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0화 > 1740. 아카데미의 구원자
성하리와 성하리는 서로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동족 혐오인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보면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다는 말을 창작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여긴 가상현실인데… 던전 성하리가 있는 게 말이 되나? 환영인가? 그게 아니면 AI새끼가 내 기억을 멋대로 훔쳐보고 NPC로 만들어냈다거나….’
하지만 NPC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내가 알고 있는 NPC의 조잡함이 그녀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오빠?”
“아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성하리들이 재촉한다.
찰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이럴 때 천천히 머리를 굴릴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여기서 임기응변으로 하는 거짓말을 금방 들통날 것이다. 당사자인 둘은 결국 대화를 하게 될 테고,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도 눈치채게 될 테니까.
‘에이, 씨발. 뭐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던전 속 성하리와 떡을 쳤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그냥 이실직고 하자.
“내가 다 말해줄게. 그러니 너랑 엄마는 일단 앉아서 들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성하리들은 서로를 보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내 앞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는 모습이 서로 닮았다.
‘진짜 성하리가 두 명인 것 같네. 뭐, 분위기라던가 조금 다른 것 같긴 해. 가슴도 엄마 성하리가 좀 더 큰가?’
이유는 짐작 간다. 엄마 성하리는 임신을 경험했으니까. 원래 여자는 임신하면 가슴과 엉덩이가 커진다.
“크흠. 그러니까….”
나는 엄마 성하리에 대한 정보부터 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강한 건 던전 성하리였다.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던전에 대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던전 속의 인간이라고?”
내 설명을 모두 듣고 던전 속 성하리가 말했다. 계속 던전 속 성하리라 부르기도 뭐하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영하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릴 영(young)자를 써서 영하리다. 물론 영하리에겐 말하지 않았다. 영하리가 들으면 자기만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영하리는 내 말을 듣고 충격받았다. …라는 반응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난 던전 속 인간이 아니야. 내 인생이 있어. 내 세계가 던전이란 건 말이 안 돼.”
“네 기억이 진짜라는 법은 없잖아.”
성하리가 영하리를 쏘아붙였다. 영하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줌마는 좀 닥치지?”
“아, 아줌마? 내가 아줌마이긴 해도 너한테 아줌마란 소릴 들을 이유는 없어!”
성하리가 화를 냈다. 평소에 아줌마란 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설마 아가씨 소리를 듣고 싶은 거야? 장성한 애도 있는 아줌마가? 그건 너무 주책이잖아.”
“크윽…. 그냥 하리 씨라고 불러. 내가 그래도 너보다 오래 살았어.”
“싫어. 아줌마.”
“이게 진짜!”
“해보자는 거야?!”
성하리와 영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더 강한 건 영하리다. 하지만 성하리는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물러서는 여자가 아니었다. 뒷골이 땡겨 온다. 저러다 진짜 싸운다면?
‘성하리의 성질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성하리와 영하리의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어 보지를 잡았다.
“히익?!”
“히익?!”
어깨를 좁히고 새된 비명을 지른다. 누가 같은 인물 아니라고 할까 봐. 반응이 똑같았다.
아무리 성하리라도 보지 잡히면 꼼짝 못 하지.
“내 말 안 끝났어. 내 말부터 전부 들어.”
나는 지금 상황에 대해 말해줬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테라시뮬레이터라는 가상현실 세계고, 지금 AI에 오류가 발생해서 가상현 실세계에 갇힌 상태고 종말인가 뭔가로 인해 시한부 인생이 됐다는 걸 알렸다.
“…여기가 가상현실이라고? 말도 안 돼. 난 던전에 들어오니 여기였어!”
“우리가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어. 너한테도 레벨이랑 직업이 있지 않아?”
“아.”
영하리는 작게 탄식했다. 그녀도 알림창을 볼 수 있는 게 확실했다.
알려줄 수 있는 건 전부 알려줬다.
영하리와 성하리 둘 다 고민에 빠졌다. 아마도 서로 다른 종류의 고민일 것이다. 나는 잠자코 그녀들이 고민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성하리였다. 내가 아니라 영하리에게 말했다.
“어쩔 거야?”
“…뭘?”
“넌 우리와 달라. 네 말대로라면 너의 그 몸은 진짜라는 거겠지. 종말 카운트 다운이 다 되면 너도 우리처럼 죽을 거야.”
“그 전에 이 세계를 죽이면 돼.”
“하. 아무리 너라도 세계는 죽이지 못해.”
“……그럼 어쩌자는 건데? 이대로 나보고 죽으라고?”
“우리에게 협력해. 어차피 돌아갈 방법이 없잖아. 종말을 막게 도와줘.”
“너희들 목적은 가상현실의 종말을 막는 게 아니잖아. 스사노오의 곡옥을 찾는 거라며?”
“우리가 가상현실에 접속하고 몇 시간 뒤에 바로 이변이 일어났어. 관련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오빠랑 아줌마를 죽이려고 누군가가 가상현실에 수작을 부렸다?”
“그게 합당하지. 생각해 봐. 현실에서 날 대놓고 죽이려는 놈들이 몇 되겠어?”
성하리가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한다. 영하리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늙었어도 나니까. 대놓고 싸우려는 놈들은 없겠지.”
