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5화 > 1725. 아카데미의 구원자
학장실에는 텐라이 나기사와 성하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간 모양인데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텐라이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하리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유진이까지?!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내가 온다는 말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성하리의 옆으로 갔다. 성하리의 텐라이 나기사를 향한 경계심은 더 올라갔다.
“말하지 않았느냐. 부탁할 게 있다고.”
텐라이 나기사가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방금 본 쭉쭉빵빵한 어른 미녀의 텐라이 나기사가 떠올라 아쉬움을 느꼈다. 저 미소도 어른 상태에서는 더 잘 어울렸겠지.
“유진이에게 뭘 부탁하려고? 유진이는 아직 학생이야!”
“학생이라 하더라도 이미 다 컸지 않나. 넌 아들을 너무 과보호하는구나. 평생 아들을 끼고 살 생각이냐? 어미라면 놓아줘야 할 때 놓아줘야지.”
“윽, 그건….”
성하리는 입을 오물거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텐라이 나기사는 성하리가 아직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학장님.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네요. 도와드리죠.”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성하리와 텐라이 나기사의 대립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다가는 해가 저물어도 진도가 안나갈 것 같았다.
“유, 유진아!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돼! 이 여자는 어려 보여도 안에 능구렁이만 수십 마리 키우는 할망구라고!”
“너무하구만. 내가 한국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알아듣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겠지?”
“너무하기는. 내가 십몇 년 전에 당신에게 당한 일만 몇 개인데… 그런 말이 나와?”
“그건 정식 의뢰였지 않았느냐.”
“한국을 압박하면서 맡긴 의뢰 말이지.”
성하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십몇 년 전이라고 하니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성하리의 몸을 옥죄고 있는 ‘정령왕의 주박’이 그리 강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때 2~3일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있었는데… 일본 출장이었나?’
그 당시의 성하리는 늦어도 해가 저물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왔었기에 2~3일 집을 비우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텐라이 나기사는 피식 웃는다.
“아까에 비하면 위압감이 전혀 없구나. 아들 앞이라고 내숭 떠는 것이냐?”
“괜한 소리 하지 마. 우리가 당신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어. 우리가 일본에 온 건 교류전 때문이야. 당신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일단 무슨 부탁일지 들어봐라. 보상은 확실하게 해주마. 그리고 이 일에는… 일본의 미래가 걸려 있는 일이다.”
텐라이 나기사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특히 일본의 미래 부분에서 힘을 준다.
성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성하리는 나와 다르다. 그녀는 영웅이었다. 성격상 쉽게 넘어가지 못하겠지.
“…내가 하면 되잖아. 유진이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
“음. 이번에는 신세대의 감성이 필요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네가 폭주하면 곤란하다. 일이 틀어졌다고 다 박살 내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나를 뭘로 보고….”
“저번에 섬 하나를 작살내지 않았느냐. 그걸 처리하느라 꽤 고생했었다.”
“…….”
팩트는 성하리의 입을 잠깐 다물게 했다. 그러나 성하리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괜히 내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때는 섬이 약했던 거야. 그렇게 쉽게 부서질 줄 몰랐지.”
“음. 나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었을 거다.”
“…….”
성하리가 억울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성하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억울하게 있나 싶었다. 십몇 년 전이면 성하리가 세계 최강으로 논해지는 시기를 말하는 걸 테니, 그 힘의 여파만으로 섬이 작살 나는 건 충분히 있을 만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 저녁은 엄마랑 밖에서 먹을 겁니다. 상관없죠?”
“외출증을 내달라는 거냐? 이참에 모자 둘이서 도쿄 구경이나 하고 오너라.”
나는 씩 웃으며 성하리를 바라봤다. 억울해하던 성하리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걸며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작게 손짓했다.
“엄마.”
“응, 왜? 할 말 있니?”
성하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일본에 특이한 러브호텔이 그렇게 많대.”
“…….”
성하리의 얼굴이 빨갛게 붉어졌다.
힐끗 텐라이 나기사를 보니 딴청을 피우고 있다. 분명 들었을 것이다. 뭐, 애초에 나와 성하리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크흠. 우선 일본의 3대 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
“예. 만화 같은 것에서 자주 나오니까요. 스사노오, 아마테라스, 츠쿠요미죠?”
“맞다. 일본에서는 삼귀자(三貴子)라고 부르는 신들이지. 그리고 그들의 힘이 담긴 곡옥이 존재한다. 통틀어서 삼신옥이라 부르지. 너희도 알다시피 츠쿠요미의 곡옥은 여기 아라시 아카데미에서 내가 관리하고 있었으나, 마도정에게 빼앗겼다. 여기까진 너희도 알고 있을 거다. 따로 계획까지 세웠더군. 그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천천히 하나씩 하는 게 더 빠르겠어.”
텐라이 나기사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으쓱였다. 계획을 세운 건 내가 아니라 미야카도 미에코와 텐라이 나기사였다.
“…설마 나와 유진이에게 그 곡옥인가 뭔가를 마도정에게서 다시 찾아오라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예전의 너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의 너에겐 혼자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내가 불가능한 일을 부탁할 정도로 우둔해 보이더냐?”
