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장실로 향하며 정령안을 사용했다.
마키나의 시야와 이어진다. 마키나는 여전히 테라 인공지능 핵이 있는 곳에서 라플라스에게 구속당한 상태였다. 라플라스는 마키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인공지능 핵 옆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군.’
라플라스는 도망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내가 먼저 라플라스에게 가지 않고 학장실로 향하는 이유였다.
학장실이 보인다.
그 어느 방보다 고급적인 나무 문. 신사인 척하면서도 자기 권위는 누구보다 잘 챙기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문을 발로 찼다.
콰앙!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린다. 직후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바람을 이용해 저항하지 못했다. 학장실 안으로 끌려간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다리에 힘을 주어 넘어지는 것만큼은 막았으나 왼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기분 나쁘다. 책상 앞에 하세가와 잇신이 서 있었기에 더욱더.
나는 자리에서 왼쪽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깨어나 있었나.”
“나는 자네들과 달리 오랫동안 테라 시뮬레이터 안에 있었던 게 아니니 말일세.”
“내가 깨어났을 때 너도 깨어났다는 거군. 왜 날 막지 않았지?”
“어쩔 수 없었네. 자네에게 죽은 자들이 안타까우나, 내겐 자네를 막을 힘이 없었네. 스사노오의 선택 받아, 폭풍의 힘을 휘두르는 자를 이 늙은이가 어떻게 막겠나.”
“지금은 막을 수 있고?”
“막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나는 자네를 죽일 걸세.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했네.”
정령안을 사용하고 있기에 보인다.
지금 내가 있는 학장실은 하세가와 잇신의 결계로 인해 다른 공간이나 다를 바 없다.
“팔괘 32형. 총 32가지의 결계. 거기서 이 학장실에 미리 준비해둔 3개의 결계. 총 35개의 결계일세. 아름답지 않나?”
결계가 가동한다.
공간이 늘어지고 줄어들고 왜곡된 끝에 우주가 되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을 반짝이고, 무수히 많은 선들이 별들 사이를 감싼다. 확실히 보기엔 예쁘긴 했다.
‘…압력이 강해졌다. 호흡이 곤란해졌다. 마나의 흐름이 둔해졌다. 정령안은 그대로. 스사노오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운용하려니 조금 답답하군.’
쿠사나기의 검을 들었다.
“이 결계내에서 나는 신이네. 무적이라 할 수 있지.”
“무적은 개뿔.”
뇌천류(雷天流) 한뢰(寒雷).
검을 중심으로 뇌전과 검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공간이 흔들린다. 결계의 압박에 뇌전과 검기가 약해졌다. 약해진 힘은 결계에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하세가와 잇신은 여유롭게 수염을 매만졌다.
“자네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네. 섣불리 학장실에 들어와선 안 됐어.”
“공격 한 번 막았다고 기고만장해졌군.”
“우연이라 생각하는가? 그 한전은 시작에 불과하네. 이 결계에 있는 이상 자네의 공격은 내게 일절 통하지 않네. 그리고 자네의 생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지.”
하세가와 잇신의 말대로 내 생명력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결계의 힘이다.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늪에 빠진 기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천천히 가라앉고 저항하면 더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자네는 스사노오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군. 고양이에게 금화를 준 꼴이지. 스사노오의 곡옥을 넘기게. 그럼 살려는 주겠네.”
“줄 것 같나?”
“이런.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는군. 스사노오의 곡옥은 직접 회수하겠네.”
결계의 힘이 강해진다. 나는 쿠사나기의 검을 꽉 쥐었다.
“스사노오의 힘을 쓰지 못해서 쓰지 않은 게 아니다. 진짜 스사노오의 힘을 보여주마.”
발치에서 푸른 전류가 튀고, 가슴팍에서 바람이 회전한다.
뇌전과 바람은 쿠사나기의 검으로 회전하며 모여들었다. 나는 쿠사나기의 검을 하세가와 잇신에게 겨누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벼락과 폭풍인가. 스사노오의 힘으로 유명하지. 한 번 해보게.”
하세가와 잇신에게 검을 휘둘렀다. 뇌전과 바람의 힘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막혔다.
별빛을 담은 장벽이 하세가와 잇신을 지켰다.
하나였던 힘이 다시 둘로 나누어졌다. 바람은 나를 중심으로 맴돌았고, 벼락은 쿠사나기의 검으로 모여들었다. 힘은 결계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푸하하하! 그게 신의 힘인가?! 이거, 내가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
박장대소하며 나를 비웃던 그는 곧 얼굴을 굳혔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드는군. 자네가 준비한 회심의 공격은 실패했네. 내 몸에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지. 그런데 그 눈빛은 뭔가? …날 보고 있긴 하나?”
마나를 볼 수 있다는 건 결계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거고, 결계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결계 밖도 볼 수 있다는 거다.
‘결계가 35개나 되니 정령안으로 바깥을 보는 것도 힘들군.’
괜찮다. 나는 눈이 두 개다. 정령안이 안 된다면 다른 눈을 사용하면 된다.
‘천안.’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천안은 결계를 손쉽게 꿰뚫어 봤다. 아니, 아예 시점 자체를 바꿔버렸다. 지금 내겐 결계 밖의 폭풍이 보인다.
그리고 보인다는 것은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35겹의 결계로 막혀 있다고 하더라도 보이는 이상 조정할 수 있다.
‘폭풍이여.’
