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네.”
영하리가 토스트를 먹으며 말했다.
가상현실 테라 시뮬레이터는 의외로 조잡하면서도 의외로 완성도가 높았다.
‘포만도 시스템이 있어.’
현실처럼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왔다. 계속 굶으면 생명력이 낮아져서 죽을 수 있기에 제때제때 음식을 먹어야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가상현실에 구현된 미각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맛이 뭔가 간접적으로 느껴지는군.’
혀에 얇은 콘돔을 씌우고 요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성하리나 영하리는 맛있게 토스트를 먹는 걸 보니 나만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우적우적.
나는 토스트를 씹어 삼켰다. 맛이 없어도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다.
‘다 좋은데 식사 시간은 고역이군.’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낸 우리는 다시 미혹의 숲으로 들어갔다.
미혹의 숲은 간단한 곳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둘째치고 환경 자체가 적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어제는 꽤 고생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10m 밖을 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100m 밖도 볼 수 있었다. 길을 잃을 걱정이 없어진 것이다.
「아린나의 꽃이 힘을 발휘합니다.」
「미혹의 숲의 미혹이 흩어집니다.」
미혹의 숲에서 받는 상태 이상도 없다.
‘아주 좋아.’
어제 이곳에 왔을 때와 달리 상쾌한 기분이었다.
“여긴…”
성하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녀는 나무 위로 올라가 숲 전체를 둘러봤다. 그리고 내려와선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고는 내게 말했다.
“유진아. 저쪽으로 가보자.”
성하리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뭐라도 봤어?”
“아직 정확하지는 않아.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아니기를 바라고 있는데….”
성하리가 말끝을 흐리며 영하리를 흘겨봤다. 영하리는 그게 기분 나쁜지 미간을 좁혔다.
우리는 성하리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성하리는 무엇을 우려하는지 몰라도 매우 진지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숲속에 이렇게 큰 바위가 있다? 다소 어울리지 않긴 했다.
“야. 저 바위 좀 치워봐.”
성하리가 영하리를 불렀다.
“기분 나쁘게…. 아줌마가 하라고 하면 네! 하고 할 줄 알았어?”
“네가 여기서 가장 힘이 세니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잔소리 말고 빨리 해. 설마 어렵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아줌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지금 내게 그 정도의 힘은 없어.”
영하리를 대놓고 혀를 찼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성하리를 한 번 쏘아보고는 거대한 바위에 양손을 올렸다.
바위가 밀려 나간다. 그 아래에 있는 건 동굴이었다. 바위를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뭔가 이상한 문양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원래는 힘으로 바위를 밀어내는 게 아닌 것 같다.
“와. 엄마. 여기에 동굴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
성하리는 동굴 안쪽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엄마?”
“아. 미안. 잠깐 생각에 잠겼었네.”
성하리의 얼굴에 근심이 생겼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가상현실은 성하리를 중심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중요한 무언가를 그녀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대체 뭐야?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 숲, 알고 있는 숲이야. 옛날에 와본 적 있어. 어제는 멀리 볼 수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
“여기가 어딘데?”
“중국 남부에 있는 산 중에 하나야. 산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확실해.”
“여긴 산이 아니라 숲인데?”
“그래서 처음엔 나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산을 숲으로 펼쳐서 만들어 놓은 느낌이야. 그 증거가 바로 이거고.”
성하리가 동굴을 가리켰다. 그녀는 알고 있었기에 이 숨겨져 있는 동굴을 찾은 것이다.
“옛날에. 음. 그러니까 유진이 네가 태어나기 전에 중국 쪽과 같이 일한 적 있어.”
“혹시 귀락곡(鬼落谷)과 관련된 일이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네. 근데 유진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제 강시 술사가 나왔잖아. 그럼 십중팔구 귀락곡과 관련된 거지.”
중국의 최대 빌런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귀락곡이면 성하리가 나서는 것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놈들은 뒤에서 정령으로 시험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령문이야. 지금은 귀락곡에 흡수되어 사라진 곳인데… 내가 활동할 때는 아니었거든. 그때의 내 일은 사령문을 소탕하는 거였어. 놈들의 소굴 중 하나가 여기고.”
영하리가 끼어들었다.
“잠깐. 사령문이면 왕쯔신이 있던 세력이잖아. 그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 냈는데? 그때 이런 곳은 없었어.”
“나도 직접 왕쯔신을 죽였어. 하지만 구태여 사령문까지 건들진 않았어. 그럴 명분도 없었거든. 하지만 넌….”
“아. 맞아. 아줌마는 정령왕을 배신했다며? 이해할 수가 없네. 왜 복수를 포기한 거야?”
“너무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있었으니까. 그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관련된 사람도 있어.”
“웃기시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이 주제는 민감했다. 서로의 신념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히어로로서 남은 성하리와 내가 개입함으로써 빌런이 된 영하리. 그녀들을 가르는 그 사건은 피해야 할 주제였다.
