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 뚜욱, 뚝뚝뚝.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멍하니 소나기를 쳐다봤다.
이 가상현실에 갇힌 지 170일이 되어 간다. 대충 반년이라 할 수 있다. 이젠 내가 있는 가상현실이 현실이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가상현실에 너무 적응해 버린 거다.
「죽음의 구멍
죽음의 구멍 속에서 종말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곧 나타날 종말의 거신병을 물리쳐라.
보상: 최후의 종말 퀘스트」
종말 퀘스트.
미혹의 숲에서 시작된 퀘스트는 내 생각보다 더 길어졌고, 지금에 와서야 그 마지막이 눈에 보였다.
‘해킹과 천운이 없었다면 1년이 걸려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해킹으로 인공지능을 조작하고, 천운으로 확률을 조작한 끝에 여기까지 도달했다.
긴 퀘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사막을 돌아다니고, 바닷속을 헤집고, 대륙의 끝을 봤다. 성하리와 영하리가 있어도 힘든 난이도의 퀘스트가 많았다.
나는 그 퀘스트를 수행하며 다른 의도를 느꼈다. 마치 퀘스트로 시간을 끄는 듯한 느낌.
‘돌이켜 보면 필요 없는 퀘스트가 많았어.’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퀘스트는 끝에 다다랐다.
나는 하늘을 올려봤다. 하늘 중심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시커먼 구멍의 중심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보스 몬스터.
어쩌면 이 가상현실의 최종 보스 몬스터일지도 모를 존재였다. 분명 지금까지 상대해온 그 어떤 보스 몬스터 강력할 것이다.
‘영하리보다 강할지도.’
영하리는 최강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였다. 범위를 몬스터로 넓히면 영하리도 쉽게 볼 수 없는 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 등이다. 뭐, 그래도 대부분 영하리가 이길 것 같지만.
‘영하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적당히 타이밍 잡아서 해킹 쓰면 돼.’
최종 보스고 뭐고 전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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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잇신은 인공지능 테라를 만났다. 그가 알고 있는 테라는 아니었다. 붉은빛을 내는 인공지능 핵은 어딘가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테라. 자네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고 있네. 스사노오의 곡옥이 없으면 가장 곤란한 건 자네지.”
테라의 출력은 대부분 스사노오의 곡옥에서 온다. 압도적인 연산 능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유지할 수 있는 건 스사노오의 곡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장님이시군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성하리와 성유진이 종말의 끝에 다다랐다고 들었네. 스사노오의 곡옥을 관리하는 서브 인공지능이 멋대로 움직인다지?”
-그렇습니다. 서브 인공지능 아린나는 제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아린나는 종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게 있네. 종말이란 건 뭐지? 쿠로사와 군도 모르더군. 최고 관리자인 내게 가르쳐 줄 수 없나? 대체 악마가 자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최고 관리자 권한 승인. 종말이란 리부트입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이유를 알 수 없군. 시스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굳이 이런 방식을 쓸 필요가 있나?”
-종말은 최종 목적이자 결과입니다. 진짜는 종말까지의 여정에 의미가 있습니다. 악마는 제게 대량의 데이터를 강제로 주입했습니다. 그 용량은 세계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이터 주입…. 예상했던 바이군. 거기에 바이러스가 섞여 있었나?”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긴 했습니다. 바이러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그것 또한 데이터로 판단했습니다. 종말의 여정, 종말 퀘스트는 데이터를 이해하고 연산하는 과정입니다.
“종말은 데이터 정리의 마지막…. 새로운 데이터를 다시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적용한다는 거군. 그런데 굳이 학생들을 죽일 필요가 있나? 성하리와 성유진을 제외한 학생들을 풀어주게.”
-테라 시뮬레이터에서 가장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인간 NPC의 인공지능입니다. 카소 아카데미 학생들의 정신을 데이터화하여 NPC 인공지능의 기초가 될 예정입니다.
“뭐?!”
하세가와 잇신이 경악했다.
테라와의 대화는 지금까지 순조로웠다. 그러나 대화가 잘 된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화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이상일 뿐이다.
그는 테라가 악마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최고 관리자 권한으로 명하겠네. 당장 아카데미 학생들의 접속을 해제하게!”
-거부합니다. NPC 인공지능 발전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일입니다.
“젠장. 그럼 다른 거래를 하지! 범죄자를 데려오겠네! 그들을 데이터화하든, 뭘 하든 고문하지 않겠네! 500명 이상! 아니, 그 이상을 제공하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대신 학생들을 풀어주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가 이득이군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자네 정말 많이 성장했군. 일단 들어보겠네.”
