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7화 > 1727. 아카데미의 구원자
전투가 끝나고 바닥에 주저앉은 신보 레이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로 레이카의 눈동자가 고민하듯 흔들렸다. 그녀는 이내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넌 강해.”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정령안 덕을 봤다고 해야 할까.”
“정령안을 제외하더라도 실력 차이가 있다는 것쯤은 알아.”
신보 레이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의 계약 정령이 에이리스가 다가온 것이다. 모카의 벼락을 정령체로 막아냈는데 아주 멀쩡한 것 같았다. 정령 또한 오로라 시뮬레이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내 옆으로는 모카가 날아왔다.
“정령의 힘 차이부터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았어. 중급과 상급의 차이는 내 생각보다 컸어.”
“에이리스가 다른 방식으로 벼락을 막았다면 전투 양상은 달라졌겠지.”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에이리스의 힘으로는 그 번개를 온전히 막을 수 없었으니까. 저기, 정령은 어떻게 성장시킨 거야? 천둥 부엉이는 태생이 하급 번개의 정령으로 알고 있는데.”
신보 레이카의 두 눈이 반짝인다.
엘프들이 소속된 이그드라실 기사단의 일원인 그녀가 나보다 방법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런 의문을 일단 내려두고 대답했다.
“비법이 있지. 정령옥을 꾸준히 모으고 상급 정령의 기운을 흡수시키는 거야. 그럼 정령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어.”
“정령옥?”
“아, 그건.”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심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신보 레이카, 성유진 학생은 신속히 밖으로 나오세요!
“나중에 알려줄게.”
“그래. 내가 너무 붙잡았네.”
나와 신보 레이카는 떨어지며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국 진영에서는 내가 돌아오자 환성이 터졌다.
“이겼어! 이겼다고!”
“성유진! 성유진! 성유진!”
“지면 어쩌지 하고 마음 졸였었는데!”
“역시 내 아들이야!”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슬쩍 뒤를 돌아 일본 진영을 확인해본다. 한국에 비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나, 신보 레이카를 탓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들은 다음번에 더 잘하자며 서로를 격려한다.
‘정령술을 빌미로 신보 레이카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는 성하리와 함께 후쿠오카에 있는 카소 아카데미로 떠나야 한다.
***
후쿠오카로는 텐라이 나기사가 준비한 차를 타고 갔다. 텐라이 나기사가 준비한 운전사는 과묵했다.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밟을 뿐이다.
나와 성하리는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카소 아카데미 근처에 도착했다. 일단은 학교 근처에 있는 숙소를 잡고 내일 아침에 등교하기로 했다.
“하아.”
“엄마. 왜 또 한숨 쉬고 그래?”
“내일부터 교복 입고 학생인 척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 나이에 교복 입고 학생인 척 잠입이라니…. 너무 주책맞은 것 같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괜찮아.”
“왜?”
“엄마는 교복이 잘 어울리잖아. 진짜 내 또래로 보인다니까.”
“아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네.”
빈말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성하리의 외모는 내가 어렸을 때랑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성장이 아예 멈춘 것처럼. 대충 입어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교복을 입으면 분위기 탓인지 또래보다 성숙해 보이고.
“그러니 오늘은 교복 입고 어때?”
“안 돼. 교복은 한 벌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자야지? 3~4시간 뒤에는 학교에 가야 하니까.”
“엄마는 오랜만에 학생으로서 등교하는 거지? 어떤 기분이야?”
“글쎄. 음…. 뭔가 떨리네.”
숙소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차에서 자서 그런지 잠은 오지 않았다. 그건 성하리도 마찬가지인 듯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3~4시간.
지금 억지로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 아닌가.
마주한 우리의 거리는 점점 좁아졌다.
***
약속한 시간에 카소 아카데미의 입구로 향했다.
성하리는 내 옆에서 쭈뼛거리며 걸었다. 입고 있는 교복이 어색한 것도 있지만, 텐라이 나기사가 준 교복은 지나치게 짧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텐라이 나기사가 새로 준 교복은 배꼽 정도는 가려줬다.
‘복장만 놓고 보면 여자 양아치네.’
카소 아카데미는 산골에 있었다. 아직은 비공식으로 운영되는 아카데미라 그런지 일부러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엄마. 당당하게 걸어. 주위 눈치를 살피니 괜히 더 이상해 보이잖아.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
“다, 당당하게? 이 정도면 당당하지 않니?”
“일단 허리부터 펴고 말하지?”
성하리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으나, 그게 오히려 더 잘 어울렸다. 기분 나쁜 일이 있는 양아치처럼 보인다고 할까.
“어, 어때?”
“괜찮네. 치마가 짧긴 해도 엉덩이나 팬티는 안 보이니까 지금처럼 당당히 걸어.”
“후우. 유진이 너만 믿을게.”
카소 아카데미 입구에 도착했다.
