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2화 (1,532/2,000)

칼날은 아린나의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왼쪽 허리까지 갈랐다.

피와 내장이 한 번에 쏟아진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피와 내장 때문이 아니다. 아린나가 내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린나는 보통 NPC가 아니다. 그건 이미 이전에 확인했다. 내 공격 따윈 쉽게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었을 거다.

“화풀이는 끝났나요?”

바닥에 쓰러진 아린나가 내게 물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안 끝났어.”

칼을 다시금 잡는다. 칼끝은 아린나의 미간을 겨누었다.

“저를 죽이시려고요? 전 상관없어요. 근데 저를 죽인다고 당신의 분노가 풀리나요?”

“아가리가 좀 긴데. 그런다고 내가 널 안 죽일 것 같아?”

“저는 어차피 사라져요. 테라가 종말에서 벗어나고 수복되었으니 저를 초기화시키겠죠. 스사노오의 곡옥을 당신에게 넘기는 건 월권이자, 반역이었으니까요.”

“테라. 그 인공지능 새끼도 죽일 거다.”

“정말요? 그건 제가 바라는 일인데…. 당신은 절 구원해주시는군요.”

“멋대로 생각해라.”

그 머리통에 칼을 쑤셔 박았다. 아린나의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네. 멋대로 생각하죠.”

머리에 칼이 박힌 아린나는 죽지 않고 말을 지껄였다. 특수한 NPC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피와 뇌수로 절여진 신발이 질척거렸다.

손에 쥔 스사노오의 곡옥을 확인한다. 하얀 곡옥은 신비한 빛을 흘렸다.

‘이대로 로그아웃하면 스사노오의 곡옥을 현실로 가져갈 수 있는 건가?’

나는 스사노오의 곡옥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신비하게 빛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손등이 빛났다. 텐라이 나기사가 준 인종 코드, 마름모 문양이 빛나더니 스사노오의 곡옥을 흡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뭘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여유가 오자 잡생각이 많아졌다. 영하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하리를 죽인 성하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영하리를 죽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하리는 내 여자였다.

그러니 증오의 방향을 돌렸다.

‘애초에 이렇게 된 건….’

악마 라플라스, 테라 인공지능, 하세가와 잇신.

죽일 놈들이 많았다.

그리고 카소 아카데미의 학생과 선생들. 그놈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일에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인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시네요.”

아린나의 목소리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머리통 터진 시체가 말을 했다.

“넌 왜 안 죽는 거냐?”

“제 본체가 뭔지 알고 계시잖아요. 이 몸은 아바타에 불과해요.”

“좀 닥치고 있어라.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로그아웃해서 현실에 돌아가더라도 바로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테라가 수작이라도 부렸나?”

“부담률. 정신에 쌓이는 피로도를 말해요. 테라 시뮬레이터를 오래 하게 되면 쌓이는 고질적인 문제죠. 보통의 경우엔 테라가 그 부담률을 최대한 낮추고 관리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부담률이 상당히 올랐을 거예요. 당신들이 받은 스트레스와 장기간 접속 등을 생각하면 로그아웃하더라도 바로 움직일 수 없어요. 신체와 정신의 파장과 괴리. 그것들이 맞춰지려면 최소 40분은 필요할 거예요.”

“로그아웃하고 40분 동안 병신이 된다는 거군. 그걸 왜 내게 말해주는 거지?”

심각한 문제였다. 40분. 카소 아카데미 측이 수작을 부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당신이 테라를 박살 내주기를 원하니까요.”

“내가 정말 테라를 박살 낼 거라고 믿는 건가?”

“당신은 분노했고, 그 분노를 표출할 힘도 있으니까요. 테라를 한순간이나마 지배할 수 있는 힘. 그 힘도 있는데 뭐가 두려울까요?”

“…40분. 그 40분을 피할 방법은? 40분은 너무 길다. 그 새끼들이 뭔 짓을 하고도 남는 시간이지.”

인공지능 테라가 보호하지 않는다. 캡슐을 강제로 오픈하고 나와 성하리를 죽이려 할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 완전 회복이 있으니까. 그러나 성하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무방비한 상태로 죽임당하는 건 절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마키나의 도움은 받을 수 없어. 지금 마키나는 악마와 대치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니까.’

위기였다. 꽤 초조해진다.

“당신은 괜찮아요.”

“아까랑은 말이 다르잖아.”

“제 말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넌 일본인 아니었나?”

“혹시 농담이신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스사노오의 곡옥을 손에 넣었어요. 이곳에서 쌓인 부담은 스사노오의 곡옥이 해결할 거예요.”

“스사노오의 곡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다고?”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테라 시뮬레이터의 출력을 대부분 감당했어요. 고작 그 정도 일도 못 할 것 같나요?”

“무한한 힘이라도 들어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스사노오의 곡옥은 출력을 내주는 대신 아카데미 학생들의 인간성을 조금씩 가져갔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설마. 우리도?”

“아뇨. 당신들은 인증 코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음. 곧 시간이군요.”

「테라 시뮬레이터의 모든 기능이 정상화됐습니다.」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파직.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테라가 당신을 막으려고 하네요. 의미 없는 짓이죠. 테라는 당신을 막을 권한이 없으니까요. 자, 현실로 돌아가세요.”

