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9화 > 1729. 아카데미의 구원자
찰나가 발동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이런 개 같은.’
C급 빌런 카즈히로가 코앞으로 다가와 칼을 휘두른다. 나도 그에 맞서 칼을 휘둘렀다. 당황한 나는 그의 칼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까 그 패기는 어디 갔나! 날 좀 더 재밌게 해봐라, 애송이!”
“찰나만 쓸 수 있어도 한칼 거리도 안 되는 새끼가….”
채앵. 챙.
칼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튄다.
어떻게든 카즈히로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긴 한데 전투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뇌전과 찰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계속 떠돈다. 이건 너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채앵! 챙! 챙!
카즈히로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냈는데도 자잘하게 베인 상처가 몸에서 늘어난다.
‘베였다기보다는 긁힌 수준이긴 한데… 이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온몸이 피로 절여질 것이다.
‘가상 현실 맞아? 칼을 휘두르는 감촉이나 고통까지 너무 생생하잖아.’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카즈히로의 칼을 쫓고 있다. 카즈히로가 가볍게 도약한다. 몸의 무게를 완전히 실어서 내려찍는 상단 베기. 나는 칼을 옆으로 세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왼쪽 팔뚝 쪽이 베였다. 이번엔 꽤 깊다. 혈관이 베인 건지 대량의 피가 흘러내린다.
나는 발로 놈의 복부에 옆차기를 날렸다. 옆차기에 적중한 놈이 뒤로 날아가 쓰러진다. 놈은 지체 없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웃는다.
“하하. 그렇게 피를 흘렸으면서도 팔팔하구만. 젊어서 그런가?”
“네 능력이냐?”
“보이지 않는 예기. 라는 능력이다. 네가 내 칼을 몇 번이고 막아봤자, 보이지 않는 칼날은 결국 네 몸에 닿는다. 직접 겪어 봤을 테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카즈히로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든다. 나는 이놈의 검술이 왜 투박한지 이해했다. 놈은 일부러 투박한 검술을 고집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막기 쉽도록,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방이 죽음의 늪에 빠지는 것을 천천히 감상하며 즐기는 것이다.
‘빌런답다고 해야 하나.’
C급 빌런 카즈히로.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 학생들 상대로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게 아닐까 싶다.
‘아니지. 지금 날 애송이 취급하며 방심하고 있는 꼴을 보니 실제로는 D급인가?’
피가 빠져서 그런지 몰라도 당혹감이 줄어들고 머리가 냉정해진다.
내 앞으로 다가온 카즈히로가 상체를 푹 숙였다. 상체로 가려진 그의 칼이 허리춤에서 움직인다. 아래에서 위로. 사선. 방향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기서 결판을 본다.
작정하고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그러자 시간이 느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찰나에 비하면 느려진 것도 아니었다.
뇌천류(雷天流) 패월(蔽月).
파지직.
뇌기(雷氣)가 전신으로 퍼지며 상체가 꽃잎처럼 흔들린다. 패월은 영천류의 카운터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다. 실패할 확률이 꽤 높은 기술이지만… 뇌천류식으로 사용해서 그런지 지금은 확실하게 성공했다.
카즈히로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나친다. 그의 능력인 보이지 않는 예기도 내 몸에 상처 입히지 않는다.
‘그렇군. 막지 않으면 능력도 발동하지 않는 건가.’
이어서 반격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전신으로 퍼져나갔던 뇌기가 순식간에 칼로 모여들었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손에 쥔 칼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카즈히로의 목을 베었다. 카즈히로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진다. 그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직후, 목에서 피가 뿜어지며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이터에 없는 무술을 확인했습니다.」
「무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꼭 말해야 하나?”
알림창이 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몸에 묻는 피, 팔딱팔딱 뛰는 심장, 적을 죽이는 감각. 모든 게 현실과 똑같았다. 가상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리얼했다.
「학생의 정확한 데이터를 위한 일입니다.」
「정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적을 산출합니다. 성적을 위해서 무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뇌천류다.”
「뇌천류. 확인했습니다.」
「아직 학생의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전투를 이어가 주십시오.」
하늘에서 10개의 빛이 떨어진다. 빛은 이어 몬스터가 되었다.
오크. 익숙하다면 익숙한 녹색 괴물 10마리는 각각 완전 무장한 채로 내게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칼을 손에 쥐었다. 어느새 내 몸에 있던 상처들은 모두 회복된 뒤였다.
‘완전 회복 급인데?’
물론 완전 회복은 쓰지 않았다.
냉정해진 나는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들을 실험했다.
‘유희 종료.’
[유희를 종료하시겠습니까?]
유희 생활 어플이 곧바로 반응했다. 가상현실이어도 유희를 종료할 수 있었다. 유희 생활 어플에 오류가 있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뇌전과 찰나를 사용할 수 없는 건… 여기가 가상현실이라서 그런가?’
그런데 또 뇌천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완전 회복.’
완전 회복도 반응이 없었다.
원인이 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나는 뇌천류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 전부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뇌전과 찰나, 완전 회복은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 모른다. 전부 유희 생활 어플이 보조해주니까.
‘뇌천류는 유희 생활 어플의 보조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어. 위력은 좀 떨어지긴 하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이다.
그리고 아직 실험하게 남아 있었다.
‘정령안.’
마나가 눈 쪽으로 모여들며 황금색으로 빛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혀를 찼다. 마나가 눈에 보이긴 하는데 뭔가 이질적이다.
‘천안.’
천안을 사용한다. 천안의 능력 중 하나는 다른 시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나는 캡슐 속에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시점을 바꾸면 노트북을 두들기는 쿠로사와 유이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성하리의 데이터를 주시하고 있다. 그래프와 수치로 되어 있어서 정확히 어떤 데이터인지 알 수 없었다. 수치는 계속 변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느리다. 노트북 성능 문제가 아니다. 흐르는 시간이 달랐다.
