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슐 속에 있는 학생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럼에도 내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내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내 얼굴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내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가라앉는다.
‘아직 죽여야 할 놈들이 많아.’
캡슐은 여기에 있는 것만 아니다. 여긴 3학년 A반 전용이다. 다른 곳에도 캡슐이 모여 있을 거다.
‘이 아카데미에는 학생과 선생만 있는 게 아니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전투 요원, 테라 시뮬레이터의 제작을 위한 연구원과 개발자들까지. 죽여야 할 놈들은 차고 넘친다.’
내가 우려하는 건 이 힘이다. 놈들을 전부 쳐 죽일 때까지 이 힘이 바닥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무한한 힘 같은 건 없다.’
스사노오의 곡옥도 마찬가지다. 힘이 바닥을 드러내면 채우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채워지면 최고지만, 무언가 대가를 바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내게 대가를 원하면 무시한다. 힘을 주니까 쓰긴 하는데 내가 달라고는 안 했어.’
캡슐실 밖으로 나간다. 잠깐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캡슐 속에 잠들어 있는 성하리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린나의 말로는 깨어나기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했었나.’
여기에 있는 놈들을 몰살하기까지 3분도 걸리지 않았다. 40분이면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놈들을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문밖으로 나온 나는 천천히 걸었다.
미세한 전자파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 날려 보낸 전자파는 일종의 감각이었다. 박쥐가 초음파를 쏘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전자파를 쏘아내지만.
어쨌든 이 전자파 덕분에 카소 아카데미의 건물 구조가 머릿속에 바로 때려 박혔다. 숨겨진 공간과 숨어 있는 놈들. 전자파가 닿지 않는 미지의 구역까지.
앞으로 걸어가던 나는 옆의 벽을 향해 쿠사나기의 검을 휘둘렀다. 쿠사나기의 검은 부드럽게 벽을 베었다.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도 저항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벽 안에는 가운을 입은 남자가 숨어 있었다. 양손은 노트북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다. 슬쩍 보니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넷이 먹통인지 메일은 보내지지 않았다. 반대쪽 벽에는 기계 장치들이 많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군. 자료를 보관하는 곳인가.”
“힉…!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말단입니다!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입니다!”
“뭘 했지?”
“네?”
“위에서 시켜서 했다며. 뭘 했냐고 물었다.”
쿠사나기의 검을 기계에 찔러넣었다.
파지지직! 펑!
기계가 터졌다. 폭발력은 약했다. 검을 통해 전류가 내 쪽으로 흘러들어온다. 보통이라면 감전당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역으로 전류를 흡수했다.
남자는 깜짝 놀랐다.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 두려움에 차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기록입니다. 테라 시뮬레이터의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한 정신과 신체 데이터들입니다.”
“인체 실험 기록인가.”
“이, 인체 실험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기록들… 입니다…!”
내게 목소리를 높였던 놈은 곧바로 자기 주제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별 관심 없었다. 이놈에게 던진 질문은 불 현 듯 생긴 호기심을 해결한 것에 불과했다.
나는 놈의 팔다리를 잘랐다.
“끄아아아아악! 왜, 왜?!”
“왜 죽이냐고? 아니면 왜 팔다리부터 자르냐고?”
“저, 저는 당신의 물음에 답했습니다!”
“어쩌라고. 답하지 않았어도 죽였을 거다. 팔다리부터 자르는 건… 그냥이다. 벌레를 죽이는 것과 같지. 이렇게 죽이고 싶으니까 이렇게 죽인다.”
그의 복부에 검을 살짝 찔러넣었다. 내장이 살짝 찔릴 정도로만.
“아아아아아아악!”
그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팔다리 없이 몸통을 껄떡거렸다. 그럴수록 검은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죽기 직전에 목을 베어 죽였다. 놈은 팔이 잘리고 배가 찔리고 목까지 베인 고통을 맛보며 죽었다.
뒤를 돌아본다. 무장한 남자 7명이 내게 뛰어온다.
“빌어먹을 새끼가!”
“뒤지기 싫으면 무기 버리고 항복해라!”
“마지막 경고다! 무기 버리고 항복해라!”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조소를 흘렸다.
“나였다면 먼저 공격하고 봤을 거다.”
화살이 날아온다. 가장 뒤쪽, 동료들의 어깨로 몸을 가리고 있던 작은 여자가 쏜 화살이었다. 파랗게 빛나는 화살은 평범하지 않았다.
‘화살을 쏜 여자의 능력은 아닌 것 같고…. 화살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나?’
끼이이이이익.
화살은 바람에 막혔다. 바람을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화살을 정면에서 막은 것이다.
화살의 빛이 더 강해지더니 폭발했다. 빛은 수십 갈래의 빛의 끈이 되어 나를 구속하려 했다.
어림도 없다.
작은 소용돌이였던 바람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빛의 끈을 찢어발겼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빛의 끈을 돌파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A랭크 구속의 활이 안 통할 줄이야! 내가 먼저 공격… 아아악!”
가장 앞에 있는 놈의 몸을 벤다. 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게 반격했다. 놈의 칼끝이 내 가슴을 노린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안 그래도 전부 보였던 놈들의 공격과 움직임이 더 느려졌다. 아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 이 느낌이야. 찰나를 쓸 때의 감각.’
