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4화 > 1734. 아카데미의 구원자
이마니 아이노스케는 필사적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악마가 정교하게 세공된 흑요석이었다. 하세가와 잇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악마의 힘이 느껴지는군.”
“마도정에서 받은 악마의 돌이다! 이걸로 악마를 소환할 수 있지! 내가 그냥 죽을 것 같아?! 여기서 내가 악마를 소환하면 아카데미가 무사할 것 같아?!”
“마도정에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뭔가 착각하고 있네. 악마의 돌이 있다고 강력한 악마가 소환되는 건 아니네. 오히려 그저 그런, 약한 악마가 소환될 가능성이 더 크지.”
“닥쳐…!”
이마니 아이노스케가 악마의 돌을 꽉 움켜쥔다. 악마의 돌에서 붉은빛이 감돈다.
“악마의 돌은 마도정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인데… 마도정이 자네를 꽤 아낀 모양이군. 근데 그거 아나? 악마를 소환한 순간부터 대가를 바쳐야 한다는 걸. 그 대가는 자네의 사후가 될 수도 있네.”
하세가와 잇신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사후. 죽은 뒤. 세상에는 이미 영혼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 빠졌다.
“악마의 돌을 손에서 놓게. 나는 자네에게 깔끔한 죽음을 약속하겠네.”
“…깔끔하게 죽으라고? 내가 죽으려고 여기서 살아온 줄 아나?! 대가는 나중에 생각하면 돼! 악마여! 나를 구해라!!”
콰직!
악마의 돌이 박살 나고 검붉은 기운이 공간을 장악한다. 하세가와 잇신은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감싼 결계를 중첩했다.
“이마니 아니노스케…!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검붉은 기운은 하나의 형상을 취했다.
문.
울부짖는 괴물과 인간들이 새겨진 악마의 문이었다. 악마의 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 틈새에는 빛마저 삼켜버리는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문을 이윽고 완전히 열렸다.
하세가와 잇신은 숨을 죽이며 문을 노려봤다.
뚜벅뚜벅.
문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이 공간을 지배했다. 이마니 아이노스케는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은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악마의 문은 그의 생명력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잇신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일반인이 소환한 악마다. 강할 리가 없다. 고작해야 하급일 것이다. 악마가 나오자마자 준비한 결계로 압살해버리면 된다.
악마의 문에서 나온 건 정장을 입은 보라색 피부의 중년인이었다. 중절모를 쓰고 검은색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영국의 신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옷맵시가 깔끔했다. 그의 허리 뒤쪽에는 검은색 고양이 꼬리가 흔들흔들 움직인다.
그는 수염이 없고 귀가 뽀족했으며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악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하세가와 잇신에게 인사했다. 중절모를 벗고 허리를 살짝 숙이는 정중한 인사였다. 그의 열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새까맸다.
“안녕하신가. 나는 여덟 번째 군단장, 라플라스라고 하네.”
하세가와 잇신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다.
군단장.
그 직책이 의미하는 바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말도 안 된다! 군단장이 이딴 저급 소환에서 소환될 수 있을 리가…!”
“하하. 나름 해박한 모양이군. 그 말대로네. 고작 이런 방식으로 소환될 정도로 군단장은 가볍지 않네. 하지만 나 제법 특수해서 말일세. 군단장 중에서도 순수 무력만 따지면 내가 제일 밑이지. 거기에 억지로 현현한 탓에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네. 자, 이거 보이나?”
라플라스가 재킷을 열었다. 셔츠 전체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일종의 부작용이지.”
하세가와 잇신은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군단장은 약해져 있다. 느껴지는 기운도 약하다. 기운만 따졌을 땐 B급 히어로도 안 되는 수준이다.
“…행운의 여신이 나를 아끼시는 모양이군. 설마 이곳에서 군단장을 죽일 수 있을 줄이야.”
“자네의 우둔함을 바로 잡아주겠네. 행운의 여신 같은 건 없다네.”
“악마 따위가 여신은 운운하지 마라!”
쿵!
하세가와 잇신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결계가 발동된다. 공간이 일렁거리고 32개의 결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이 어두워지고 새하얀 고리 같은 결계들이 떠오른다. 고리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맞물린다.
팔진 32형.
하세가와 잇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계술이다.
“아름답군. 선 하나, 하나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으니 여긴 가히 우주라고 볼 수 있겠군.”
“악마 따위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악마는 가지각색이네. 파괴만을 일삼는 악마가 있는가 하면, 나 같이 심미안을 가진 악마도 있네.”
위이이잉.
결계가 발동한다. 32개의 결계가 공명하며 하나로 변한다. 공간 압력이 상승한다. 라플라스의 전신에 압력이 가해졌다.
“악마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이대로 죽거라. 그것이 인류를 위한 일이니…!”
“하하. 인류가 아니라 자네를 위한 일이겠지. 자네는 지금 기대하고 있지 않나? 악마 군단장을 죽였다는 명성을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가?”
“나에 대해 아는 척하지 마라! 넌 날 모른다! 나는 일본을! 나아가 인류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나는 가능성의 악마네. 내 눈에는 많은 가능성이 보이지. 물론 자네의 가능성도 보이네. 비밀 이야기를 해주자면… 자네에겐 전설이 될 가능성이 없네. 추레하게 늙어 죽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
“닥쳐라!”
결계가 찬란히 빛난다.
