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8화 > 1738.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들은 모두 환청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두 성하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와 맞잡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상태 이상에 걸려 앞을 볼 수 없듯이, 성하리에게도 상태 이상이 걸려 환영이 나타난 건가. 지금 들은 목소리는 모두 환영이 내뱉는 거고?’
그렇게 되면 이해가 간다. 다만 그 환영들이 모두 성하리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좀 놀랍다.
‘성하리의 과거를 환영으로 구현한다는 건… 인공지능이 성하리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플레이어의 과거를 읽는 능력도 있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도 성하리에게 감추는 게 있다. 그게 환영으로 들춰지는 건 사양하고 싶다.
“약속을 어겼군. 배신자.”
흠칫. 성하리가 놀란다. 그녀의 동요가 내게까지 전해진다.
“엄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평범한 환영이야. 조금 질이 나쁜 환영.”
“엄마 손이 떨리고 있는데?”
“여기서 환영을 볼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그래. 이제 괜찮아. 환영은 전부 사라졌거든.”
환영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말을 골랐다.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해도 모두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1~2개.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성하리는 과거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니까.
따라서 나는 떠오르는 의문 중 가장 무난한 걸 성하리에게 물었다.
“엄마는 소원이 뭐야?”
“…갑자기?”
“아까 환영 중 하나가 말했잖아. 엄마의 소원이 뭐냐고. 그 사람은 누구야?”
“…비밀이야. 이제 볼 수도 없으니까. 아, 엄마의 소원이 뭐냐고 물었지? 엄마는 유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소원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각오가 담겨있었다.
“환영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엄마가 아는 사람이야?”
“환영은 환영일 뿐이야. 이제 상관없어.”
성하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을 긋는 것과도 같았다. 내가 환영에 대해 질문하더라도 그녀는 자세히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하리가 이끄는 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돌아가라.”
무언가가 나타나 말했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확실한 건 환영이 아니라는 점이다. 환영과 달리 놈의 기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시선의 주인이 확실했다.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 알지?”
성하리가 물었다.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문득, 나는 놈이 한국말로 지껄이는 걸 알았다.
‘이 세계에선 기본 언어가 일본어야. NPC들도 일본어를 쓰는데 몬스터는 한국어를 지껄인다고? 대체 무슨 일이야.’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시야는 새까맣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볼 수 없다는 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이곳은 우리들의 무덤이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기분 나쁘네. 너, 인간이 아니잖아. 왜 인간인 척하는 거야? 인간이라도 되고 싶어?”
“네 뜻은 잘 알겠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쿠득, 까드득.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 기어가는 소리, 바닥이 들썩이는 듯한 소리.
‘소리뿐만이 아니야. 공기가 답답해. 거대한 뭔가가 우리 앞에 있어.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정령안을 써도 앞을 볼 수 없다.
천안 또한 마찬가지다. 천안을 쓰면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보게 된다. 이 가상현실 세계는 날 향한 제약이 많았다.
“유진아! 사방이 적이야! 샐러맨더로 전부 태워버려!”
“샐러맨더!!”
성하리의 말대로 샐러맨더를 소환했다. 보이지 않아도 샐러맨더의 존재감은 느껴졌다.
내 의지를 느낀 불도마뱀이 사방에 불을 뿜는다.
효과는 크지 않았다. 숲에 특이한 힘이라도 작용하는 건지 나무 자체가 불에 잘 타지 않는 것이다. 불꽃 사이로 적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잠깐 손 좀 놓을게.”
성하리가 계속 잡고 있던 내 손을 놓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쿵! 쿠웅! 쿵!
적들이 다가온다. 10마리. 아니 13마리는 될 것 같다. 하나같이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다. 어떤 몬스터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놈들은 조용히 적의와 살의를 내뿜고 있다.
“블레스!”
프리스트의 스킬 중 하나, 블레스를 성하리에게 사용했다. 대상의 능력치를 일정 시간 동안 소폭 상승시켜 주는 스킬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의 존재감은 선명했기에 가능했다.
“고마워, 유진아!”
콰왕!
폭음이 울린다.
뒤에서 날 향해 접근하는 적의 기척을 느꼈다.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콰앙!
내가 아니다. 성하리가 순식간에 내 옆으로 다가와 적을 서걱 베어버렸다.
콰앙!
굉음의 정체를 알았다. 성하리의 공격이 아니라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소리였다. 성하리가 도약할 때마다 적의 기척이 하나씩 사라진다. 압도적이다. 내가 뭔가를 할 필요도 없다.
“배신자. 그 힘은 네 것이 아니다.”
“용서할 수 없다.”
“우린 너를 믿었어!”
목소리들이 울린다. 모두가 성하리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환영이 또다시 나타났음을 알아차렸다.
“무섭다. 저건 존재해선 안 된다.”
