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5화 (1,535/2,000)

벼락으로 바닥을 뚫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덕분에 가장 밑에 있는 지하 통로까지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도 되지 않았다.

지하 통로로 내려선 나는 정면을 노려봤다.

마키나는 공중에 뜬 채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녀의 앞에는 테라 인공지능 핵과 라플라스가 서 있었다.

“왔군. 다시 보니 반갑군. 우리의 천적이여.”

보라색 피부의 악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넨다.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놈을 향해 걸어간다. 격렬해진 감정에 스사노오의 힘이 반응했다. 바람이 지하 통로를 할퀴고 전류가 지면을 타고 흐른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죽음을 원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스사노오의 힘에 더불어 악마 사냥꾼(S)까지 활성화된다. 몸에 힘이 넘쳐흐른다. 지금이라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지지 않을 것 같다.

라플라스는 테라 시뮬레이터에 무언가를 했다. 이곳에 직접 나타난 게 그 증거다.

“유진아…!”

마키나는 나를 부르며 눈동자를 굴린다. 라플라스의 힘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정작 마키나는 그 힘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마키나에게 달라붙은 악마의 힘을 움켜쥐었다.

악마의 힘은 끈적하고도 집요했다. 그리고 강했다. 하지만 악마 사냥꾼(S) 특성이 힘을 발휘한다. 악마 본인도 아니고 힘에 불과하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힘을 제압한다. 악마의 힘이 약해진 순간을 노려 손을 당겼다. 악마의 힘이 찢어지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우와아! 고마워, 유진아! 이거 진짜 답답했어!”

“마키나. 엄마한테 가 있어.”

“응? 나도 싸울 수 있어!”

“가 있어. 혹시 모르니까.”

“아줌마가 위험한 거야?! 알겠어! 아줌마는 내가 지킬게!”

마키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하리에게 날아갔다.

마키나의 힘.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겐 스사노오의 힘이 있었다. 마키나의 힘을 신경 쓰며 제어하는 것보다 스사노오의 힘을 사용하는 게 훨씬 편하다. 그리고 성하리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모르는 변수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쿠사나기의 검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날에서 벼락불이 튀었다.

“폭풍의 신의 힘인가. 이거 참, 파괴적인 힘이로군.”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음. 물어보게나.”

“네 목적이 뭐지? 나를 죽이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하기엔 일이 너무 복잡하다. 날 죽일 생각은 있긴 한 거냐?”

“내가 왜 자네를 죽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내가 악마 사냥꾼이니까. 내가 네놈들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리고 네 입으로 말했다. 내가 너희의 천적이라고.”

“천적이긴 하지. 그러나 자네는 아직 우리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네. 설령 위협이 된다고 하더라도 악마 중에서 자네를 신경 쓰고 있는 자는 별로 없네. 왜냐, 자네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럼 대체 뭐냐? 왜 이딴 짓거리를 벌이는 거냐?”

라플라스는 뒷짐을 쥐었다. 시선을 살짝 위로 올려 내 머리 위를 바라본다. 구멍 난 천장을 통해 먹구름으로 가득 한 하늘이 보였다.

“우리의 천적이여, 군단을 알고 있나?”

“온갖 차원을 침략하는 악마 새끼들이란 건 안다.”

“침략하고 지배하고 빼앗고 불태우는 것. 그게 우리 군단이 하는 일이지. 왜? 이유는 딱히 없네. 생물이 무언가를 먹으며 살아가듯이, 우리 악마는 욕망대로 살아갈 뿐이네.”

“그게 네 목적이랑 무슨 연관이냐? 설마 목적이 없다고 지껄이는 거냐?”

“들어보게. 나는 여덟 번째 군단의 주인이네. 8군단은 마지막에 만들어진 군단이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너희가 마지막 악마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마지막 악마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8군단은 다른 군단에 속하지 못한 떨거지 악마들의 군단이네. 다른 악마들보다 힘이 약하지. 악마들에게 있어 약하다는 건 멸시 당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 떨거지들의 왕이 바로 너지.”

“하하.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뼈아프군. 맞네. 나는 군단장 중에서도 가장 약하네. 일곱 번째 군단장과 나는 비슷한 무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내가 더 약하네. 군단장 중에서 내가 최약체지.”

원작에서도 라플라스는 군단장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군단장 중 가장 교활했다. 다른 악마들이 무식한 힘을 앞세운다면, 라플라스는 뒤에서 공작을 일삼았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인간들이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탐욕을 부추기고 오해를 쌓게 만든다. 누군가의 농간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수렁 속에 빠진 뒤다.

“다른 군단장을 압도할 힘이라도 얻겠다는 거냐?”