“진정해. 우리끼리 싸우려고 온 건 아니잖아. 엄마, 그래서 이 동굴 아래에 뭐가 있는 거야?”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사령문의 간부가 있을 거야. 자기 몸에 온갖 약품과 사령술을 걸어서 생강시가 된 미친놈이야.”
“여기가 보스룸이라는 거네. 생강시의 약점 같은 건 없어?”
“죽음의 기운인가 뭔가 때문에 상대하기 힘들었어. 밖으로 끄집어내는 게 최선인데…. 생강시는 무슨 짓을 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거든. 그나마 등 쪽이 약했어. 약품이 덜 스며들었다고 해야 하나?”
전성기 시절의 성하리가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 생강시는 상정외의 괴물급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영하리가 있었다.
“내려가자.”
동굴 안으로 내려간다. 시체 냄새가 난다.
‘이런 건 잘 구현해놨군.’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중심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에 생강시가 들어가 있었다. 생강시는 연못 속에서 우리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강시는 성하리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성, 하, 리.”
거친 목소리는 띄엄띄엄 성하리의 이름을 반복했다.
두 명의 성하리는 동시에 얼굴을 구겼다.
“뭔데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야?”
“죽은 놈이 내 이름을 멋대로 부르다니… 기분 나쁘네.”
“우, 리, 의, 방, 해, 자. 죽, 인, 다!”
생강시가 뛰었다. 그와 동시에 영하리가 먼저 생강시에게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생강시의 말도 안 되게 단단한 피부는 창날에 베이지 않았다. 대신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오빠! 그거 좀 써줘!”
“홀리 파워! 홀리 블레싱!”
영하리와 성하리. 두 명 모두에게 버프 스킬을 사용했다. 그녀들이 생강시를 몰아붙인다. 영하리는 힘으로, 성하리는 기술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연계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런데 쌍하리의 연계를 5분 넘게 버텨?’
생강시.
생각보다 더 강했다. 주위에 있는 죽음의 기운이 생강시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생강시의 약점인 등을 노렸으나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가상현실이라 추가로 버프라도 먹었나.’
믿었던 영하리는 이 공강 내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죽음의 기운 때문이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성하리가 날아왔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며 충격을 털어냈다.
“힐!”
성하리의 생명력을 회복시킨다. 거친 숨을 내쉬던 성하리가 씩 웃었다.
“고마워.”
그러면서 다시 생강시를 향해 달려든다. 어째 강적을 상대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 영하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지친다. 반대로 생강시는 지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기가 떨어진다.
‘생강시는 두뇌가 있어. 어설픈 유인책은 먹히지 않아.’
성하리들의 전투에 섣불리 끼어들 수 없었다. 수준이 너무 높았다. 내가 끼어들면 그녀들의 발목만 잡게 된다. 뒤에서 버프 기술로 그녀들을 지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찰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끼어들어서 한 방 먹일 텐데.’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찰나를 쓸 수 없고, 완전 회복도 쓸 수 없다. 하지만 해킹은 사용할 수 있다.
‘해킹을 사용해 몬스터를 없애는 건 오류로 취급하며 바로 복구했어.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실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나는 조용히 기회를 엿봤다.
“사(死), 생(生), 관(關), 두(頭)!”
생강시가 소리친다. 그의 힘이 터지며 성하리들이 뒤로 날아갔다. 죽음의 기운이 요동친다. 그 여파로 떨어져 있는 나까지 데미지를 입었다.
생강시가 정면에서 뛰어온다. 가장 약한 나부터 죽이기로 한 모양이다.
‘딱 좋은 타이밍이다.’
[해킹에 성공했습니다.]
[테라 시뮬레이터를 1.1초간 해킹합니다.]
칼을 뽑아 생강시에게 휘두른다.
해킹으로 바꾼 것은 칼의 공격력이었다. 칼의 공격력을 바꿀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로 바꾼 것이다.
「사냥꾼의 칼
사냥꾼이 사용하던 칼이다.
공격력+99999
공격속도+5%
상태이상 출혈 발생률+3%」
칼끝이 생강시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가상현실.
게임의 세계.
현실과 달리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했고, 그 법칙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생강시는 칼끝이 몸에 닿았다는 이유로 사망했다.
해킹의 지속시간이 끝나자마자 알림창이 떠오른다.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오류를 복구합니다.」
「사냥꾼의 칼
사냥꾼이 사용하던 칼이다.
공격력+30
공격속도+5%
상태이상 출혈 발생률+3%」
사냥꾼의 칼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행히 죽은 생강시는 재생되지 않았다.
‘이번 해킹이 1.1초였어. 저번에 썼을 때는 1.3초가 아니었나?’
이게 무슨 뜻일까.
‘…테라 시뮬레이터가 성장했나? 아니지. 이 경우엔 업그레이드 됐다고 하는 게 맞겠군.’
어쨌든 해킹을 이용할 방법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 문제는 해킹의 쿨타임이었다. 쿨타임은 현실 시간에 따르니, 가상현실 시간으로 90시간마다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 생강시에게서 드랍된 아이템부터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