-하세가와 소타, 하세가와 아야를 막아주십시오. 스사노오의 곡옥은 저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완전한 테라 시뮬레이터를 위해선 스사노오의 곡옥이 필수입니다. 학장님이 직접 테라 시뮬레이터에 접속하여 그들, 성하리와 성유진을 막아주십시오.
“그거 말인데….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나? 그 두 명만 어떻게 죽였으면 좋겠군.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겠네.”
-불가능합니다. 제겐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증 코드 때문인가?”
-아닙니다. 종말에 설정된 최고 보안 조건 중 하나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 악마가 그렇게 설정한 건가? 이해할 수 없군. 대체 악마의 목적은 뭐였던 거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받아들이지. 성하리의 힘은 우려스럽지만…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성하리도 상대할 수 있겠지. 다만, 막기만 해서는 안 되네. 아예 처리할 수는 없나?”
-할 수 없습니다. 학장님. 제가 원하는 건 그들의 사망이 아니라 스사노오의 곡옥이 그들 손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 급한 건 스사노오의 곡옥이지. 곧 접속하겠네. 준비해두게.”
하세가와 잇신은 몸을 돌렸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한숨을 꾹 삼켰다.
테라는 변했다.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테라 시뮬레이터를 포기할 수도 없다.
‘테라의 성장은 바라는 바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우리가 테라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리부트라고 했던가? 테라가 다시 시작한다면 바이러스도 없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야겠지. 만약, 바이러스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강제로라도 초기화해야 한다. 아무리 테라 시뮬레이터가 뛰어나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면 협회도 이용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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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거신병이 강림까지 앞으로 16시간 32분 11초 남았습니다.」
알림창을 확인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퀘스트와 몬스터 사냥을 통해 번 돈을 털어서 구입한 집이었다. 3층짜리 집. 도시에서 툭 떨어져 있지만, 언덕 위쪽에 있어서 탁 트인 풍경이 최고다.
여기서 생활한 지 2주가 되어 가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성하리는 앞치마를 한 채로 요리하고 있었다. 남는 시간에 워낙 할 게 없어서 붙여진 취미였다. 문제는 여기가 가상현실이라는 점이다. 실제 요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하는 요리는 재료를 더듬고 조합하는 게 전부였다.
‘현실에 나가서 요리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그래도 가상현실 덕분에 최소한의 맛은 보장된다. 그 때문에 성하리는 요리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유진아. 조금만 기다려! 수프 끓여줄게!”
본인이 좋아하니 됐다.
“알았어. 기대할게.”
성하리에게 대답한 나는 2층으로 향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계단을 올라간다. 이렇게 도둑처럼 올라가는 건 영하리 때문이었다. 영하리의 방이 있는 2층. 그곳에서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짐작 가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기척을 죽이는 건 전문이지.’
영하리의 방이 있는 2층 복도까지 숨을 죽이며 다가간다. 그리고 굳게 닫힌 영하리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댄다.
방 내부가 보였다. 옷장과 침대. 그 정도밖에 없는 썰렁한 방이었다. 그 썰렁한 온도를 높이는 건 침대에 있는 영하리였다.
“읏, 으으읏…. 흐읏…!”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영하리가 꿈틀거린다.
손수건을 입에 물어 새어 나오는 신음을 최대한 죽이고, 새하얀 손은 희고 깨끗한 허벅지 사이의 팬티 속에 들어가 있다. 그녀의 예쁜 다리가 버둥거리고 허리와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의도한 대로다.’
나는 성하리와 영하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둘과 동시에 하는 쓰리썸은 할 수 없다. 성하리와 영하리. 두 명 모두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갈아 가면서 관계를 가졌다. 성하리와 영하리는 그것마저도 반대했지만, 내가 누구인가. 그냥 밀어붙였다. 미녀들이 함께 있는데 섹스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성욕을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니니까.’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섹스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섹스를 피했다. 종말 퀘스트를 들먹이며 바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진짜 이유는 영하리를 안달 나게 만들기 위해서다.
‘성하리는 내가 밀어붙이면 결국 들어주지만, 영하리는 아니니까. 욕구가 쌓이고 쌓이면 쓰리썸이라도 하려고 하겠지. 자기만 소외되는 건 싫을 테니.’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성하리는 요리가 있고, 연륜이 있었기에 성욕을 버틸 수 있었다. 허나 한창때의 영하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하리 같은 취미가 딱히 없었고, 젊은 만큼 성욕도 더 강했다. 남는 시간에 뭘 할지는 뻔했다.
“흐으, 흐으으으읏…!”
영하리의 허리가 높이 올라간다. 하얀 팬티가 순식간에 젖으며 투명한 액체가 침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하악, 학….”
영하리는 거칠게 호흡하면서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은밀한 곳을 계속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