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9화 > 1739. 아카데미의 구원자
성하리는 생각했다.
정말 자신이 던전 속에 들어온 게 맞는가?
던전이라고 하기엔 여긴 지나치게 방대하고 넓었다. 무엇보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일본어로 말했다. 보통 이러면 여기가 던전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의 태도와 반응은 어딘가 이상했다. 꼭 인형같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꺼림직함을 느낀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자신의 일을 하기로 했다. 몬스터 사냥. 어딘가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찾아 죽이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죽이고 또 죽이고.
성하리는 몬스터가 보이는 족족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름: 성하리
소속: -
레벨: 24
직업: 방랑자」
힐끗. 성하리는 자신의 앞에 뜬 알림창과 정보창을 봤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레벨이라는 숫자가 높아질수록 스킬이 생겼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꽤 쓸만하다.
예를 들면 이런 스킬이었다.
「방랑자의 발걸음
레벨: 3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은신
레벨: 3
기척을 숨길 수 있습니다.」
「방랑자의 경험
레벨: 6
환경의 영향을 받을 확률이 줄어듭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방랑자의 경험이었다. 미혹의 숲이란 곳을 돌아다닐 때마다 이상한 알림창이 떴는데, 방랑자의 경험을 얻고 나서부터 귀찮은 알림창이 뜨는 빈도가 확연하게 낮아졌다.
그녀는 천천히 미혹의 숲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의욕이 떨어진 상태였다. 던전이 너무 넓어서 도저히 보스 몬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보스 몬스터는 안 보이고, 던전 밖으로 나갈 방법도 없다. 성하리는 침울한 상태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오빠?’
성유진.
지난 시간 동안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으나, 못 찾았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왜인지 교복을 입고 있긴 했으나 성유진이 확실했다.
침울했던 성하리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활기로 가득 찬다. 만개한 꽃처럼 밝아진 그녀가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성유진의 옆에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옆에 있었다.
‘…나?’
교복을 입은 자신이 성유진의 옆에 있었다.
성하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환영이….’
환영이 아니다.
환영이 나타날 때는 알림창이 떠서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나타난 환영들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환영은 자신에게 말을 걸며 혼란을 주려고 했지만… 저들은 지금 자신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은 진짜다.
아니, 진짜가 맞는 건가? 여긴 던전 내부다. 저들 또한 던전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 있었다.
“…….”
문득, 성유진이 마키나와 함께 사라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은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했던가. 그럼 혹시 여기가 성유진의 세계인가?
‘또 다른 내가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야. 아카데미에서 평… 어쩌고 세계가 있다고 들어본 것도 같은데.’
아무튼 바로 아는 척하는 건 관두고 지켜보기로 한다. 또 다른 자신이 성유진의 옆에 붙어 있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고 있는 자신과 성유진.
낯설었다. 동시에 또 다른 자신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성유진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다면….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 즐거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성유진과 헤어지기 직전, 그녀는 복수를 택했다. 정령왕과 맺은 계약을 이행했다. 그 보상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 대가로 그녀는 수배되어 쫓기는 범죄자가 됐다. 히어로가 아닌 빌런이 된 것이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니, 이건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후회해도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
성하리는 잡념을 털어버리고 마나를 사용해 시력과 청력을 강화했다. 성유진과 또 다른 자신이 즐겁게 나누는 대화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엄마?’
성유진이 또 다른 자신을 분명 그렇게 불렀다. 다시 귀를 기울이니 또 그렇게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자신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소꿉놀이? 저 나이 먹고 소꿉놀이 같은 걸 할 리는 업겠지? 그리고 소꿉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또 다른 자신과 성유진은 정말 모자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성하리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또 다른 자신을 쳐다봤다. 다시 봐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옛날에 헤어진 쌍둥이라고 말하면 단번에 믿을 정도로.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자 이질적이라고 해야 할까. 차이점이 느껴진다.
집중하자, 안 보이던 것들이 뒤늦게 보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교복이 좀 작잖아?!’
치마는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다. 세일러복 같은 상의도 작았다. 새하얀 복부가 살짝살짝 보인다. 눈에 힘이 더 들어갔다. 복부가 보인다. 탄탄한 복부다. 하지만 자신의 복부와 비교하면 물렁물렁해 보인다.
가슴을 비롯해 엉덩이까지 자기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살집이 있잖아. 살찐 거야?’
그 탓일까. 또 다른 자신은 뭔가 분위기가 자신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뭔가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오빠의 엄마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젊잖아.’
