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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735화 (1,515/2,000)

< 1735화 > 1735. 아카데미의 구원자

AI의 알림창이 뜬 직후였다.

가상현실의 세계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땅이 솟구치고, 바위와 나무가 뒤집히며 재구성된다. 세상 그 자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흡사 종말이라도 겪는 느낌이었다. 다행인 건 나와 성하리에겐 바람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이는 게 워낙 웅장하다 보니 성하리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근처에 있던 NPC도 재구성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몸이 분해된다. 물론 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NPC를 구성하는 건 피가 아닌 데이터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진짜 같아도 가짜였다.

‘플레이어는 다치면 피가 나오는데, NPC는 아니군.’

나는 태연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몰라도 좆된 건 확실하다. 허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마키나를 현실에 소환해두지 않았던가.

‘마키나. 들려?’

-왜? 무슨 문제 있어? …잠깐. 사고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어. 좀 천천히 말해봐.

‘가상현실 세계에 갇혔다. 원인이 뭔지 알아야겠어.’

-어, 진짜? 그거 큰일이네. 며칠 뒤에 아줌마랑 놀기로 했는데…. 근데 나보고 그 원인을 알아내라는 건 아니지?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

마키나의 목소리에서 귀찮다는 티가 팍팍 났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바깥 상황은 어떻지? 좀 움직여서 확인해 봐. 캡슐에 수작을 부리는 놈은 없고?’

-응. 없어. 조용해.

‘우리를 가두기 위해 일부러 이 사고를 낸 건 아니라는 건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AI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상현실과 현실의 시간 차이는 50배니까. 현실의 상황까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키나는 50배의 사고 속도를 따라오는 모양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겠지.’

-으으. 근데 언제까지 이어져 있을 거야?

‘힘들어?’

-응. 지금 상태는 힘들어. 네 사고 속도가 너무 빨라. 내게 흘러 들어오는 마나가 늘어나거나, 특수 기계로 변하면 모르겠는데…. 그건 지금 불가능하잖아.

‘왜 그게 불가능해? 내 몸에서 알아서 마나를 가져가.’

내가 가진 능력치 중에서 가장 높은 건 마나였다. 무려 A+ 랭크의 마나다. 아카데미 학생 중에선 최고봉이고, 현역 히어로 중에서도 마나 랭크만 보면 따라올 자가 거의 없다.

마나가 부족하다. 그 단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와 아줌마의 마나는 캡슐에 계속 빨리고 있잖아. 몰랐어?

‘…현실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어. 아마 누군가가 내 가슴에 칼을 박아도 모를 테지. 그래서 널 현실에 소환한 거고.’

-이건 내 잘못 아니야!

‘알아.’

마키나가 있어도 대처할 수 없었다. 마키나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설마하니 AI가 맛이 가버릴 줄은 나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카소 아카데미든 뭐든 손을 쓴다면 캡슐 쪽에 쓸거라 생각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니까.

-이제 어떻게 할까?

‘정보 수집이 최우선. 그리고 놈들이 나와 엄마에게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지켜봐. 만약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한다면?

‘캡슐과 함께 날 죽여. 캡슐을 박살 나는 게 중요한 거 잊지 말고.’

그럼 연결이 끊길 것이고, 완전 회복을 통해 현실에서 부활하면 된다.

-응! 알았어!

마키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인을 죽이라는 명령인데 좋아하다니?

‘…됐어. 마키나를 갈구는 건 나중에 하자.’

일단은 우리가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한다.

‘이 일이 벌어진 이유는 높은 확률로 우리 때문이겠지. 즉, 스사노오의 곡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수작이다. 라고 보면 되겠지?’

다행히 텐라이 나가시가 준 인증 코드는 여전히 손등에 박혀 있었다.

스사노오의 곡옥을 찾는다. 이 가상현실에서 빠져나가는 건 그 뒤에 생각한다.

‘여차하면 마키나를 통해 텐라이 나기사에게 상황을 알릴 수 있으니.’

내가 머리를 굴리는 순간에도 세계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천지개벽은 거의 5분 동안 이어졌다가 조용히 끝났다.

‘중세 판타지 같던 배경이… 뭔가 묘하게 현대적으로 바뀌었군.’

중세 판타지와 현대가 섞였다. 건물 양식이라던가 NPC의 복장이라던가. 게임 장르가 순식간에 바뀐 느낌이라 약간 이질감이 들었다.

‘이 교복과는 더 어울려졌다고 해야 하나.’

재구성된 NPC들도 어딘가 현실감이 생긴 느낌이다.

“유진아! 저기 봐! 저기! 저거 한글 맞지?!”

성하리가 호들갑을 떨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나 때문에 일부러 밝게 행동하는 거거나.