가상현실에 갇힌 반년. 한 번도 쓰지 못했기에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놈의 칼이 내 가슴팍에 닿기 직전, 내가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하면서 쿠사나기의 검을 놈의 쇄골에 쑤셔 박는다. 이번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이어서 옆에 있던 놈의 건틀릿 낀 주먹이 뻗어온다.
주먹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주먹에 서린 힘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주먹을 피하고 파고든다. 쿠사나기의 검이 놈의 목을 베어 가른다. 놈의 머리가 지상에 떨어지기도 전에 뒤에 있던 남자가 달려든다.
느리다. 찰나를 쓰지 않았는데도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검을 휘둘러 벤다. 뒤에 있는 놈도 벤다. 그렇게 적을 베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검이 멈췄을 때는 나를 가로막는 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철푸덕.
뒤에서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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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
쿠로사와 유이는 불안감을 느끼며 복도를 걸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학장실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성유진은 폭주하며 모든 이들을 죽이고 있다. 헌터가 아닌 쿠로사와 유이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녀가 생각한 가장 안전한 곳은 학장이 있는 곳이다.
-괴, 괴물이다! 괴물이… 아아아아아아악!
-지원이! 지원이 필요합니다!
-제기랄! 경비조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외부에 도움을 청해! 놈이 너무 강하다! 우리로는 막을 수 없다!
그녀의 무전기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무전기를 잡아채 바닥에 버렸다. 무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죄다 비슷했다. 상대는 어떤 예외도 없이 차근차근 전부 죽이며 움직인다는 것. 어떻게 알았는지 비밀 장소에 숨어 있는 자들까지도 찾아내 죽인다.
‘외부에 도움을 청하라고? 내가 그 시도를 안 해본 줄 알아?’
쿠로사와 유이에게 있어서 테라 시뮬레이터 프로젝트는 중요했다. 자신의 미래를 걸었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그녀는 일이 틀어졌다고 판단한 즉시 외부에, 일본 히어로 협회에 연락을 시도했다.
시도는 시도로 끝났다.
스마트폰, 노트북, 컴퓨터 외의 모든 통신장비를 동원했으나 제대로 연락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통신장애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덜커덩, 덜컹!
창문이 거칠게 흔들린다. 신축 건물인 아카데미의 창문이다. 어떤 태풍이 왔을 때도 흔들리지 않던 창문이 지금은 깨질 듯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창문 밖은 어둡다. 지금이 밤이라서? 아니다. 지금은 오후 2시. 한창 태양 빛이 내리쬐어야 할 시간이다. 실제로 15분 전까지 태양은 눈 부실 정도로 밝았다.
15분 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태양을 가리고 폭우가 내렸다. 벼락이 쉬지 않고 내려치며 바람에 나무가 뽑혀 날아갔다. 바깥과의 통신이 끊긴 것도 저 폭풍 때문이다.
짐작 가는 원인은 있었다.
‘스사노오의 곡옥.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의 힘. 학장은 실패한 거야.’
학장에 대한 욕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학장의 힘이 필요했다.
일단 살고 보자.
쿠로사와 유이는 걸음을 재촉하며 학장실로 향했다.
쾅!
폭음이 울렸다.
복도 앞으로 걸어가던 쿠로사와 유이가 멈칫했다. 폭음은 정면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정면 복도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으으으윽! 사, 살려….”
쾅!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서 피와 내장이 날아와 바닥과 창문을 더럽혔다.
‘이게 무슨….’
갑자기 인간의 내용물이 복도 모퉁이에서 튀어나온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싸구려 B급 영화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넣지 않을 것이다.
쉬이이이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피비린내 섞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저벅저벅저벅.
누군가가 올라온다. 성유진이 분명했다. 쿠로사와 유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랫배까지 아팠다.
성유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명을 학살한 그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단지 늘어뜨린 손에 들린 검만이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쿠로사와 유이는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바람에 발목이 잡혀 실패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다가오는 성유진을 올려다봤다.
“머, 멈춰! 학장을 죽이고 싶은 거지? 학장이 어딨는지 알아!”
“학장이야 학장실에 있겠지.”
“우윽…. 죽고 싶지 않아. 살려주세요! 뭐든지, 뭐든지 할게요…!”
성유진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는다. 쿠로사와 유이는 핑핑 돌아갔다. 자신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연구자? 연구 지식이 필요한가? 그게 필요했더라면 다른 연구자들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원시적인 것. 원초적인 것. 여자의 몸.
쿠로사와 유이는 셔츠를 풀어. 가슴골을 내보인다. C컵. 나름 자신 있었다. 그녀는 이어서 다리까지 벌렸다. 치마 아래, 팬티스타킹에 감싸인 그곳이 잘 보이도록.
“뭐든지! 뭐든지 할게요!”
“똑똑하네. 내가 원하는 걸 잘 알잖아. 나름 아슬아슬하게 미인이라 할 수도 있고.”
성유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쿠로사와 유이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한없이 차가웠으니까.
“근데 내가 지금 좀 빡쳐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성유진이 검을 들었다.
“그냥 죽어.”
쿠로사와 유이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