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1화 > 1731. 아카데미의 구원자
3학년 A반 캡슐실로 들어온 하세가와 잇신이 다짜고짜 들어와 지팡이를 허공에 휘둘렀다.
투명한 결계가 펼쳐진다. 이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도청기로부터 흔적을 지운 것이다. 거기에 돌발적으로 캡슐에서 나오는 학생들에게 대응할 수 있다.
“그들의 데이터는 어떤가?”
노트북 앞에 앉아 다리를 꼬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쿠로사와 유이는 그를 힐끔 보고는 차분히 대답했다.
“평범해요. 육체 데이터도 학생들 평균이에요. 빠르게 경험치가 쌓이는 걸 봐서는 몬스터를 쉬지 않고 사냥 중인 모양이네요.”
“평균적인 육체 데이터로 그게 가능한가?”
“육체도 쓰기 나름이죠. 아카데미 밖에서 전투 경험을 잔뜩 쌓고 들어왔다면… 지금 데이터도 이상하지 않죠.”
카소 아카데미의 학장, 하세가와 잇신은 지팡이로 툭툭 바닥을 찍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쿠로사와 군. 그들은 학생이 아닐세.”
“그렇군요. 현역 히어로인가요?”
“한 명은 그렇고, 한 명은 학생이지. 그 정체를 알면 꽤 놀랄 걸세.”
쿠로사와 유이는 미간을 좁혔다. 하세가와 잇신과 대화를 나누면 항상 답답함을 느낀다. 중요한 정보는 말하지 않고 빙빙 돌리기 때문이다.
“저들이 정확히 누구죠? 저도 알아야 대처를 하든 말든 하죠. 협회에서 보낸 자들인가요?”
“협회에서 왔다면 오히려 상대하기 쉽지. 그들은 더 성가신 곳에서 왔네.”
“…학장님이 성가셔할 만한 곳…? 아. 어딘지 짐작 가네요.”
“저 둘은 일본인이 아닐세.”
“네?”
“한 명은 유명하지. 성하리.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아들일세.”
쿠로사와 유이는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 확실히 알고 있는 성하리의 외모였네요. 분명 알고 있었는데… 왜 방금까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었지…?”
“자네가 문제가 아닐세. 선배가 인식을 방해하는 음양술을 걸어뒀네. 안면이 없다면 성하리를 직접 봐도 성하리인 걸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거지.”
“…제가 이렇게 당할 줄이야. 역시 공희답다고 해야 할까요. 대단한 음얄술이에요. 근데 학장님은 이래도 되는 거예요?”
“뭘 말인가?”
“지금 공희를 배신하고 있잖아요. 학장님은 공간의 공주의 빠돌이가 아니었나요? 듣기로는 공희에게 큰 빚이 있다면서요?”
“그것도 옛날 일이지. 빚은 다 갚았네. 언제까지 선배님에게 얽매여 살 순 없지 않나.”
하세가와 잇신은 정면의 캡슐을 빤히 쳐다봤다. 테라 시뮬레이터가 완성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며 자포자기했던 게 기억난다. 그러나 여러 군데에서 지원받으며 점점 그 형태를 갖추어 완성했다.
테라 시뮬레이터는 자신의 20년을 쏟아부어 완성한 걸작이었다.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 자신이 죽더라도 테라 시뮬레이터가 존재하는 한 그 이름은 수백 년이고, 수천 년이고 이어지겠지.
“선배님에겐 미안하지만… 테라 시뮬레이터에 대해 알리지 않은 정보가 많네. 그중의 하나가 시간 배율이지. 그리고 아직은 알려져선 안 될 정보이네.”
“외부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재밍을 하라는 거군요.”
“결계는 내가 손보겠네. 마법적 힘으로도 바깥과 연락하지 못할 걸세.”
“그냥 차라리 지금 죽여버리시죠?”