아카데미 입구라기보다는 어떤 부잣집 사유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입구에는 아카데미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는 한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노인이었다. 지팡이를 집고 서 있었으나, 그 등은 굽지 않고 대나무처럼 꼿꼿했다. 지팡이는 그저 장식용으로 보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새하얗고 둥근 안경을 썼다.
“카소 아카데미의 학장인 하세가와 잇신입니다. 환영합니다, 성하리 님, 성유진 군. 선배님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선배님은 텐라이 나기사를 말하는 것일 터다. 머리와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 텐라이 나기사를 선배라 부르니 어색했다. 내 머릿속의 텐라이 나기사는 어린아의 외형을 가졌으니까.
“학장님이 직접 저희를 마중 오실 줄은 몰랐군요. 그래도 되나요?”
성하리가 물었다. 부끄러운 복장 탓인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카소 아카데미에서 여러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저뿐입니다. 카소 아카데미에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 마중 나왔습니다. 덤으로 할 일이 없기도 했습니다.”
하세가와 잇신이 허허 웃었다. 그는 이어 우리에게 학생증을 건넸다.
“준비한 위장 신분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친인척으로 낙하산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라는 설정입니다.”
학생증을 받은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학장님의 평판이 떨어질 텐데요?”
하츠모토 잇신은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하하. 괜찮네. 천년만년 학장 자리를 지킬 것도 아니니…. 그리고 이렇게 해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네. 카소 아카데미가 특수하다 보니 갑자기 전학생이 생겼다고 말해도 납득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 학생들이 질투할 수 있네만… 그건 유진 군이 알아서 견뎌줘야 하네.”
“뭐, 며칠 동안만 여기 있을 거니까요.”
학생증을 확인했다.
하세가와 소타.
카소 아카데미 3학년 A반.
“3학년이군요.”
“3학년이 테라 시뮬레이터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네. 반으로 가자마자 테라 시뮬레이터를 사용할 수 있을 걸세.”
나는 성하리의 학생증을 확인했다.
하세가와 아야.
카소 아카데미 3학년 A반.
“성하리 님. 두 분께서는 이복 남매라는 설정입니다. 어렸을 적에 헤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만난 것이죠.”
“…그런 설정이 필요한가요?”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타인에게 관심 없고, 의외로 타인에게 관심 있습니다. 디테일이 없으면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하세가와 소타와 하세가와 아야의 설정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출신지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음식이나 싫어하는 장소 등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질릴 정도다.
“혹시 이건 직접 준비하신 겁니까?”
“나 말고 누가 준비하겠나.”
이 늙은이의 취미인 것 같았다.
“성하리 님. 아카데미 내에서는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성하리 님에게 존댓말을 하면 이상함을 느끼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세요.”
성하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하세가와 잇신의 안내를 받아 카소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조금 걷자 산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건물이 있었다. 새까만 교복과 달리 건물은 새하얀 색으로 푸른 나무들과 어울려져 있었다.
“조용하고 풍경이 멋지네요.”
성하리는 건물이 마음에 든듯했다.
“하하. 저 건물도 카소 아카데미의 자랑이지. 5년 전에 지어진 건물인데 방금 지어진 것처럼 깨끗하지 않나? 건물 관리는 신경 써서 하고 있기에 그렇다네.”
하세가와 잇신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는 이 아카데미가 굉장히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가상 현실은 정말로 완성된 겁니까?”
“남은 건 테스트뿐이니 완성됐다고 할 수 있네. 테스트만 완벽하다면… 인류는 새로운 도약을 하는 거지. 그때가 정말 기대되는군.”
“스사노오의 곡옥은… 가상 현실의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나는 가상 현실에 있다는 것만 아네. 정확한 위치는 모르네. 선배님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으셨지. 그 물건은 자네들이 찾아야 할 걸세. 그리고 그 물건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조심하게.”
“카소 아카데미에 마도정의 끄나풀이 있습니까?”
“없다. 라고 말하고 싶네만… 카소 아카데미의 설립에는 선배님뿐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협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네. 마도정의 끄나풀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그들은 최소 몇 년간 여기서 일했겠지요? 근데도 그걸 못 찾았다는 건…. 저희도 그걸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선배님에게 따로 받은 건 없나?”
“있긴 합니다.”
“그럼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그는 나와 성하리를 교무실로 안내했다. 담임 선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짧게 당부하고선 그대로 사라졌다.
담임 선생은 여자였다. 특이하게도 의사나 과학자들이 입을 법한 하얀 가운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눈 아래에는 다크 서클이 진했다. 피로해 보이는 인상의 그녀는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하세가와 아야, 하세가와 소타. 따라 와. 설마 전학생이 올 줄은 꿈에도 예상 못 했어. 아, 나는 3학년 A반의 담임인 쿠로사와 유나야. 딱히 내가 가르치는 건 없지만.”
“가르치는 게 없다고요?”
“직접 경험해보면 알 거야.”
그녀는 힘없이 걸으며 교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