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6화 (1,536/2,000)

서울이 자연재해에 파괴되고 있다.

당연히 히어로들이 나섰다. 인명구조를 최우선으로 움직이며 실체화한 정령을 공격한다. 그러나 정령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거나, 다른 정령들을 불러서 다 같이 공격했다.

특이한 점은 그게 하급 정령들의 움직임이라는 거다.

‘하급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멍청해. 좋게 말하면 본능적이지.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그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저렇게 뭉쳐서 싸우는 경우는 딱 하나야.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거지.’

주위를 둘러봐도 정령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령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힘을 받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최소 최상급 정령. 못해도 5마리 이상 모여야 가능할까 말까야.’

최악의 경우는 더 있었다. 정령왕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경우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한 여자가 내게 소리친다. 목소리는 내 취향이었는데 얼굴은 평범했다. 여자의 다리 쪽을 보면 아스팔트 파편이 박혀 있었다.

쿵. 쿵. 쿵.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상급 바위 정령이다. 그 엄청난 무게로 여자를 밟아 죽일 모양이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평범하잖아. 거기다 여긴 던전 속이잖아. 가짜인데 구해줄 필요가 있나?’

여자를 구하고 강간할 수도 있으나,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다. 라플라스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여자가 내게 손을 뻗는다. 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쿵! 상급 바위 정령이 여자의 몸을 밟았다. 밟고 또 밟았다. 그 행위에서 증오가 느껴진다. 나는 정령안을 사용한 채로 정령에게 다가갔다.

내게 살의를 일으키며 주먹을 쥐던 바위 정령은 다시 주먹을 아래로 내렸다.

“인간…. 네게선 친숙한 기분이 든다. 여기 있는 인간들과 다르군.”

정령은 호의적이었다. 내가 가진 높은 정령 친화력 덕분이다.

“왜 인간을 공격하는 거지?”

“방해할 것인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방해할 거라면 벌써 했겠지.”

“그렇군…. 친숙함이 느껴지는 네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정령왕께서 분노하셨다. 인간에게 실망했으며, 그 벌을 인간에게 내리기로 하셨다. 어서 빨리 인간을 죽여야 한다….”

정령에게서 절절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건 정령왕의 영향을 받아 느끼는 분노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정령왕이 직접 개입하는 일은 원작에서도 없었다.

“정령왕은 왜 인간에게 분노한 거냐?”

“성하리. 그 여자가 왕의 옥체를 훼손하고 먹었다.”

“…….”

나는 숨을 삼켰다. 예상 밖의 이름이 나오자 당혹스러웠다. 정령이 말하는 성하리는 영하리가 틀림없었다. 영하리가 살아있나? 죽은 게 아니고?

생각해보면 여긴 던전이었다. 영하리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가상현실의 영하리와는 다른 인물일 것 같지만.

“그 여자만 공격하면 되잖아. 인간 전체를 공격할 필요가 있나?”

“인간들은 그 여자를 필두로 정령계를 침범했다. 정령계를 파괴하고, 순리를 거스르려고 했다. 그에 정령왕께서 분노하셨다. 우리는 왕의 분노이자, 왕의 철퇴이노라.”

바위 정령이 머리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다른 인간을 발견한 듯 몸을 돌린다.

“너도 왕의 분노를 대행해라. 인간을 죽인다면 왕께서 기뻐하실 거다.”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서. 성하리. 그 여자는 어디에 있지?”

“저기 있다. 높은 산에 있다. 왕의 수족들이 직접 움직였으니…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 따위가 어떻게 버티겠는가. 그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다.”

“아주 저주를 해라.”

나는 스사노오의 힘이 담긴 쿠사나기의 검을 휘둘렀다. 바위 정령의 몸이 베인다. 커다란 바위가 두 개로 나누어졌다. 땅이 들썩인다. 놈이 힘을 쓰기 전에 남은 몸통도 베었다. 머리만 남은 놈이 내게 살의를 내뿜었다.

“감히 배신 하는가?!”

“성하리는 내 여자다. 누구 마음대로 죽이고 말아? 정령왕이든 뭐든 내 여자를 건들 자격은 없다.”

바위 정령의 머리를 베었다.

산이 있는 곳.

대한민국의 산이 한 둘인가. 게다가 [아카데미의 구원자] 세계는 현실과 달리 남북한이 쪼개진 적이 없었다. 625 전쟁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북쪽에 있는 산까지 합하면… 더럽게 많군.’

문득, 떠올렸다. 이 세계의 성하리를 만나야 하나? 원작의 성하리가 아닐 것이고, 내가 아는 영하리도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저번 경우를 생각하면 날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지금 나는 라플라스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

‘라플라스가 어딨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문제지.’

나는 멈칫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던전 속 성하리를 만나야겠어. 만나서 정보를 캐내자. 그럼 진짜 성하리의 과거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바위 정령이 말한 힌트는 산. 그리고 왕의 수족들이 움직였다는 말. 전투가 벌어졌다면 멀쩡하지 않을 테니 가장 위험한 산을 찾으면 될 것이다.