폭풍이 반응한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이 바람에 말려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 뇌전이 모인다. 나는 뇌전을 공명시켰다. 그 모든 걸 컨트롤 한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먹구름 속의 뇌전을 공명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폭풍의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은 나는 다르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하세가와 잇신의 여유가 사라졌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늙은이가 눈치 하나는 빠르다. 아니지, 늙었기 때문에 감지한 걸지도 모른다.
“스사노오의 힘. 제대로 보여주지.”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나?!”
하세가와 잇신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움켜쥐듯이 손가락을 굽힌다. 그가 잡은 것은 결계였다. 그는 결계의 형태를 검으로 바꿨다. 검의 주위 공간이 조금씩 괴리된다. 공간을 괴리하는 힘을 가진 결계였다. 비록 괴리의 범위가 미약하다곤 하나, 파괴력 하나만 따지면 35개의 결계 중 가장 위험해 보였다.
하세가와 잇신이 내 쪽으로 달려온다. 별을 밟으며, 별빛으로 이루어진 듯한 검을 내게 겨눈다.
쿠사나기의 검을 치켜들었다. 하세가와 잇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하세가와 잇신은 나와 칼부림을 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결계나 쓰던 늙은이다. 당연히 접근전에 자신 없겠지. 늙었으니 더더욱.’
그는 검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늦었다.
이미 폭풍은 들이닥쳤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결계가 갈린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외부? 외부에서 공격하는 건가?! 말도 안 된다!”
그는 검을 팽개치고 양손을 움직였다. 결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내부로만 집중된 정교한 톱니바퀴 같던 결계들이 움직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쿠사나기의 검을 위로 던졌다. 쿠사나기의 검은 보이지 않는 천장에 박힌 듯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결계 3장인가. 생각보다 성과가 별로군.”
“네 이놈…!”
“나한테 으르렁거릴 시간 없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도 외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그리고 지금 막 외부 쪽 결계 2개가 박살 났다. 남은 결계는 총 30장. 그중 하나는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나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29개다.
“크윽!”
하세가와 잇신이 이를 악물며 결계를 조정한다. 나는 바람과 벼락을 움직여 그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장벽이 보호했다.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결계는 그 어떤 결계보다 단단했다.
“기다려라! 결계를 보강한 뒤에 네놈을 확실하게 죽여주마!”
“계속 만들어 봐라. 계속 파괴할 테니.”
내부의 바람과 벼락이 천장에 박힌 쿠사나기의 검으로 스며든다. 쿠사나기의 검은 내부의 결계에 파고들었다.
“하필이면 결계의 중점에 검을 박다니…!”
“결계가 모이고 이어지는 곳이 뻔히 보이는데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28.
27.
26.
내외부의 결계가 하나씩 파괴된다. 최종적으로 22개의 결계가 남았다. 그 이상은 바람과 쿠사나기의 검만으로 부수기 힘들었다. 하세가와 잇신 또한 여유를 되찾았다.
“…결계의 조정이 끝났네. 이제 결계가 부서지는 일은 없을 걸세. 자네 힘도 약해졌군.”
“내가 약해져? 아니지. 내 공격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결계 너머, 건물 너머에 있는 하늘을.
먹구름이 링의 형태로 회전하고, 그 중심에는 벼락이 한계까지 뭉쳐져 있다. 벼락이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백만, 어쩌면 수천만. 어쩌면 수억의 번개일지도 모르는 걸 일일이 어떻게 알겠나.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번개 뭉치는 내 부름에 답하듯 길쭉하게 늘어지며 창의 형태를 취했다.
뇌천류(雷天流) 극기(極技) 뇌신명(雷神命).
폭풍이 벼려낸 번개의 창이 지상으로 떨어진다.
세상이 번쩍였다. 소리보다 빨리 지상으로 떨어진 거대한 번개의 창은 22겹의 결계를 단숨에 찢고 쿠사나기의 검으로 스며들어 시퍼런 검날이 되었다.
“……!”
하세가와 잇신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는 패배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지막 결계검을 손에 쥔 것이다.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하세가와 잇신이 달려든다. 나는 쿠사나기의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결계검이 맥없이 부서진다. 공간을 괴리하는 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개념이 깃든 결계이긴 하다. 하지만 본질적인 힘의 차이가 개념의 차이를 압도한다.
“크으윽!”
힘의 여파로 하세가와 잇신의 몸이 종잇장 날리는 것처럼 뒤로 날아간다. 왼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놈의 목 아래에 검을 찔러넣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래가 들끓는 듯한 비명이 울린다. 나는 천천히 검을 아래로 내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놈의 얼굴을 꽤 볼만했다.
“원래는 살려서 생지옥이 뭔지 알려주려고 했으나… 내가 바쁜 걸 다행으로 여겨라. 너 다음으로 죽일 새끼가 하나 더 있거든.”
“꺼어어어어어어어억!”
하세가와 잇신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오줌을 지린 모양이지만, 위에서 쏟아지는 피가 오줌을 뒤덮었다. 이젠 오줌인지 피인지 모를 지경이다.
심장을 가른 검은 계속해서 내려가 내장을 가른다. 검이 배꼽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그의 숨통이 끊겼다. 나는 시체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지면을 쳐다봤다.
보인다.
지하에 있는 죽일 새끼가.
“떨어져라.”
콰콰쾅!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지면을 꿰뚫으며 구멍을 만들었다. 나는 가볍게 구멍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