“네가 말하지 않아도 현실로 돌아갈 거다. 로그아웃.”

「로그아웃을 진행합니다.」

“후후. 폭풍이 몰아치겠군요.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 • •

콰콰콰쾅!

세계가 멸망했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거칠게 흔들리는 파도, 온갖 방향에서 불어오는 광풍, 바다를 향해 마구 내려치는 벼락, 검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수십 개의 용오름.

나는 비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걸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있는 곳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돌길을 걷는다. 왜 걷는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 걸어간다. 그래야 했다.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붉은색 문이 있었다. 일본 신사에 가면 볼 수 있는 뻥 뚫린 문이다. 일본어로 토리이라고 하던가? 하늘 천(天)을 닮은 문이다.

문을 지나간다. 벼락이 내 주위로 떨어졌다. 비바람이 내 몸을 잡아끈다.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멍하던 정신이 깨어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럴 시간도 없었다. 발이 더 빨라졌다.

돌길의 끝이 보인다.

바위산이 있었다.

아니, 바위섬이라 부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저 바위들은 거친 바다의 중심에 있었으니까.

바위섬으로 가다가 우뚝 멈췄다. 바위섬 꼭대기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남자였다.

긴 검은색 머리카락과 수염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는 왼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왼팔을 걸쳤다. 왼손은 검을 쥐고 있다. 찢어진 그의 옷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엿보인다. 그의 눈이 내게 향한다. 강렬한 시선은 물리적 힘이 되어 내 몸을 압박한다.

“나는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다. 너는 누구냐?”

“성유진.”

“무엇을 원하느냐?”

“당장 날 밖으로 내보내라!”

“분노하고 있구나. 내 힘을 원하느냐?”

“필요 없다. 날 밖으로 내보내라고 했다.”

“하하하. 분노에 미쳤는가. 복수를 원하는가. 사내의 기개로다. 응당 당했으면 갚아줘야지.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폭풍이여.”

파도가 솟구쳤다. 파도는 점점 커져 해일이 되었다. 바위섬은 물론이고 하늘까지 쓸어 버릴 듯한 거대한 해일이 나를 덮쳤다.

바다에 빠진다.

팔다리를 버둥거려도 몸이 뜨기는커녕 점점 가라앉는다.

심해. 빛 하나 들지 않는 그곳에서 숨이 턱 막힌다.

그리고 강제로 끌어올려졌다.

푸슉!

캡슐이 열리고 내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커어억!”

바닥에 엎어진 나는 숨을 토해냈다. 헛구역질을 몇 번 했으나 바닷물은 올라오지 않았다.

“뭐, 뭐야? 왜 바로 깨어 있는 거지?!”

“학장님이 남긴 말을 잊었어? 일단 붙잡아!!”

내 주위에는 무장한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 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자들이 보였다.

전부 죽여야 할 놈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내 주위로 바람이 불었다.

『특성, 폭풍의 신(SS)을 획득합니다.』

『이름: 성유진

근력: SS 체력: A+ 민첩: S+ 내구: SS 마나: SSS+

특성: 정령안(S) 악마 사냥꾼(S) 폭풍의 신(SS)

스킬: 정령계약(A) 정령강령(A) 역장(C+) 검술(B+)

카르마: 선(善) 34』

상태창을 확인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고, 새로운 특성이 생겼다. 힘의 정체는 뻔했다. 내 안에 있는 스사노오의 곡옥이다.

“잘 됐다, 버러지들.”

몸을 일으킨다. 전신에서 힘이 넘친다. 지금의 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칼이 필요했다.

저 새끼들을 찢어 죽일 칼.

인벤토리에서 화련비도를 소환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과 뇌전이 모여들더니 검의 형태를 취한다.

투박한 생김새의 검.

쿠사나기의 검.

검을 휘두른다.

깔끔한 선이 그어졌다. 선이 베지 못하는 건 없었다. 사람, 기계, 벽 할 것 없이 모조리 베었다. 하반신과 상반신이 나뉜 시체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꺄아아아아아악!”

여자 연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시끄럽다.”

내 손에서 뻗어나간 바람이 여자 연구원의 몸을 갈기갈기 토막 내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 인간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연구웓늘을 둘러봤다. 겁에 질린 그들이 뒷걸음질 쳤다.

“지, 지원을 요청해!”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패닉에 빠진 놈이 도망친다. 나는 검 끝으로 도망치는 놈을 가리켰다. 검 끝에서 벼락이 튀어나와 도망치는 놈을 감전시켜 죽였다.

“전부 죽인다. 예외는 없다.”

바람과 벼락이 휘몰아쳤다. 나는 그 안에서 검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다. 움직이는 인간은 없었다.

‘아직 안 끝났어.’

캡슐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있던 캡슐 옆, 성하리가 캡슐 속에 있었다. 그녀는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다른 캡슐 속에 아카데미 학생들이 들어 있다. 성하리와 마찬가지로 깨어나지 않았다.

‘내가 이 새끼들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파지지직.

바람과 뇌전이 쿠사나기의 검을 타고 흘렀다.

‘없다!’

나는 캡슐 속의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