“아니면 됐어. 계속해.”
성하리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신경질적이다. 내가 직접 성하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성하리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줄어들었다.
“마도정의 목적은 삼신옥을 전부 모아 신의 힘을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신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내가 S급 히어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츠쿠요미의 힘 덕분이다. 츠쿠요미의 곡옥이 사라진 지금은 그 힘도 약해졌지만…. 삼신옥의 힘을 전부 흡수한다는 가정하에 말한다면… 그 힘은 세계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SSS급 빌런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지.”
SSS급이면 1회차 때의 나다.
그때 나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히어로에게 합공당했고, 다섯 번째 군단장 메킨에게 뒤통수까지 맞았다.
“…SSS급. 그게 그렇게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결코 아니다. 거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이 나조차도 츠쿠요미의 곡옥 하나의 힘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럼 내버려 둬도 상관 없는거 아니야? 어차피 실패할 테니까.”
“마도정이 그 사실을 모를까. 놈들이 츠쿠요미의 곡옥을 가져갔다는 건… 삼신옥을 컨트롤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지.”
성하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SSS급 빌런이라 하니 확 와닿는 것이다. 참고로 전성기의 성하리조차 SSS급에는 닿지 못했었다.
“현재 츠쿠요미의 곡옥은 마도정에게 빼앗겨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두 개는 아직 건재하다. 아마테라스의 곡옥은 후지산에 봉인되어 있고 협회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문제는 스사노오의 곡옥이다. 후쿠오카에 있는 카소 아카데미에 특수 보관 중인데… 보관 장소가 워낙 특이해서 협회도 관리하기 힘들다는 거지. 너희가 가서 스사노오의 곡옥을 가져오너라.”
“카소 아카데미는 뭡니까? 일본에 아카데미가 또 있었습니까?”
못 들어본 이름이었다.
“비공식 아카데미다. 테스트 중이지. 현재는 아라시 아카데미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나와 협회가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된다면 내후년쯤에 공개될 것이다.”
“아카데미를 더 짓다니 대단하네요. 아카데미에 돈이 엄청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일본은 한국보다 인구수가 많으니, 아라시 아카데미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몇십 년 전부터 나왔었다. 그걸 감안하면 너무 늦게 지은 거지. 중국은 봐라. 아카데미만 5곳이 넘고, 비공식 아카데미까지 합하면 30곳이 넘는다. 너희 한국도 아카데미를 늘려야 할 거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스사노오의 곡옥이 특수 보관된 장소가 어딥니까? 어디길래 신세대 감성인가 뭔가가 필요한 거죠?”
“카소 아카데미가 비공식인 이유는 현재 그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기 때문이다. VR라고 아느냐? 신세대인 네겐 익숙하겠지.”
“…가상현실? 오로라 시뮬레이터가 있을 텐데요.”
현실에 가상을 덧입히는 오로라 시뮬레이터 덕분에 아카데미 학생들은 안전하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테라 시뮬레이터. 20년 전부터 개발한 오로라 시뮬레이터의 상위호환 기술이지. 완전한 가상 현실을 목표로 실험 중이다.”
“…그게 가능하다고요?”
“나도 참여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지금 와서는 거의 완성됐지.”
일본 최고. 아니, 공간계 능력자로 한한다면 세계 최고인 텐라이 나기사가 20년 전에 참여했다면 완전한 가상현실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스사노오의 곡옥은 가상현실 공간에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 그때는 가상현실에 넣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나와 협회는 생각했었지.”
“지금은 아닙니까?”
“협회에 배신자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색출하지 못한 배신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내가 직접 관리하는 편이 낫다.”
“츠쿠요미의 곡옥처럼 놈들이 아라시 아카데미를 습격한다면요?”
“그러지 않으려고 경비 인원만 5배로 늘렸다. 이래도 또 당한다면… 일본 히어로 협회가 무능한 탓이지.”
자기 탓이라고 절대 안 하는군.
“부탁은 받아들일 건가?”
“가상현실이라. 흥미롭네요. 가서 받아오기만 하면 되나요?”
“숨겨 놓았으니 찾아야 할 거다. 술식 인증 코드를 너와 성하리에게 부여해주마. 스사노오의 곡옥이 있는 방향과, 스사노오의 곡옥을 가져갈 수 있는 자격을 가르쳐 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것 같은데… 유진아. 엄마 혼자 할게.”
“아니, 엄마. 같이 하자. 엄마는 가상현실은커녕 게임도 잘 모르잖아?”
“같이 하거라. 아까도 말했지만, 성하리 너 혼자 보냈다가 사고라도 치면? 이건 섬 하나 날려 먹었을 때처럼 수습할 수 없다. 테라 시뮬레이터에 들어간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음. 아무리 나라도 손이 덜덜 떨리는구나.”
성하리는 나와 텐라이 나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위험한 건 아니지?”
“글쎄. 장담할 수 없겠군. 자, 둘 다 손을 내밀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