만약, 진짜 저들이 모자지간이라면…. 자신이 나이가 들었을 때 또 다른 자신처럼 안 늙지 않을까? 그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어, 어어?”
성하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성유진이 별안간 또 다른 자신에게 손을 뻗더니, 치마 아래로 쏙 넣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주무른다. 또 다른 자신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성유진을 말로 타박한다. 그 반응이 전부였다.
‘모, 모자지간이라며?!’
모자지간이 아니긴 하지만, 서로를 모자지간이라 생각하면서 왜 애인처럼 찐득한 스킨십을 하는 거지?
어쩌면 모자지간은 일종의 컨셉 플레이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나는 오빠랑 연인 사이야? 그게 맞는 거 같긴 한데…. 헉. 어쩌면 여긴 미래일지도. 나와 오빠 사이를 보니 확실해. 저번에 오빠도 내 몸을 마음대로 만져댔고….’
성하리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부분 좋은 쪽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다른 자신을 향한 질투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들은 계속해서 숲을 나아갔다.
성유진이 눈을 감았다. 숲에게 시력을 빼앗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환영이 나타났다. 또 다른 자신과 관련된 환영일 것이다.
‘저 남자는 누구고…. 쟤 박한미. 그 재수 없는 년이잖아. 지영이도 나왔네. 이렇게 보니 괜히 반갑네.’
그리고 이어 나타난 건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람으로 보이면서도, 정령으로도 보이고, 그것과는 별개의 신비한 존재로도 보였다. 적어도 지금의 성하리가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적이 나타났다.
남자는 언데드를 부려 성유진과 또 다른 자신을 공격했다.
‘별거 없네. 저 정도면 해치우는 데 10초도 안 걸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또 다른 자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힘, 속도.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 몸의 움직임은 꽤 괜찮았다. 칼 솜씨를 제외하고는.
‘저게 뭔 검술이야. 그냥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거잖아.’
또 다른 자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빠르게 지쳐갔다. 성유진이 소환한 정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또 다른 자신을 노렸다.
‘아슬아슬해 보이네.’
도와줄 수 있다. 지금 개입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성유진은 그 뒤에 자신이 구하면 되니까.
‘…왜 이러지? 똑같은 나를 봐서 그런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존재한다. 그것 자체만으로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전투의 승자는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또 다른 자신은 지쳐서 쓰러졌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반대로 성유진은 시력을 되찾고 일어섰다.
성유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있는 표정이다. 그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절대로 또 다른 자신을 버리지 않겠지.
‘…오빠와 또 다른 나는 정말 모자지간이야?’
절박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성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창을 손에 쥐었다.
또 다른 자신이 죽는 건 괜찮다. 하지만 성유진이 죽는 꼴을 보고 있을 순 없다. 설령 자신이 알고 있는 성유진이 아니더라도.
성하리가 투창했다.
음속보다 빠르게 날아간 창이 떨어지고, 그 충격파에 적들이 휩쓸렸다. 성하리는 땅을 박찼다.
***
나는 창이 떨어지며 발생한 충격파에 강시들이 쓸려나가는 걸 똑똑히 봤다. 더 경악스러운 나와 성하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절되어 있다는 거다.
‘뭐 이런 괴물 같은 투창 실력이….’
그러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강시를 소환한 남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멀쩡했다. 남자가 양손을 합장하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린다. 뒤엎어진 땅이 들썩거리고 강시가 6마리가 땅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하늘에서 성하리가 떨어졌다. 그 충격파에 막 올라오던 강시들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먹은 닿지 않았다. 당연했다. 남자와 그녀의 사이에는 5m가 넘는 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주먹에서 뻗어 나온 충격파만으로 남자의 몸은 터져나갔다.
기술이고 뭐고 없었다.
단순한 힘.
압도적인 파워.
나는 멍한 얼굴로 눈앞에 나타난 성하리를 바라봤다. 내 옆에 있는 성하리와 달랐다. 외모는 똑같은 입고 있는 옷과 분위기가 다르다.
“어, 엄마가 둘…?”
“난 오빠의 엄마가 아니야.”
코트를 입은 그녀는 창에 박힌 창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짐작했다.
던전 세계의 성하리가 분명했다.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근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지금 내 옆에 성하리가 있지 않았나?
“오빠. 근데 저 여자는 뭔데 엄마라고 부르는 거야?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혹시 인형이야? 너무 외로워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해해줄게. 이상한 플레이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고 하니… 그 정도는 감수해줄 수 있어.”
“…유진아. 이 버릇 없는 여자는 누구니? 내 모습만 빌린 도픙갱어야?”
성하리와 성하리가 노려본다. 그들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