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던 탑은 갑자기 멈췄다.
마치 탑이 무너지던 도중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찰나를 썼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찰나를 쓴 것치고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대체 뭐지?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저건 특수 던전이 확실했다. 탑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무언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까 들린 성하리의 절규가 관련 있는 건가.’
나는 탑을 노려봤다. 탑의 부서진 부위로 내부를 보려고 했다. 보이지 않았다. 천안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하세가와 잇신의 결계를 꿰뚫어 볼 때와는 다르다. 공간 자체가 다른 느낌이다.
‘이건 직접 들어가 봐야겠군.’
바람에 몸을 싣는다. 몸이 위로 두둥실 떠 올랐다.
“잠깐. 저 탑은 뭐지?”
강지영이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뭐?”
“저 탑이 뭐냐고 물었다.”
“…….”
지금 장난하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한마디 하려다가 강지영의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강지영은 이런 거로 장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매사에 진지해서 농담도 잘 안 하는 사람이 강지영이다.
“네가 방금 저 탑에 대해 말했다. 바로 잊어먹었나? 치매라도 있는 건가?”
“내가 방금 저 탑에 대해 말했다고? 확실히 말했던 것 같다. …치매. 이 나이에 정말 치매라도 오는 건가?”
강지영은 탑을 보며 미간을 잔뜩 좁혔다. 기억을 되짚으며 어떻게든 탑에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젓는다.
“내 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 탑은 뭐지? 이곳에 던전이 있어야 하지 않나?”
“주위에 널린 시체를 봐. 저 광경을 보고도 탑이 뭔지 모르겠다고?”
“흔하지 않은 던전이란 건 안다. 우리나라 사람과 중국인들이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안다. 국경지대인 게 문제였지. 지금처럼 대규모로 전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어도 비슷한 사례는 있다. 그런데 원인이 되는 저 탑에 관해서는 도통 모르겠군. 네 반응을 보니 평범한 던전은 아닌 듯싶군.”
“성하리가 탑에 들어간 건 알고 있나?”
“그건 알고 있다. 이 시체 대부분이 녀석의 짓이지. 근데 이 대화는 이미 나누지 않았나?”
“확인 작업이다.”
강지영은 소원의 탑에 대한 기억만 사라졌다. 아니, 아마도 강지영뿐만이 아닐 것이다. 소원의 탑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 모두가 포함되겠지.
‘정보 말살권을 사용한 것처럼. 소원의 탑이란 정보가 사라진 거야.’
그렇다면 던전 바깥에도 소원의 탑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간다.
‘대규모 정신 공격 같은 건가? 내가 멀쩡한 건 절대정신 때문이고? 아니면 내가 던전 밖에서 와서?’
정보 말살권도 없이 소원의 탑에 대한 정보를 삭제하려면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할까? 그것도 S급 히어로인 강지영의 기억까지 지워버리려면.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존재가 소원의 탑에 관련되어 있는 건 확실하군.’
모든 의문의 해답은 탑에 들어가면 알게 될 것이다.
쿠쿠쿵.
멈췄던 탑의 일부가 무너진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탑이 무너지고 있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저 탑은 뭐지?”
“몰라도 된다.”
“뭐?”
나는 강지영의 손을 뿌리치고 탑의 꼭대기로 날아갔다. 일부 무너진 탑 덕분에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확 바뀌는 감각.
예상했던 대로 탑 내부는 외부와 공간이 달랐다.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의 공간이 넓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 하늘 높이 뻗은 굵은 기둥, 황금빛으로 빛나는 배경. 굉장히 경건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들 중심에 세 명의 인연이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성하리.
그 앞에 있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무언가. 어둠이라 할 수도 있고, 빛이라 할 수도 있었다. 정체불명이다. 원작 지식에도 없는 자다.
그리고 그들 옆에 있는 라플라스.
라플라스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오른다. 파지직. 쿠사나기의 검에서 전류가 튀었다.
“…오빠?”
성하리가 망연히 나를 불렀다.
그 한마디에 직감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성하리는 가상현실에서 만난 영하리라는 것을.
• • •
또 다른 자신의 창에 가슴이 찔려 죽은 성하리가 눈을 떴다.
숲속이었다. 기억에 있는 곳이다. 가상현실, 그러니까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왔었던 장소다. 던전 게이트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확인했다. 가슴에 찔린 상처는 없었다. 자신은 꿈을 꾼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느낀 것들은 모두 진짜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마음을 태우고 있는 분노 또한 진짜다.
성하리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 아줌마…! 설마 진짜 날 죽이다니!”
분노하는 한편으로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으니까. 그녀도 성유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래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가슴팍을 만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딜까. 현실일까? 아니면 성유진이 말했던 대로 던전 속 세계일까?
타오르는 분노 속에 숨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나 성하리야. 당했는데 멍청하게 있을 것 같아? 갚아 주겠어.’