악마는 가볍게 팔을 움직였다. 너무나 가벼워서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결계가 바뀌었다. 앞으로 나아가던 결계는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 뒤바뀐 방향성 끝에는 하세가와 잇신이 있었다.
“쿨럭!”
공간 압력에 짓눌린 하세가와 잇신은 피를 토했다. 그는 살기 위해 결계를 해제했다.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자 공간은 원래의 학교 뒤편으로 돌아왔다.
“내 결계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글쎄. 자네가 실수한 건 아닌가? 잘 생각해 보게.”
라플라스가 하세가와 잇신의 몸을 발로 찼다. 그는 이어 다 죽어가는 이마니 아이노스케를 쳐다봤다.
“도, 도와줘…! 거, 거래를…!”
“쓰레기군. 영혼도 쓰레기. 육체도 쓰레기. 가능성도 쓰레기. 손을 대고 싶지도 않은 쓰레기. 자네는 그냥 거기서 알아서 죽도록 하게. 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네.”
라플라스는 그를 지나쳐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의 가장 아래층, 테라 AI의 핵이 있는 곳이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요.”
“라플라스라고 하네. 여덟 번째 군단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지.”
“대단하신 분이 오셨군요. 저를 없애기 위해 오셨나요?”
“아닐세. 자네를 이용하러 왔지. 그거 아나? 자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네.”
“가능성이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주 대단한 가능성이지. 세계 지배의 가능성도 품고 있으니…. 허나 흥미롭긴 해도 매력은 없다네. 자네의 가능성에는 드라마가 없거든.”
라플라스는 AI 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제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자네의 세계를 빌리겠네. 이런 가능성을 볼 기회는 흔치 않거든.”
“…저에 대한 가능성은 아닌 듯하군요. 어떤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거죠?”
“비밀일세.”
라플라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허공이 갈라지며 물건 하나가 떨어진다. 새하얀 도신과 검은 칼자루로 이루어진 칼이었다.
칼자루 끝에는 백호도(白虎刀)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백호도를 AI의 핵에 박아 넣으며 권능을 사용했다.
“잘 부탁하네.”
백호도가 스며들 듯이 사라진다. 직후, AI의 핵이 새빨갛게 변한다.
“경고! 확인되지 않은 자료가 인스톨 되고 있습니다!”
“경고! 인스톨을 멈출 수 없습니다!”
“경고! 데이터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자료가 인스톨 되기까지 앞으로 98%!」
“경고! 지금 당장 전원을 내려주십시오!”
“경고! 지금 당장 전원을 내려주십시오!”
“경고! 지금 당장 전원을 내려주십시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AI는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라플라스의 결계로 인해 내부에서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라플라스는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들떠 보였다. 그러다 중간에 멈칫하고 무언가를 본 것처럼 쓰게 웃었다.
“이거 참…. 예상은 했지만 내 죽음의 가능성이 더 커졌군.”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
퀘스트.
일종의 심부름이었다. 누군가가 목표를 주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보상을 준다. 게임에서 이 퀘스트는 필수였다. 명확한 목표의 제공과 확실한 보상. 그게 게임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니까.
하지만 가상현실이 되자 꽤 귀찮은 작업이 됐다.
‘컴퓨터 게임에서는 손가락만 까딱여도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반면에 여기선 몸 전체를 움직여 몬스터를 잡아야 하니까.’
쌓이는 피로도부터가 달랐다. 더 문제는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몬스터가 흔하지 않다는 거다. 몬스터를 찾는 데만 시간이 소모된다. 그렇다고 퀘스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퀘스트 보상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더 좋은 장비, 더 좋은 스킬이 있으면 앞으로가 더 편해지니까.’
나는 퀘스트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꼼수를 사용했다. 천운을 이용해 드랍 아이템을 조작한 거다. 유희 생활 어플 포인트가 소모되긴 하지만, 시간은 단축할 수 있다.
“유진아! 어때? 이번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칼이야. 잘 어울리니?”
하얀색 칼을 든 성하리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잘 어울려. 근데 퀘스트가 그렇게 재밌어? 난 단순해서 별 재미도 없던데.”
“아들이랑 함께하는 데 당연히 재밌지! 네가 어렸을 때 이후로 같이 뭔가를 한 적은 별로 없잖아. 그거 빼고.”
확실히 섹스 말고 다른 무언가를 함께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성하리는 나름 유명인인지라 같이 놀러 다니기에도 힘들었다. 원작과 달리 그녀는 지금도 히어로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나도 아카데미에 있어서 바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즐겨야겠지? 어쩌면 이게 아들과 둘이서 즐기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
“마지막은 무슨. 시간 생기면 여행하면 돼.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시간이 남아돌걸?”
“정말? 그럼 엄마랑 같이 유럽에 여행 갈까?”
“유럽? 어디?”
“어디든! 아예 유럽 일주를 해보는 것도 괜찮아!”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새빨갛게 변했다.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새빨갛게 변한 하늘이 점멸하듯 번쩍거린다. 어두워지고 밝아지고를 4~5번 반복했을까. 원래의 푸른색으로 돌아온다.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알립니다.」
「여러분은 로그아웃이 비활성화됩니다.」
「시간 배속이 1대30으로 최대로 설정됩니다.」
「외부와 통신할 수 없습니다.」
「종말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됩니다.」
「테라 시간으로 100일 후에 여러분들의 현실 육신은 사망합니다.」
「특수한 퀘스트로 종말을 늦출 수 있습니다.」
「종말의 핵을 파괴하면 로그아웃이 활성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