“불가능하네. 난 내 한계를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라플라스가 웃는다. 양팔을 쫙 펼치며 연극을 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발견했네. 그놈들을 압도할 힘을! 심연 속에서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지! 이걸 희망이라고 하던가? 그놈들은 나를 무시했지만, 내가 만든 걸작만큼은 무시하지 못할 걸세! 아니, 오히려 우러러 보게 되겠지! 하하하하! 그놈들이 경악할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군!”

라플라스로부터 강력한 힘의 파동이 느껴진다. 그 이상으로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놈이 가진 광기였다.

“미친놈과 대화를 한 내가 병신이었지. 됐다. 이제 그만 죽어라.”

라플라스에게 다가간다. 놈의 힘이 자욱하게 깔려있는 곳으로 가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놈의 영역에 발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온몸이 찌부러질 것 같다.

나는 폭풍의 힘을 온몸에 두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라플라스는 피하지 않았다. 나를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서 웃는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돌아간다고 확신하고 있듯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다네! 그대는 이 세상의 중심이니까! 그대만큼 특별한 존재는 없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그대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안다네. 그대는 자신과 타인의 정보를 알 수 있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자신의 카르마를 볼 수 있다는 거겠지. 내 말이 틀렸나?”

“마음에 안 드는군.”

“내 모든 계획은 그대가 있었기에 성립되네. 내 계획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네였지.”

“난 네놈을 도운 적 없다. 도울 생각도 없다.”

“자네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네. 관측. 세계의 중심인 자네가 관측하는 것으로 세계는 비로소 가짜를 인정하게 되겠지.”

“헛소리는 저세상에 가서 지껄여라.”

쿠사나기의 검을 앞으로 내민다. 반발력이 느껴졌다. 라플라스의 힘이 나와 검을 밀어내고 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파지지지직!

검 끝에서 일어난 시퍼런 뇌전이 천천히 회전한다.

만뢰(卍雷).

땅을 파듯이 조금씩 악마의 힘을 분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라플라스는 테라 인공지능 핵을 움켜쥐었다. 콰득! 인공지능 핵이 부서진다. 라플라스는 그 중심부에 있던 작은 코어를 입에 넣어 꿀꺽 삼켰다.

‘발악인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 검이 라플라스의 가슴팍에 도달했으니까. 모든 힘을 쥐어짜 검을 밀어 넣는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직!

뇌전이 줄기차게 뻗어 나온다. 뇌전 하나, 하나에 악마 사냥꾼(S)의 힘이 서리기 시작했다. 검이 놈에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건 살덩어리를 찌르는 감각이 아니다.

검을 아래로 내린다. 놈의 정장이 찢어지고 그 안쪽이 드러났다. 놈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의 비늘 갑옷이다. 비늘 하나, 하나가 굉장히 정교했다. 검에 의해 반쯤 베이긴 했으나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다. 내 검을 한 번 이나마 막을 정도의 방어력.

“이건… 현무갑?”

“하하. 맞다. 이게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이 새끼가…!”

놈의 갑옷에서 파동이 시작되었다. 그 파동에 공간이 일렁거린다. 이건 던전 게이트가 발생할 때와 똑같았다. 몸이 강제로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현무의 시련이… ■■■□□■』

놈이 입고 있던 현무갑이 부서진다. 허나 게이트는 멈추지 않았다. 놈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게 확실했다.

“네놈만큼은 죽인다!”

이 기회를!

여덟 번째 군단장 라플라스를 죽일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죽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라플라스를 용의주도한 놈이다.

나는 전력을 다해 스사노오의 힘을 끌어냈다.

‘천심!’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내 몸을 빨아들이려던 게이트가 멈춘다. 나는 다시 한번 라플라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라플라스의 어깨를 베었다. 피가 튀었다. 뇌전이 놈의 상처로 파고든다. 하지만 부족하다. 한 번 더, 이번엔 정확하게 목을 노린다.

검을 휘두르기 직전, 라플라스가 사라졌다. 게이트 속으로 빨려들어 간 거다.

“놓칠 것 같냐…!”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 • •

게이트 안, 던전 속으로 들어왔다. 어지러움이 확 몰려왔기에 잠깐 눈을 감았다.

메케한 냄새가 났다. 불타는 냄새였다. 폭발음과 사람의 비명이 들린다. 억지로 눈을 떴다.

그곳은 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높은 빌딩은 불타며 부서지고, 아스팔트 도로는 갈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냥 도망가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119! 119 불러!!”

“씨발! 엄마! 엄마 어딨어?!”

“세상이! 세상이 멸망한다아아아!! 하하하하하하!! 죄인들아 두려워해라!”

서울은 혼돈 그 자체였다.

땅이 갈라지고 있다. 바람이 사람을 날려 보낸다. 난데없이 불덩이가 떨어진다. 벼락이 지상을 두들기고 한강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며 범람한다.

“지구가 미쳤다!!”

누군가가 외쳤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눈에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령.

수많은 정령들이 힘을 쓰며 날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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