그게 설령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일단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적당한 호텔에서 쉬다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인 의뢰를 받고 해결한다. 근처에 위험한 빌런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가 죽여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또 다른 자신에 대한 분노는 줄어들었다. 대신 공허함이 커진다.
‘나는 가짜야.’
자신은 가짜다.
이 세계도 가짜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이 세계에는 오빠가 없어.’
성유진이 없는 세계.
그것만으로 이 세계는 가짜였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성유진을 만날 수 없게 된다.
‘…내가 임신해서 애를 낳으면 오빠가 태어날까?’
그러나 성유진의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가상현실에 있을 때 또 다른 자신에게 이것에 관해 물어본 적 있었다. 또 다른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돌리거나,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야. 내가 애를 낳더라도 그게 오빠라고 할 수 없어.’
그녀는 성유진을 찾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곳에 성유진이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위해서다.
같이 일하는 브로커를 만나 성유진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좁히고 좁힌 끝에 찾은 건 13명의 동명이인. 성하리는 그 동명이인을 전부 확인했다. 당연히 그가 알고 있는 성유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하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찾아가 성유진을 찾으려고 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 그래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둡고 끈적한 감정이 차오른다.
질투.
진짜 세계에 있는 성하리를 향한 질투.
자신을 죽인 자신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차오른다.
‘오빠. 오빠 보고 싶어.’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오빠 옆에 내가 있었을 텐데!’
‘그 여자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왜 내가 가짜여야 하는 건데?’
‘오빠가 없는 이 세계에…. 가짜인 세계에 의미가 있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방해하는 자들을 죽였다. 지금까지 히어로는 되도록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임 없이 히어로고 빌런이고 할 것 없이 죽였다.
‘어차피 가짜인 세상.’
선과 악을 따지기 전에 이 세계는 가짜였다. 의미 따윈 없었다.
그녀는 성유진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걸 방해하는 자들은 따지지 않고 죽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SS급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디재스터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S급 히어로가 그녀를 막아섰다가 역으로 사망하면서 붙은 별명이었다.
재앙.
그녀는 누구도 막지 못하는 재앙이 되었다.
“왜?! 왜 만날 수 없는 건데?! 그냥, 난… 오빠를 만나고 싶다고!”
성하리가 소리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실없는 전설까지 찾아 파헤쳤음에도 성유진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분노와 짜증이 한계에 달할 때쯤이었다.
그녀는 브로커로부터 소원의 탑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탑의 끝까지 들어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탑. 많은 사람들이 웃고 넘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원을 들어준다니? 어린아이의 동화처럼 터무니없는 소문이다.
허나 그 소문은 믿는 자들은
‘소원의 탑이면 그년이 언급했던 거잖아?’
그리고는 무언가 얼버무리는 듯했었다.
그녀는 감이 왔다. 소원의 탑은 진짜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여자가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을 테지.
‘문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온갖 빌런들이 날파리처럼 꼬여 든다는 거야.’
한국과 중국과 협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SS급 빌런이었으니까.
강제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중국과 한국의 히어로들이 모인 그곳을 강제로 뚫고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중국과 한국에서 S급 히어로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설령 뚫고 들어가더라도 끝이 아니야.’
소원의 탑을 공략해야 한다.
힘이 필요했다.
그녀는 중국의 범죄조직인 귀락곡과 일본의 범죄조직인 마도정과 만났다. 한국의 마인 연합 크라이즌을 브로커를 통해 불렀다.
‘그 셋 모두 내 힘의 근원을 알고 싶어 할 테지.’
힘의 근원을 알려준다. 물론 전부 알려주는 건 아니다. 적당히 알려주며 이용한다.
성하리는 그들을 이용해 정령계를 열었다. 그들과 함께 정령계로 들어갔다. 정령왕은 호의적으로 나왔다. 덕분에 정령왕의 허를 찌르며, 정령왕의 힘을 정령 포식자로 흡수할 수 있었다. 힘을 얻은 그녀는 바로 정령계에서 빠져나왔다.
정령왕의 분노와 저주가 그녀에게 닿았으나, 정령왕의 흡수한 그녀는 정령왕의 저주를 튕겨냈다.
죄책감은 없었다. 어차피 가짜니까. 정령계에 들어간 다른 빌런들? 뭘 하든 관심 없었다. 힘을 얻은 그녀는 소원의 탑으로 향했다.
싸우고 있는 중국과 한국 히어로들에게 끼어들어 모조리 죽였다. 혹시 모르니 경쟁자를 죽인 것이다. 비정한 마음을 먹었으나, 옛날 친구만은 죽이지 못했다.
그녀는 상처 입은 강지영을 뒤로하고 소원의 탑으로 들어갔다.
『소원의 탑의 꼭대기에 올라 소원을 이루십시오.』
『1층입니다.』
『하늘 고래를 죽이십시오.』
그녀는 탑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탑 꼭대기인 30층에 올랐다.
30층에 올라선 그녀를 반긴 것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빛이고, 어둠 같았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성하리에게 물었다.
“네 소원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