“캡슐 안에 들어가지 않았나? 캡슐로 보호받고 있는데 어떻게 죽이나. 긴급 접속 종료 시스템이 발동하고 성하리가 깨어날 걸세. 성하리가 어떤 히어로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테라에게 명령한다면요?”
“자신의 원칙대로만 움직이는 테라가 들어주겠나.”
인공지능 테라에게 손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 그 태생이 인간의 손이 아닌 던전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성형에 가까운 인공지능이기에 테라를 완벽히 지배할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부탁에 가까운 명령뿐이다.
“그럼 어쩌자는 거죠?”
“저들의 목적은 스사노오의 곡옥을 찾는 것일세.”
“…그게 없으면 테라 시뮬레이터는 끝난다는 건 아시죠?”
“그래. 가상현실의 구현을 담당하는 핵심이 됐지. 쿠로사와 군. 우린 저들을 죽일 필요가 없네.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되네. 시간이 부족한 건 우리가 아니라 선배이니. 그리고 저들이 실패하면 선배도 이제 인정하겠지. 스사노오의 곡옥은 현실보다 가상현실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아, 네.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럼 테라에게 명령해서 저들이 상대하는 몬스터의 난이도를 대폭 늘리도록 하죠. 근데 그 성하리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성하리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있다는 건 자네도 들어보지 않았나. 그 소문은 사실이네. 아까 만나 보니 알겠더군. 옛날에는 몰랐어도 지금은 S급에도 미치지 못하네. 성하리도 세월을 이겨내진 못했다는 뜻이지.”
“글쎄요.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피부도 얼마나 깨끗하던지. 그거 하나는 엄청 부럽네요. 이 망할 놈의 다크 서클은 언제 사라지려나….”
“크흠.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테라 시뮬레이터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면 자네와 나는 명성과 돈. 모든 걸 얻게 될 걸세.”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참으면서 일하는 거죠. 문제는 부작용인데. 그건 어쩔 거죠?”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라면 할 수 있을 걸세.”
“우리가 아니라 제가 고생하는 거겠지만요.”
쿠로사와 유이는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을 두들겼다. 다행히 테라는 의문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조금 아쉽군. 저들이 가상현실에서 뭘 하는 지 알 수 없나?”
“데이터로 아는 건 한계가 있죠. 사냥을 끝내서 그런지 반응이 없네요. 으음? 성하리와 그 아들의 데이터가 요동치네요.”
“무슨 일이지?”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싸우고 있는 경우죠.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는 모양이네요. 아, 성하리의 반응이 더 강하네요. 뭐, 서로 싸운다면 성하리가 이기겠죠.”
“정확히 뭘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군.”
“어쩔 수 없죠. 모니터링하고 싶어도 실시간으로 따라가기에는 시간 흐름이 다르니까요. 억지로 연결해도 이쪽이 감당하지 못해요. 개선해야 할 부분이죠.”
“어쨌든 그들을 최대한 막아주게.”
“학장님은요? 제게 일 맡기시고 어디 가시나요?”
“선배님의 부탁을 받고 내부를 샅샅이 조사하니 마도정의 첩자가 몇 보이더군. 나는 그들을 처리하겠네.”
***
가상현실 게임을 실제로 해본 소감을 말하자면… 생각했던 것보다 그저 그랬다.
‘판타지 적인 요소가 너무 적어. 그리고 너무 리얼해.’
아카데미 학생의 교육을 위해서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어쩌면 내가 헌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헌터인 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익숙했다.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의 경우 몬스터와 싸우고 이기면 내가 받는 이상의 쾌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칼도 꽤 괜찮은걸?”
시큰둥한 나와 달리 성하리는 가상 현실을 즐기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여기에선 정령왕의 주박의 걱정을 아예 하지 않아도 되니까.’
무엇보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날뛰어도 된다. 그녀의 힘을 못 견딘 자연이 파괴되더라도 가상현실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복구된다.
몬스터가 죽으면 잿빛으로 변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돈과 아이템이 남았다.
