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0화 (1,530/2,000)

“계약자여, 나는 유페리스다. 내게 부탁할 것이 있나?”

온몸이 떨려올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

이놈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 확실했다.

성하리가 근처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놈이 다짜고짜 성하리를 공격했더라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커졌을 것이다.

‘기껏해야 상급 정령이 나올 줄 알았는데. 기분 좋은 오산이군. 최상급 정령의 힘이라면….’

최상급 정령.

상급 정령과는 격이 다르다. 그 힘은 자연재해나 다를 바 없다. 옛날에는 토지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던 존재들이다. 개체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도시 하나쯤은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을 거다.

“이 공간을 감싸고 있는 결계 보이지? 없애버려.”

“알겠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힘을 일으킨다. 편했다. 진짜 최상급 정령이었다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며 되도 않는 요구를 해왔겠지.

바람이 일었다.

초여름에 부는 듯한 선선한 바람이었다. 너무 부드러운 바람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보여주는 결과는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거칠었다.

‘무슨 원리인지 몰라도 바람이 지나간 공간이 비틀리고 왜곡되고 있다.’

하세가와 잇신의 결계? 공간이 휴지처럼 구겨지는데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세가와 잇신의 결계는 부서지고 있었다.

결계 조각이 반짝이는 별처럼 떨어진다. 그 광경은 꽤 아름다웠다.

“최상급 정령이라니…?! 테라!!”

하세가와 잇신이 인공지능을 불렀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몰라도 구겨지는 얼굴을 보니 원하는 대화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성하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는 결계에 묶여 지상에 떨어져 있다. 뇌전으로 결계를 태우고 있지만,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녀와 하세가와 잇신 사이로 꽤 거리가 벌어져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유페리스! 저 빌어먹을 노인네를 죽여버려!”

“보통이 아닌 노인이군. 직접 움직여 갈아버리겠다.”

“뭐? 아니, 멈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페리스는 바람처럼 움직여 하세가와 잇신에게 날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토네이도가 하세가와 잇신의 몸을 뒤덮는다. 하세가와 잇신은 결계를 이용해 버티기 시작했다. 유페리스는 끝장을 내려는 듯이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멈칫했다. 유페리스의 시선이 아래쪽의 성하리에게 향한다.

“역겨운 배신자가 여기에 있었군.”

유페리스가 성하리를 향해 주먹을 내밀며 떨어진다. 나는 성하리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단숨에 거리를 좁히기엔 내가 너무 느렸다.

“엄마!!!”

성하리는 침착하게 창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 그 공격에 유페리스의 오른팔이 잘려 나간다.

유페리스는 정령. 근 본질은 바람 그 자체다. 팔이 잘려나가도 정령력이 있는 이상 바로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유페리스의 오른팔은 재생되지 않았다.

“이 배신자가! 감히 내 힘을…!”

“어차피 여긴 가상현실이잖아. 네 힘은 내가 쓰겠어.”

성하리가 가진 두 개의 특성 중 하나, 정령 포식자(S)의 효과가 발동했다. 유페리스가 바람을 움켜쥔다. 그의 주위로 선선한 바람이 불며 공간이 왜곡된다.

“모든 정령을 대표하여 너를 징치하겠다!!”

성하리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의 발이 땅으로 파고 들어간다.

파지지지직.

꽉 쥔 창끝에 시퍼런 뇌전이 모여들었다가 퍼진다. 퍼진 뇌전은 왜곡되는 공간을 억지로 붙잡아 압축한다. 이어서 창은 압축된 공간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은 유페리스를 꿰뚫고 하늘까지 일직선으로 뚫었다. 그 광경에 나는 멈춰 섰다.

유페리스는 존재가 흩어지며 성하리에게 흡수되었다.

성하리가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콰르르릉!

뇌성과 함께 그녀는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했다. 그녀의 몸 주위로 전류가 튀었다.

섬뢰.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기술을 떠올렸으나 바로 부정했다. 섬뢰 이상의 무언가다.

“유진아. 이 상황을 타파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정령을 소환해 줘. 되도록 많이. 엄마가 부탁할게.”

“마나 포션이 있으니 할 수 있어. …근데 엄마는 괜찮아? 지금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엄마는 괜찮아. 유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여긴 가상현실이잖아? 진짜 정령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 부탁해, 유진아.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지.”

성하리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하세가와 잇신이 결계를 펼치고 있다. 겹겹이 쌓인 결계는 마치 우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는 더 디테일해진다.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테라의 도움을 받는 게 분명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꿀꺽꿀꺽 삼켰다.

“정령 소환!”

쩌저정!

대기가 얼어붙는다. 그 중심에는 마름모 모양의 얼을 조각이 있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외형과 달리 가진 힘은 유페리스와 비슷했다. 얼음의 최상급 정령이 말하기도 전에 성하리의 창날이 정령을 갈랐다.

“아아아아악!”

정령은 비명과 함께 성하리에게 흡수되었다.

“부족해. 유진아.”

그녀가 재촉한다. 나는 마나포션을 빨면서 정령을 소환했다. 이후 최상급 정령 1마리, 상급 정령 6마리를 포식한 그녀는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하세가와 잇신에게 쇄도했다.

그의 결계가, 그의 우주는 깨진 유리처럼 부서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내 결계가 이렇게 허무하게 부서질 리 없다!! 테라! 뭐 하는 거냐?!”

경악과 당혹감이 섞인 그의 목소리는 절규와 같았다.

“당신의 결계는 대단했어. 아마 그 할망구도 당신의 결계에는 꽤 애먹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막아서기엔 모자라.”

“테라 시뮬레이터에서의 힘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지금 네 힘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네가 그 뇌성의 관천이라 하더라도…! 그 강함은 선을 넘었다!!”

