기했군. 발정 난 원숭이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 씨발놈이 내 기억을…!”
나도 모르는 유년기를 이놈이 보고 있었다.
“자위만 해대는 소년기라…. 불쌍하군.”
“내, 내 인생의 전성기는 청년기부터다!”
“그래. 청년기… 음?”
놈의 얼굴이 일변했다.
“유희 생활 어플…?”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주 이상한 걸 봤다는 듯이 눈을 깜빡인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곧이어 카넥스의 얼구은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신도 가질 수 없는 창조의 힘을…! 아니, 이게 창조의 힘인가…? 이런 힘이 있을 수 있는가!!!”
악을 쓴다.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를 내뱉는다. 그러다 돌연 탐욕이 서린다.
“내놔라! 네놈에겐 과분한 힘이다! 원숭이에게… 아니, 벌레에게 우주의 진리를 알려준 꼴이 아닌가! 내가! 내가 더 네놈보다 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크크. 유희 생활 어플이 어지간히 탐나는 모양이군. 근데 그건 내 힘이다.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힘이지.”
나는 몸이 살짝 움직이는 걸 느꼈다. 카넥스가 흥분하면서 내 몸을 구속했던 공간의 힘이 약해진 것이다.
“…네놈을 씹어 삼키고 그 힘을 내가 갖겠다!”
“날 먹으면 힘을 얻을 수 있고?”
“…네놈을 살려두는 것보다는 낫다.”
놈의 머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반드시 유희 생활 어플을 얻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악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탐욕심이 느껴진다.
카넥스가 입을 벌렸다. 내 기억을 보고 유희 생활 어플을 통해 얻은 내 능력을 안다면 이렇게 무방비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놈이 본 건 유희 생활어 플의 극히 일부뿐이다.
놈의 입이 닫혀 나를 씹기 직전, 공간 구속이 풀렸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0]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뇌천류(雷天流) 이중공명(二重共鳴) 만뢰나선(卍雷螺旋).
파지지직!
푸른 뇌전과 붉은 뇌전이 일직선상에서 회전하며 공명하며 카넥스에게 뻗어나갔다. 감전당한 카넥스가 비명을 지른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뇌천류(雷天流) 뇌강인(雷罡刃).
“죽어라!!”
정신을 못 차리는 놈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한다.
카넥스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지상으로 추락한다. 입에 반쯤 걸쳐져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낙법이라도 펼쳐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만뢰나선과 뇌강인을 사용하느라 기력을 다 쓴 것이다.
‘움직일 수 있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어.’
놈의 촉수가 내 머리에 구멍을 냈다. 솔직히 말해서 뇌에 구멍이 났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이것도 절대 정신의 효과인가?’
퍼억!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