“소타!! 이것 봐! 신발을 얻었어!”
“신발?”
강철 신발이었다. 그냥 신기엔 너무 불편해 보였다.
“어디 보자 사이즈가… 으응?”
성하리가 사이즈를 재기 위해 강철 신발 옆에 발을 갖다댄 순간이었다. 신발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어. 장착되었다고 하네?”
그녀의 발은 아카데미에서 지정한 교복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까 만난 학생들을 떠올린다. 기본적으로 교복 베이스였고 그 위로 장비를 덧씌운 느낌이다.
‘학생이라 반드시 교복을 착용하게 만들었나?’
성하리는 멈춰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상태창이나 스킬, 인벤토리를 보는 것이다. 내가 설명해줬을 때는 곤란하다는 웃음을 짓더니 몇 번 직접 해보더니 금세 익숙해졌다.
“소타. 레벨 3이 되니 새로운 스킬이 생겼어.”
“무슨 스킬인데?”
“돌진.”
“한번 써봐.”
“응. 스킬을 쓰려면 강하게 떠올리고 자세를 잡은 뒤에… 돌진!”
성하리가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전투할 때 달려가는 성하리보다 훨씬 느렸기 때문이다.
“그게 돌진이야?”
“응. 발이 멋대로 움직이고 등을 밀어주는 느낌이야. 마나도 멋대로 움직였는데… 여러 가지로 엉망이네. 하다못해 보법만 제대로 됐어도 더 빨랐을 텐데.”
스킬의 한계로밖에 볼 수 없었다.
-유진! 웬 늙은이가 캡슐실로 들어왔어!
마키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직접 마키나가 말을 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늙은이?’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현실의 모습이 보인다.
카소 아카데미의 학장 하세가와 잇신이었다. 시간 차이 때문인지 그의 움직임은 느릿했다. 뭔가 결계를 친 것 같은데 천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키나. 너 어떻게 실시간으로 내게 말을 하는 거냐? 시간이 다르니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응? 그냥 5배로 사고해서 너랑 맞추면 돼. 주파수를 맞추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주파수? 그 비유는 좀 아니지. 다른 정령들도 그게 가능해?’
-그건 나도 몰라. 어쨌든 나는 할 수 있어.
‘저 둘의 대화. 들을 수 있어?’
-결계 때문에 목소리는 안 들려. 너랑 이어져 있지 않았다면 모습도 못 봤을 거야.
‘시야를 공유 중이었다고? 난 허락한 적 없는데?’
-뭔 소리야. 정령안 썼잖아. 그때부터 계속 이어져 있어.
정령안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상태였다. 뭔지 몰라도 이건 오류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테라 AI도 인식하지 못한 오류라고 해야 하나?
-아! 연결 끊지 마! 간접적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가상현실 게임하고 싶단 말이야!
‘연결 끊는 방법도 모르겠다. 저 늙은이 새끼한테 가까이 갈 수 없나? 딱 봐도 뭔가 저지를 느낌이라 대화를 알아야겠어. 뒤통수가 아려오네.’
-결계 때문에 가까이 가기 힘들어. 그래도 대화는 알 수 있어.
‘어떻게?
-너 바보야? 입 모양을 보면 말을 유추할 수 있잖아.
마키나가 기어오른다. 나는 올라오는 화를 꾹 참았다. 지금은 마키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독순술을 할 수 있으면 진작 말하지. 저놈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야?‘
-어 그러니까…. 방금은 ’그들의 데이터는 어떤가?‘라고 저 늙은이가 말했어.
’다음은?‘
-지금 저 여자가 말하고 있잖아. 좀 기다려. 5배 차이가 나서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없어. 이 바보야!
씨발년이.
주인에게 바보라니. 짜증이 치솟았지만, 나중에 보지 발도 오나홀로 만들어 괴롭혀주기로 하고 참았다. 지금 당장은 마키나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