‘대략 5배 정도인가.’
천안을 해제한다. 시야가 두 개로 늘어난 느낌이라 꽤 불편했다.
‘천심.’
천심은 반응하지 않았다.
‘천운.’
대상은 오크다. 원하는 건 선두에서 뛰어오는 오크가 돌연사할 확률.
[천운(天運)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5%의 확률을 상승시키는데 1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천운(天運)을 사용합니다. 현재 확률은 5.005%입니다.]
천운은 발동됐다.
포인트를 사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실험해보기 위해서 오크가 돌연사할 확률을 100%로 바꾼다. 사용한 포인트는 총 20 포인트.
[현재 확률은 100%입니다.]
선두에서 돌진해오던 오크가 피를 내뿜으며 고꾸라진다. 죽은 것이다.
다른 오크 들이 멈칫했으나,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놈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달려온다.
‘가상현실 AI는 눈치채지 못한 건가?’
실험할 건 또 있었다.
‘해킹.’
[해킹에 성공했습니다.]
[테라 시뮬레이터를 1.3초간 해킹합니다.]
눈앞의 오크들을 지운다.
내 뜻대로 오크들이 사라진다. 그러나 오크는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건 5마리가 전부.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오류를 복구합니다.」
사라졌던 오크들이 나타났다. 오크 5마리. 처음에 천운으로 돌연사한 오크는 오류가 아니라고 AI는 판단한 것이다.
“잠깐. 나는 정령사다. 정령안을 사용했는데도 정령력이 아예 안 느껴지는군. 내 데이터를 구현하고 싶다면 정령력도 구현해라.”
「환경을 재설정합니다.」
정령력이 느껴졌다. 마나와 달리 정령력은 완벽하지 않았다. 진짜 정령력에 비하면 뭔가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
정령계약(A)을 사용한다. 정령력이 요동치더니 정령 하나가 소환됐다.
불도마뱀이었다. 달리 샐러맨더라고도 불리는 불의 중급 정령이었다.
“샐러맨더. 계약을 원한다.”
“알겠다.”
정령안과 정령계약은 가상 현실에 구현되었다. 이건 좀 의외였다.
‘이게 구현될 거면 뇌전과 찰나도 구현할 수 있지 않나?’
뭐 엄밀히 말하면 두 개의 힘은 출신이 달랐다. 정령안과 정령계약은 이 세계의 힘이고, 뇌전과 찰나는 유희 생활 어플의 힘이니까.
“샐러맨더. 저 돼지 새끼들을 돼지구이로 만들어라.”
“알겠다.”
정령의 반응은 지나치게 쿨했다.
‘이건 현실과 다르군. 진짜 정령은 까다로운데 말이지.’
중급 이상 되는 정령은 쉽게 계약하지 않는다. 계약했더라도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명령을 내리면 거부할 수도 있었다.
샐러맨더가 입을 벌리며 불을 내뿜었다. 불길은 점점 커졌고 이내 9마리의 오크들을 모두 단번에 태워버린다.
마나가 확 빠져나간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아직 학생의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전투를 이어가 주십시오.」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사람보다 큰 독수리였다.
“그래, 뭐.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고.”
몬스터를 가리키며 샐러맨더에게 명령한다.
“태워버려.”
“알겠다.”
부와아아아악!
불꽃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거대 독수리는 날개를 펼치며 피했다. 나는 샐러맨더를 조종해서 거대 독수리르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렇게 총 7번의 전투가 끝난 뒤에 AI가 말했다.
「하세가와 소타 학생의 데이터 수집을 완료했습니다.」
「정보를 갱신합니다.」
「이름: 하세가와 소타
소속: 카소 아카데미 3학년 A반
레벨: 1
직업: 정령사
보조직업: -」
「보조직업을 선택해 주십시오.」
“보조직업? 멋대로 직업을 정해놓고 보조직업은 나보고 정하라고?”
「직업은 학생의 적성을 의미합니다. 보조직업은 원하시는 전투 방식과 성장 방향을 의미합니다. 보조 직업은 보류할 수 있습니다.」
“하긴 검사 적성이 있지만, 활을 쓰는 궁수가 되고 싶은 놈들도 있을 테니. 학생의 의견도 나름 반영해준다는 건가.”
보조 직업은 검사 같은 걸 선택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건 너무 시시하지 않나. 나는 색다른 걸 원했다.
“섹스 마스터.”
「존재하지 않는 직업입니다.」
“마사지 마스터.”
「존재하지 않는 직업입니다.」
“왜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AI 강간범.”
「존재하지 않는 직업입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골라주십시오. 올바른 태도로 임하지 않을 시 벌점이 부과됩니다.」
“나한테 관리자 권한이 있지 않나?”
「하세가와 소타의 관리자 권한은 특수합니다. 표면적인 당신의 권한은 학생입니다.」
“아, 그러셔. 차라리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 있는지 보여줘.”
직업 목록이 떠오른다.
혀를 찼다.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히든 직업이 보이지 않았다. 다소 특이한 직업이 있긴 해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많이 색다른… 프리스트나 해볼까. 프리스트!”
「보조 직업이 설정되었습니다.」
「이름: 하세가와 소타
소속: 카소 아카데미 3학년 A반
레벨: 1
직업: 정령사
보조직업 레벨: 1
보조직업: 프리스트」
「보조직업은 후에 변경할 수 있습니다. 단, 보조직업 변경 시 보조직업 레벨이 초기화됩니다.」
「튜토리얼을 종료합니다.」
「카소 아카데미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