나는 일단 서울을 벗어났다.

• • •

우선 가장 남쪽으로 향했다. 한국의 산이라고 하니 지리산과 한라산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사노오의 힘을 사용했다.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 것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모두 정령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듣자 하니 중국과 일본도 난리가 아니라고 하던데. 뭐, 내 알 바는 아닌가.’

지리산은 무너졌다. 산사태가 일어나 엉망진창이었다. 정리하려면 최소 몇 년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최상급 정령이 힘을 쓴 것 같으나, 전투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폭발했다. 시뻘건 용암이 흐르고 하늘에는 화산재가 날렸다. 역시 전투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다른 산들을 찾아봤다. 전부 개판이었다. 멀쩡한 게 없었다. 물론 도시도 마찬가지다.

‘몇천만 명은 죽겠군.’

이 일이 끝난 뒤에 한국이란 나라는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남쪽 산은 다 뒤져봤는데 없다. 그럼 남은 건… 북쪽인가.’

바람에 몸을 맡긴다. 바람이 내 몸을 끌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상당히 편했다. 조금 춥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북쪽으로 날아가며 산이란 산은 다 뒤졌다. 그러나 전투의 흔적이 보이는 산은 없었다. 모두 자연재해로 인해 무참히 무너졌을 뿐이다.

이제 남은 산은 하나, 백두산이었다.

놀랍게도 백두산은 멀쩡했다. 자연재해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은 듯 강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데 저건 뭐야? 탑?’

백두산 꼭대기에 있는 호수에 탑이 우뚝 서 있었다. 대략 아파트 20층 높이로 보이는 탑이었는데 장대하면서도 웅장했다.

‘왜 갑자기 탑이 있는 거지? 그리고 여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백두산이 멀쩡하니 온 건가.’

나는 백두산을 꼭대기로 날아갔다. 호수는 빨갛다. 호수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호수 안을 들여다보니 시체가 한가득이다. 전투의 흔적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았다.

“누구지?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내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하얀 코트를 어깨에 걸친 흑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강지영. 원작의 마루한 아카데미 학장인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상의는 옆구리가 찢어져 있었다. 피의 흔적과 허리를 감은 붕대가 보인다. 하얀 붕대에 핏물이 배어있다. 딱 봐도 정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 진짜 이름을 알아도 던전 밖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니까.

“성유진이다.”

“아. 그렇군. 성유진. 소속은?”

“마루한 아카데미.”

“아카데미? 학생이라 하기엔 너무 강하군. 새롭게 들어온 선생인가? 왜 여기로 온 거지?”

“세상이 개판인데 그게 중요하나?”

“…하.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

“저 탑은 뭐지? 평범한 탑으로는 안 보이는데.”

강지영은 나와 탑을 번갈아 봤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하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포기한, 체념의 한숨이었다.

“탑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을 텐데… 모르는 건가?”

“내가 뉴스도 안 보는 편이라.”

“보름 전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나타나기 직전에 게이트 반응이 있었지.”

“탑의 모양을 한 던전인가.”

“먼저 탑에 들어간 히어로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히어로들이 반씩 이루어진 팀이었다.”

여긴 한국과 중국의 국경지대였다. 중국인이 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팀은 하루 만에 다시 나왔다. 팀의 80%가 전멸한 상태였다. 살아나온 자들은 저 탑을 소원의 탑이라 말했다.”

“…소원의 탑?”

“탑의 끝까지 오른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탑. 문제는 그 정보가 중국 쪽에서도 새어나갔다는 거지. 온갖 인간들이 몰려들었다. 밖을 보면 지금도 탑을 향해 올라오는 자들이 보일 거다.”

“그래. 백두산으로 오더군. 근데 실제로 도달하는 자들은 없군.”

“정령이 막아서고 있다. 이상하게도 정령들은 탑 근처로 오지 않더군. 너는 어떻게 정령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여기로 온 거지?”

“내가 정령사니까.”

“…정령사? 이름은 성유진…. 혹시 진령성가의 일원인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지영은 멋대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의 탑이라….’

이전에 성하리가 언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의문점이 있다. 탑 꼭대기에 오르면 소원을 이루어준다. 파격적인 보상인데 내가 그 존재를 모른다. 아카데미에서도 배운 적 없다. 이런 건 뉴스로서 몇 번 언급될 만할 텐데도.

“성하리가 탑에 들어갔나?”

“…그래. 8시간 전이다. 우리는 중국 쪽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우리들을 공격하더군. 막을 수 없었지. 5분 만에 전멸당했다. 내가 아는 성하리가 아니었다.”

“너는 죽지 않았군.”

“빌런이 됐음에도 옛정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던 모양이지. 성하리를 만나러 왔나? 관둬라. 지금의 녀석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같은 가문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공격할 거다. 특히나 정령사인 너는 녀석에게….”

쿠쿠쿵!

탑이 흔들린다. 그 표면에 금이 쩍쩍 가더니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절규.

성하리의 절규가 탑 꼭대기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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