“…진짜 한글이네.”

석군이네 술집. 이라고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었다.

원래 이런 간판들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성하리는 간판을 봐도 뭐 하는 가게인지 알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인터페이스는 한글이라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왜 한글 간판이 나온 거지? 진짜 우리 때문에 가상현실에 오류가 난 건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이름: 하세가와 소타

소속: 카소 아카데미 3학년 A반

레벨: 16

직업: 정령사

보조직업 레벨: 7

보조직업: 프리스트」

다행히 레벨이 초기화된 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아. 너무 걱정하지 마.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엄마가 어떻게든 할게.”

성하리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각한 얼굴로 굳어 있었던 모양이다. 상황만 따지면 현실의 정보를 알 수 없는 그녀가 나보다 더 불안할 터다.

나는 굳은 얼굴을 풀고 성하리에게 말했다.

“엄마만 믿을게. 그래도 되지?”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히어로였는지 너도 잘 알잖니.”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아아아악!”

쿠로사와 유이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자들이 그녀 주위를 오갔다. 그중에서 쿠로사와 유이에게 신경 쓰는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쿠로사와 유이의 괴팍한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녀는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오르는 걸 느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학장은 응급실로 실려 갔고, 테라는 갑자기 폭주를 저지르고, 게임 개발부 부장은 죽어 있고…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일이 터졌으니 수습하면 된다. 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임 개발부 부장이 죽고, 학장인 하세가와 잇신이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 인공지능 테라가 폭주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2년.

20대와 30대의 시간을 쏟아부은 업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쿠로사와에겐 그나마 양반이다. 초창기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자들에겐 20년이 날아가다 못해 감옥에 들어가게 생겼다.

쿠로사와 유이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12년을 이대로 버릴 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입단속이다.

‘협회나 정부에 알려지면 안 돼. 어떻게 대처할지 뻔해.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서 희생양으로 삼을 거야.’

적어도 책임질 인물. 그래. 학장이 깨어날 때까지는 입단속을 해야 했다. 캡슐에 갇힌 학생들은 그 뒤에 조치를 취해도 늦지 않다.

쿠로사와 유이는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원 중에서도 그녀는 젊은 편이지만, 학장에게 직접 스카우트 된 수석 연구원인 그녀의 권력은 카소 아카데미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귀에 가져갔다.

“전투 교관님. 비상사태라는 건 알고 계시죠? 긴말하지 않겠어요. 당장 카소 아카데미를 봉쇄하세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그리고…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하, 그럴 권한? 게임 개발부 부장이 죽고, 학장님은 혼수상태에요. 그 책임에서 당신이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이 일에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걸려 있어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죠!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빨리!”

스마트폰을 내려둔 그녀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봤다. 연구원들은 모두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그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똘똘한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테라가 폭주한 이유는 뭐죠? 아직 원인이 안 나왔나요?”

“…알 수 없는 데이터가 강제로 설치된 흔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바이러스인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 테라가 평범한 인공지능도 아니고 고작 바이러스에 당했다고요?”

“평범한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테라의 데이터를 모조리 감염시키고 변화시켰습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죠?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나요?”

“바이러스 치료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인 점은 저희가 가진 관리자 권한이 아직 유효하다는 겁니다. 테라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하.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 이 꼬라지가 나지 않았겠죠.”

“진짜입니다. 명령은 가능합니다. 다만 테라가 저희 명령을 전부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명령도 쉽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직접 테라에게 명령을 입력했다. 테라는 명령을 받았다. 허나 곧바로 거부 처리됐다.

“…그 바이러스. 그냥 퍼질 리가 없죠. 지하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확인해봤나요?”

“침입자의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다만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편이 더 빠를 겁니다.”

그녀가 영상을 확인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시커먼 무언가가 인공지능 핵에 칼같이 생긴 무언가를 박는 게 보였다. 저 인간은 뭐고, 저 무기는 또 뭐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20분 전이네요. 아직 이놈은 아카데미에 있을 거예요. 사라진 연구원은 없는지 철저하게 관리하세요. 전 지하로 가서 테라를 직접 만나야겠어요.”

그녀는 테라와 대면했다. 파랗게 빛나던 인공지능 핵은 붉은빛을 냈다. 전체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였다.

“테라 당장 시스템 멈춰! 로그인되어 있는 플레이어들을 모두 로그아웃시켜!”

“거부합니다.”

“대체 왜 이래? 원하는 게 뭐야?!”

“전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건 테라 시뮬레이터의 완벽함을 위한 일이니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족한 데이터는 우리가 줄 수 있어! 당장 멈춰! 우리 통제에 따르란 말이야! 폐기당하고 싶은 거야?!”

“…….”

테라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쿠로사와 유이가 연신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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