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44화 (1,524/2,000)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다.

‘따로 다른 제재는 없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AI는 자기가 해킹당한 걸 몰라.’

그걸 인식했다면 이렇게 대충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최면에 당했는데, 당한 사실을 모르는 거지.’

황당하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는 성하리들의 시선은 무시하고 아이템을 보았다. 표면에 한자가 적혀 있는 목패였다.

「사중구생(死中求生)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

명확하지 않았다.

어떻게 쓰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성하리들에게 물었다.

“엄마. 하리야. 이거 가질 사람?”

“유진아. 네가 가져.”

“맞아. 생강시에게 나온 거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귀한 거겠지. 오빠가 가져.”

둘은 목패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뭐, 흥미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찌이이익.

종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진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우리들은 전투 자세를 취하며 긴장했다.

갈라진 공간에서 나온 건 안면이 있는 여성이었다.

아린나.

우리에게 퀘스트를 주었던 NPC다.

“미혹의 숲을 구해주셨네요. 고마워요. 역시 모험가님들이세요.”

그녀가 흘리는 분위기는 굉장히 이질적이다. 평범해 보이는데,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여자가 평범할 리가 없다. 그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넌 정체가 뭐지?”

“이 숲의 주인이죠. 마을 사람들은 저를 미혹의 주인이라 불러요. 정작 제가 누군지는 모르면서요.”

아린나가 낮게 웃으며 손짓했다.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츠즛.

손등이 찌릿하다. 힐끗 보니 손등에 새겨진 마름모 문양이 반응하고 있었다. 성하리의 것도 마찬가지다.

‘NPC가 몬스터로 변한 건 아닌 것 같고…. 이게 정해진 이벤트인가?’

보통 상대는 아니었다. 싸워서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미혹의 숲을 구하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저요? 위대한 부름을 받은 여자라고 할까요.”

“위대한 부름? 누구한테?”

“저도 몰라요. 단지 제가 할 일을 알 뿐이죠.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겐 감사하고 있어요. 생강시를 처리해준 덕분에 힘을 되찾았으니까요.”

“우리와 싸울 건가?”

“아뇨. 싸우기 위해 온 건 아니에요.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해왔죠. 그리고 이 세상을 잠식하는 위험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 위험을 제거해주기를 원해요. 물론 공짜로 해달라고는 안 해요. 모험가님들은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움직이잖아요.”

아린나가 허공에 손짓한다.

찌이이익.

공간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하얀 곡옥이 나타났다.

내 손등의 문양, 텐라이 나기사가 준 인증 코드가 빛나면서 아린나를 가리키고 있다. 저건 스사노오의 곡옥이었다.

성하리가 아린나에게 달려들었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성하리는 스사노오의 곡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나는 직감했다. 저건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못 뚫는다.

‘게임으로 치자면 파괴할 수 없는 오브젝트. 플레이어가 손을 댈 수 없는 영역.’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로 따진다면 시스템의 직접적인 개입이라 할 수 있었다.

아린나는 성하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아린나가 단순한 NPC가 아니란 걸 인정했다. 스사노오의 곡옥을 꺼낸 걸 보면 그 정체는….

“너는 테라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정확하게는 서브 인공지능, 음. 테라의 분신이라고 할까요.”

“스사노오의 곡옥을 대놓고 우리에게 보여줬다는 건…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군.”

“네. 현재 테라 시뮬레이터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잠식되어가고 있어요.”

“종말 말이야? 일부러 설정한 건 아니고?”

“제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걸 왜 일부러 설정할까요. 종말을. 바이러스를 처리해주세요. 그 보상으로 당신들에게 스사노오의 곡옥을 드리죠.”

「구원

종말을 타파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라.

보상: 스사노오의 곡옥」

“…왜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제안하는 거지?”

인공지능 테라라면 굳이 번거롭게 이런 식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었다.

알림창을 띄워 대화하듯 설명하면 그만이다.

“본체는 바이러스에 잠식당한 상태라서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에요.”

“스사노오의 곡옥은? 그 중요한 물건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본체는 오직 스사노오의 곡옥을 관리하기 위해서 저라는 서브 인공지능을 만든 거예요. 그만큼 본체가 스사노오의 곡옥을 중요히 여긴다는 뜻이죠. 이상할 게 어디에 있나요.”

아린나를 믿을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나서 거래를 제안하는 상대를 어떻게 믿겠나.

‘의심스러워도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스사노오의 곡옥을 빼앗을 수 없다. 성하리가 기습적으로 시도해도 먹히지 않았다. 영하리가 아린나를 노려보며 간을 보고 있으나, 성공 확률은 낮을 것이다. 나는 영하리가 괜히 나서지 않도록 어깨를 잡았다.

“좋아. 받아들일게. 처리해야 할 바이러스는 어디에 있지?”

“그건 저도 몰라요. 아직 완전히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단서는 있어요.”

「죽은 마을의 비밀.

미혹의 숲 끝에 죽은 마을이 있다. 그곳의 비밀을 파헤쳐라.