“선? 글쎄. 당신의 세계가 좁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야.”

성하리가 하세가와 잇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먹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의 몸은 분쇄되어 사라졌다.

성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용히 영하리를 쳐다봤다.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엄마! 멈춰! 설마, 하리를 죽이려는 건 아니지?!”

“유진아. 너도 알잖아. 걔를 죽여야 스사노오의 곡옥을 얻을 수 있어. 무엇보다 현실로 돌아가야지. 끝을 내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죽을 뿐이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영하리는 종말의 근원이었다. 지금 당장 영하리를 죽이지 않더라도 종말의 카운트 다운은 이어지고 있다. 영하리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이건 영하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사실이다.

“엄마도 걔를 죽이고 싶지 않잖아! 걔는 또 다른 엄마라고!”

“내겐 누구보다 네가 더 중요해.”

그 ‘누구보다’에는 성하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 사실을 안다.

“엄마! 내가 해결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마키나가 현실에 있어! 내가 전부 해결할 수 있어!”

“널 구할 확실한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유진아, 엄마를 원망해도 돼. 엄마는 그래도 유진이를 살아할 거니까.”

성하리가 몸을 돌렸다.

“엄마?!!”

그녀는 역장으로 만들어진 발판을 밟아 도약했다. 뇌성과 함께 영하리에게 달려간다.

“마키나!!!”

-갑자기 소리치지 마!

“그럴 시간 없어! 당장 테라 인공지능을 제압해! 어떻게 해서든 테라 시뮬레이터의 제어권을 손에 넣으라고!”

-…뭔가 심각한 것 같은데.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커. 가상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죽을 수 있어. 당연히 너랑 아줌마도 위험하고.

“닥치고 해!”

나는 죽어도 완전 회복이 있다. 성하리가 죽더라도 살릴 방법은 있다. 하지만 영하리는? 그녀는 가짜다. 나와 성하리 같은 생물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알았어. 잘못돼도 내 책임 아니야.

콰콰쾅!

두 개의 뇌성이 울린다.

성하리와 영하리가 싸우고 있다. 영하리를 노리던 카소 아카데미 학생들은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쏟아지고, 산이 뒤집힌다.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전투였다.

‘영하리가 밀리고 있어…!’

어떻게든 그녀들을 말리기 위해 내달렸다.

“마키나! 어떻게 되고 있어?!”

여기와 현실의 시간 차이가 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마키나를 재촉하지 않기에는 지금 상황이 급박했다.

-지금 인공지능 핵에 빙의해서… 앗? 자, 잠깐 악마가 있는데?

“악마?”

갑자기 웬 악마인가.

나는 마키나를 다그치는 대신에 정령안을 사용해 마키나의 시각을 연결했다.

익숙한 악마가 테라 인공지능 핵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보라색 피부의 중년인. 고양이 꼬리를 달고 있는 그는 마키나를 보며 빙긋 웃고 있다.

‘라플라스…!’

여덟 번째 군단장.

그를 보자마자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건 모두 저놈 탓이란 걸 깨달았다. 영하리가 가상현실에 나타난 것도, 영하리가 종말의 근원인 것도 모두 저놈의 짓일 거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저놈의 목적. 왜 이딴 짓을 벌이는 거지?

나를 괴롭히려고? 그건 아닐 것이다. 나를 괴롭히려면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

‘씨발! 몰라! 마키나! 저 새끼 무시하고 인공지능을 제압해!’

-아, 안 돼. 몸이 움직이지 않아…!

라플라스가 입을 연다. 무언가를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입술 모양으로 말을 유추하기도 힘들었다. 현실과의 시간이 달라서 입술의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

‘저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잠시만 기다려 봐. ‘그쪽 세계의 일은 그쪽에서 해결하게.’ 라는데?

‘…나한테 하는 말이군. 내가 보고 있는 것도 알고 있나.’

주먹을 꽉 쥐었다.

마키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해킹은.’

거신병을 잡을 때 사용했다. 지금은 쿨타임이다. 쿨타임은 3시간. 가상현실 시간으로는 90시간이다.

‘쿨타임 초기화권을 구매해서 쓰더라도….’

성하리를 막을 수 있나?

고작 1.1초 테라 인공지능을 해킹하는 것으로?

지금 가진 모든 포인트를 해킹 스킬에 사용하는 건 어떨까. 의미 없다. 해킹 지속 시간이 확 늘어날 거라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가상현실을 하며 천운을 사용하는 바람에 남은 포인트가 그렇게 많지 않다.

“씨발!”

방법이 없다.

그래도 여기서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성하리를 향해 달렸다.

‘내가 영하리의 방패가 된다면…!’

성하리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다. 그 점에 기대어 볼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싸웠다. 번개가 되어 부딪친다. 부딪칠 때마다 충격파가 터지며 애꿎은 나무들이 박살 났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녀들에게 나아갔다.

“이 미친 아줌마가…! 그동안 나름 미운 정이라도 든 줄 알았는데… 이럴 거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아.”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은 왜 안 하는 건데?!”

“다른 방법? 그러다가 못 찾으면?! 그러다가 유진이가 죽으면?! 넌 유진이를 사랑한다고 했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일 셈이야?”

“…그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죽을 거야! 오빠는 내가 살릴 거라고!”

“그럼 그냥 여기서 죽어! 어차피 넌 가짜잖아.”

“…….”

영하리가 동요한 듯 움직임이 살짝 굳어졌다. 성하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창을 찔러 넣는다. 영하리가 억지로 몸을 틀어 창을 막는다. 성하리의 창이 귀신처럼 움직였다. 영하리의 창대를 미끄러지듯 비껴가더니 손목을 베어낸다.

창대가 균형을 잃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날이 비집고 들어가 영하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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