“…너, 진짜 예의가 없구나? 자꾸 늙었다고 할래?”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 늙은 거 맞잖아.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그 나이 먹고 교복 입고 다니면 안 부끄러워? 상의랑 치마도 엄청 짧네. 노출증 환자 아니야?”
“이, 이건 잠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은 거야. 남은 옷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아. 그러시겠지. 난 아줌마처럼 주책맞게 안 늙을 거야.”
“…이년이 진짜! 네가 지적할 입장이야? 그 옷 센스는 뭔데? 배꼽이 다 보이잖아! 노출증 환자는 내가 아니라 너겠지! 코트는 또 어디서 촌티 나는 걸 입고 와서는!”
“촌티? 늙어서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또 몸을 가볍게 해주는 효과까지 있거든?!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 지적하지 마! 그 시간에 아줌마 눈가에 있는 주름이나 관리하지 그래?!”
“뭐, 뭐, 주름…?!”
성하리가 놀라며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눈주름은 없었다. 20대인 영하리와 똑같은 얼굴인데 주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성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영하리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진짜 죽일 듯이. 영하리는 그래서 어쩔건데 라는 눈으로 성하리를 담담하게 마주 봤다.
둘이 싸우는 모습이 묘하게 재밌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말로 사생결단을 내면 내가 곤란해진다.
“그쯤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해야지.”
“유진아. 서로 갈 길 가는 게 맞지 않겠니?”
“오빠. 나 강한 거 알지? 저런 늙은 년은 대충 여기에 버리고 나랑 같이 가자.”
둘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
“하리가 도와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움찔. 성하리가 놀란 듯 두 눈을 뜨고, 영하리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그려진다. 솔직히 말해서 영하리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굉장히 궁금했다. 그 의문을 풀려면 영하리가 곁에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진아. 이 녀석이 다른 세계의 나라는 보장도 없잖니? 도플갱어 몬스터라고 아니? 아주 위험한 몬스터인데….”
“아줌마. 그만 좀 해. 도플갱어가 내 모습을 했다고 나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도플갱어는 아줌마 아니야? 지금 아줌마는 나라고 해도 너무 약하잖아.”
성하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퍼뜩 무언가를 떠올린 듯 영하리에게 물었다.
“너,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네 미래가 나라는 거 몰라? 너라고 계속 강할 줄 알아?”
“난 아줌마와 달라. 정령왕의 주박. 그건 나한테 없거든.”
“…그 사람들을 전부 죽였다고?”
“복수였으니까. 그런 계약이기도 했고. 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었어.”
“…그들 중엔 죄 없는 사람도 있었어.”
“모두 관련되어 있는데 죄 없는 사람이 어딨어?”
“확실히 알겠어. 넌 나랑 달라. …왜 다른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탑에 들어간 건 아니지?”
“탑? 태양의 탑을 말하는 거야?”
“하, 됐어. 아직 거기까지 가진 않은 모양이네. 정령왕의 계약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넌 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야. 내 말이 맞지?”
“중국 쪽에서 날 빌런으로 지적하긴 했어.”
영하리는 앗하며 나를 돌아봤다.
“오빠. 괜한 오해하지 마. 빌런이라 불릴 뿐이지 빌런 짓을 하고 다니진 않으니까. 던전 처리 의뢰받으면서 돈 벌고 있어. 미국이나 러시아 쪽의 의뢰도 받는다니까.”
“하리야. 난 널 믿어.”
“…오빠 믿어줘서 고마워.”
영하리가 애정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 시선이 묘하게 끈적하다. 나는 그녀를 자세히 보다가 알았다. 머리카락이 전에 봤을 때보다 더 길어졌다. 관리는 제대로 한 것 같으니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최소 1년은 지났나.’
보지도 묵혀진 상태일 것이다.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분위기가 이상한데.”
성하리가 나와 영하리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바라봤다.
“엄마. 할 말 있으면 해.”
“했어?”
“뭘?”
“저년이랑 한 거 아니지?”
“…….”
내가 입을 다물자 성하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했구나…! 젊은 나를 봤으니 당연히 참지 못하겠지. 그래도 결혼은 절대 안 돼. 너희는 모자 사이라고!”
“아줌마가 할 말은 아니잖아. 딱 보니 보통 관계가 아닌 걸 알겠던데. 그리고 나와 오빠는 연인사이야.”
“이 멍청한 년아! 유진이는 내 아들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난 임신한 적 없어.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오빠랑 나랑은 남남이야!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 아예 시어머님이라 불러줄까? 시어머님!”
“이 미친년이!!”
“미친년은 너지! 어떻게 자기 아들이랑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익! 그래도 너랑 유진이가 결혼하는 건 절대 안 돼!”
“할 건데?!”
영하리가 돌발 행동을 했다. 내 머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입술을 마주한 것이다. 엄청 빨라서 반응할 수 없었다. 내 입은 자동문처럼 벌어지고 영하리의 미끈한 혀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이, 이게 진짜 미친 거야?! 당장 떨어져!”
성하리가 깜짝 놀라 영하리의 팔과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영하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진아! 성유진! 아들! 뭐 해! 떨어져! 떨어지라고!!”
조금만 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