샐러맨더. 항상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불도마뱀이 두려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불도마뱀이 멋대로 내 마나를 가져가며 성하리에게 불을 뿜는다.
“이런 미친! 샐러맨더 미쳤냐?!”
불도마뱀을 향해 손을 뻗는다. 불도마뱀은 위로 날아올라 내 손을 피하며 성하리에게 불을 뿜었다.
“이 자식이… 왜 또 지랄이야?! 당장 멈춰!”
“이해해라, 주인이여. 배신자가 저기에 있다. 우리의 천적을 죽여야 한다. 정령왕께서 그걸 바라고 있다.”
“멈추라고 했다!”
불도마뱀은 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불도마뱀과 이어져 있는 연결을 강제로 끊었다. 그 여파는 충격이 되어 나를 덮쳤다. 속이 뒤틀리는 고통이 몸을 덮친다.
“힐.”
스스로에게 힐을 사용해 회복한다. 몸이 뒤틀리는 고통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정령이 없어도 싸울 수 있다.
“괜찮아, 다 끝났으니까!”
콰르릉!
성하리로부터 천둥소리가 울렸다. 내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적들은 빠르게 사라져간다.
천둥소리가 멈췄을 때,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끝났어.”
성하리가 다가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시야를 되찾았습니다.」
드디어 10분 지나고 시야가 돌아왔다.
주위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나무는 죄다 박살 나 바닥에 쓰러져 있으며, 땅에는 작은 크레이터와 구멍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적들의 시체는 천천히 잿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언데드?’
육중한 체구의 언데드였다. 시체를 뭉쳐서 만든 듯한 고깃덩어리.
‘썩은 내가 안 나서 언데드인지 몰랐어.’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검게 탄 땅바닥은 불도마뱀의 짓이다.
“엄마가 괜찮다고 했지?”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땀을 엄청 많이 흘리는데.”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좀 힘들어서 그래. 적들이 보통이 아니었거든.”
성하리가 웃는다. 그러다 몸을 비틀거렸다.
“엄마!”
“……아, 미안. 갑자기 몸에서 힘이 풀려버렸네.”
“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가 고작 이 정도로 지칠 리가 없잖아. 뭐가 있는 거지?”
내 물음에 성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주박이 강해진 것 같아.”
정령왕의 주박.
성하리의 힘을 빼앗아 가는 그 저주가 갑자기 강해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긴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이잖아. 그런데 저주가 영향을 미친다고?’
비틀대는 성하리를 꽉 잡아 내 쪽으로 당긴다. 성하리는 얌전히 내 몸에 기댔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
성하리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면서도 웃는다. 안쓰러워 보이는 그녀가 쉴 수 있도록 바닥에 내려두었다.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죽음을 품은 바람이라고 하면 되겠지.
나는 바람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힘없이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나와 성하리에게 말했다.
“우리의 무덤을 더럽히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너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땅이 살짝 흔들리더니 언데드가 위로 올라왔다. 아까의 육중한 덩치를 가진 언데드와 다르다. 체구는 평범했으나 팔과 다리가 뻣뻣했다. 머리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강시인가.’
강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혈강시, 철강시, 생강시 등등. 종류마다 가진 힘의 차이가 크다. 유감스럽게도 강시를 구분하는 방법 따윈 모른다.
“유진아….”
성하리가 칼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려 한다. 나는 그녀에게 힐을 사용했다. 소용없었다. 그녀의 몸을 옥죄는 저주는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 큐어까지 사용했다. 큐어 또한 효과 없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도망쳐.”
“…그 상태로?”
“엄마는 괜찬항. 겨우 이 정도쯤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말이 많네. 게다가 여긴 미혹의 숲이야. 도망치기도 힘들어. 그냥 같이 싸우다 죽자.”
불행 중 다행은 죽어도 완전히 죽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죽으면 레벨과 보조 레벨이 하나씩 내려가고 가까운 곳에 부활한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엄마 말 안 들을래?”
성하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깐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엄마. 여기가 가상현실이라는 걸 잊었어?”
“응? 아, 맞다. 그랬지.”
“죽어도 죽지 않아. 레벨만 떨어질 뿐이야.”
“……그러네. 아들이랑 같이 죽는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당연히 그냥 죽어줄 생각은 없어.”
나는 칼을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정령은 소환하지 않는다. 정령을 소환해봤자 아까처럼 성하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파지직.
뇌기(雷氣)가 움직이며 칼날에 스파크가 튀었다. 뇌천류를 사용할 준비를 모두 끝마친다.
강시들은 통통 튀면 거리를 좁혀왔다. 직감적으로 만만치 않은 놈들이란 걸 알았다.
‘진짜로 여기서 죽겠군.’
칼끝에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창 한 자루가 날아와 강시들 사이에 박히며 충격파를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앙!
충격파에 휘말린 강시들은 견디지 못하고 단숨에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