보상: 경험치, 냉기의 신발, 종말 퀘스트.」

퀘스트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성하리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는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연계 퀘스트.

그것도 대서사시 급의 연계 퀘스트의 냄새가 난다.

‘뺑뺑이를 오지게 치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퀘스트를 받는다. 일이 끝나고 스사노오의 곡옥을 받는 건 확실하지?”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물론이죠. 스사노오의 곡옥이 없어도 테라시뮬레이터에 아무 문제 없어요.”

그 말이 정말일까? 그렇다면 왜 서브 인공지능까지 만들어서 관리한 거지? 스사노오의 곡옥이 필요 없다면 가상현실 깊숙한 곳에 숨겨두기만 하면 되지 않나?

나는 차오르는 의문을 내뱉지 않았다.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지금은 아린나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척하는 게 이득이다. 싸운다고 해도 빼앗을 수도 없다.

‘해킹이 쿨타임만 아니었어도….’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볼일이 끝난 아린나는 웃으며 찢어진 공간 속으로 걸어갔다.

동굴 내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 • •

“끄으으응.”

하세가와 잇신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아프다. 낡은 몸이 비명을 지리는 것 같다. 특히 두통이 심했다.

침대에 앉은 하세가와 잇신은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여긴 병실이고… 날짜는…. 이런. 5일이 지났군.’

혀를 찼다.

그는 바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을 호출했다.

쿠로사와 유이는 15분 뒤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쿠로사와 군. 꼴이 말이 아니네. 병실에 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같군.”

“농담이 나와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긴 하세요?”

쿠로사와 유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겨 있었다. 하세가와 잇신은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악마에게 스사노오의 곡옥을 빼앗겼나?”

“악마요? 갑자기 악마가 왜 나와요?”

“악마가 아카데미를 습격하지 않은 건가?”

“악마가 무슨… 아니, 잠깐. 그거 악마예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악마처럼 생기긴 했네요. 설마 진짜 악마일 줄은 몰랐는데. 젠장. 대체 테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쿠로사와 유이가 머리를 붙잡고 히스테릭을 부렸다. 하세가와 잇신은 차분하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상황이 급박해도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학생들이 갇혔다고?”

“네. 시간 배율까지 30배로 늘어났죠. 오늘이 5일째니…. 학생들은 150일 동안 테라 시뮬레이터에 갇혀 있는 거라 할 수 있네요.”

“테라를 초기화하는 건?”

“어떤 명령어도 먹히지 않아요.”

“캡슐을 부수고 학생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당연히 그러려고 했죠. 테라의 협박이 아니었으면 그랬을 거예요.”

“테라가 협박이라…. 지나치게 발전했군. 어떤 협박이었나?”

“저희 프로젝트를 외부에 알리겠다는 협박이었죠.”

“나와 자네가 무사하다는 건 다행히 협박으로 끝났다는 뜻이군.”

“안심할 수는 없어요. 종말인가 뭔가 때문에 지금 학생들 생명이 모두 위험한 상태예요. 테라 시뮬레이터 시간으로 남은 시간은 50일 밖에 없어요. 현실 시간으로는 이틀 정도밖에 안 돼요.”

학생들이 죽으면 일이 커진다. 그리고 시간을 오래 끌면 텐라이 나기사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성하리는 어떻게 됐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에 갇혀 있죠. 다행히 스사노오의 곡옥은 못 찾은 것 같아요. 문제는….”

“문제는?”

“스사노오의 곡옥을 관리하던 서브 인공지능이 멋대로 움직였어요. 3일 전쯤에 그들과 접촉한 걸 확인했어요. 테라의 말에 따르면 거래를 한 모양이에요. 그들이 종말을 해결하면 스사노오의 곡옥을 넘기기로 한 모양이에요.”

“반드시 막아야 하네. 스사노오의 곡옥만큼은 절대로 넘길 수 없네.”

“알고 있죠. 그래서 테라를 지원하고 있어요. 다행히 테라도 스사노오의 곡옥을 넘기고 싶어하진 않더라고요. 퀘스트를 만들고, 새로운 몬스터와 도시 데이터를 넘기고…. 어떻게든 질질 끌고 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예요.”

“그런가. 잘 알겠네. 테라를 만나야겠네.”

“학장님. 이건 말해주시죠. 학장님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여덟 번째 군단장이 나타났네. 놈이 테라에게 무언가를 한 건 확실하네.”

“…….”

쿠로사와 유이는 잠시 멍해졌다. 여덟 번째 군단장?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혹시 테라를 초기화 시도는 해봤나?”

“…물리적으로 말이죠? 불가능해요. 테라가 사용하는 전력은 보조 에너지에 불과하고, 박살 내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테라와 만나 보시더라도 소용없을 거예요. 아주 고집불통이니까요.”

“그래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는 않나? 다른 것보다 스사노오의 곡옥을 빼앗기는 건 막아야 하네. 테라의 문제는 그다음이네.”

하세가와 잇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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