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8화 (1,538/2,000)

“네 소원은 뭐지?”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성하리는 기대로 부푼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의문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뭐지? 뭐길래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지?

“소원을 들어주는 이유는 뭐야?”

“그러기로 했으니 그러는 것뿐이다.”

“소원의 탑은 네가 만든 거지? 왜?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어쩌다 이 세계가 내게 인식되었다. 열심히 사는 인간들을 보니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 외의 이유는 없다.”

“…….”

성하리는 깨달았다. 그냥 이 자는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아마도 인간이 개미를 보는 관점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눈앞에 있는 존재는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신이든 악마든 상관없어.’

성하리는 그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오빠를 보고 싶어! 오빠가 있는 진짜 세계로 가고 싶어!”

“…….”

그는 침묵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의 침묵이 이어질수록 성하리는 불안해졌다. 최악의 상황이 상상되었고, 그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불가능하다.”

“왜?!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잖아!”

“알고 있을 텐데. 이 세상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너도 가짜고, 나 또한 가짜다. 진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가짜. 소리 없이 사라질 가짜일 뿐이다. 너는 경우가 조금 다른 모양이다만…. 결국 그 본질이 가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성하리는 공간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아니다. 흔들리는 건 공간이 아니라 그녀였다. 두통이 몰려오고 구역질이 치민다.

이 세계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니 진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마지막 희망이 지금 박살 났다. 설상가상으로 성유진을 만날 방법도 없다.

갑자기 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탑 내부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성하리는 절규를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그는 차분히 성하리에게 물었다.

“다른 소원을 빌어라. 가령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을 네 발아래에 두고 싶다던가, 아니면 이 세계의 파괴도 괜찮겠군. 본래 그것들 또한 불가능한 소원이나… 이 세계는 파멸이 정해진 가짜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그의 차분한 말에 조금이나마 성하리도 정신을 되찾았다.

“…어차피 가짜 세상인데, 그깟 소원에 의미가 있어?”

“무언가에 의미를 찾는 건 너다. 네가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면 의미 없는 것이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의미가 있는 거겠지. 다시 묻겠다. 네 소원은 뭐지?”

“…….”

이 세상은 가짜다. 그러니 차라리 전부 다 사라져 버릴까.

성하리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공간이 갈라지더니 정장을 입은 악마가 걸어왔다. 성하리도 알고 있는 악마다. 라플라스. 여덟 번째 군단장. 성유진의 적. 그의 어깨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파지직, 상처 부위에 시퍼런 뇌전이 잔류하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들어왔군.”

“하하. 이 정도는 봐주십시오, 이계의 신이시여. 저는 그녀에게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뭐, 상관없겠지.”

“관대한 결정 감사합니다. 이계의 신이시여. 괜찮으시다면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불허한다. 나는 가짜다.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은 없다.”

“진짜와 이어져 있다는 걸 압니다. 당신이 가짜라 하더라도, 진짜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당신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이니.”

“불허한다고 했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라플라스는 바로 물러났다. 불청객은 자신이다. 그를 자극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라플라스가 주저앉은 성하리를 쳐다봤다. 성하리는 이를 악물었다.

“날 비웃으러 왔어?”

“자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러 왔다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진짜가 되고 싶지 않나? 내가 자네를 진짜로 만들어주겠네.”

악마의 말은 달콤했다. 그렇기에 의심이 들었다. 악마의 말은 믿어서 안 된다는 건 상식이니까.

“저 신도 못 한 일을 네가 할 수 있다고?”

“나는 할 수 있네. 저 신은 가짜지만, 나는 진짜니까.”

“…어떻게 나를 진짜로 만들 건데?”

“이 세상은 가짜지만, 자네는 조금 특별하네. 반쯤 진짜인 상태라고 봐야겠지.”

“그게 무슨 뜻이야?”

“자네는 우주의 중심에 관측되었네. 카르마가 쌓였지. 거기다 가상현실이긴 하나 진짜 세계에 들어갔지. 비록 미약하게나마 진짜 세계에 자네의 기록이 새겨진 거지. 가능성이 생기고 자라났네. 이젠 꽃을 피워야지. 내가 도와주겠네. 자네를 진짜로 만들어주겠네.”

“나는 악마 따위의 말을…….”

성하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악마의 말. 믿을 수 없다. 단칼에 거절한다. 거절해야 하는데….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나? 그의 옆에 있으려면 진짜가 돼야 하네.”

“이미 진짜인 내가 오빠 옆에 있어.”

“빼앗아야지. 진짜가 된 가짜가 진짜의 자리를 빼앗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자네는 갚아줘야 할 게 있지 않나.”

“내가 진짜를….”

“그래. 자네라면 할 수 있네.”

성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악마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순간부터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도 알고 악마도 알고 있다.

“…대가는? 군단장이나 되는 악마가 대가도 없이 날 도울 리 없잖아.”

“하하. 악마에 대해 잘 아는군. 대가는 내 제안을 받아들인 후에 알게 될 걸세.”

“…….”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소중한 걸 대가로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게 가짜인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좋아. 오빠에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겠어. 내가 뭘 하면 돼?”

“신에게 소원을 빌게. 이 세상의 리소스를 달라고. 자네는 이 가짜 세계를 잡아먹는 거야.”

“리소스?”

“사라질 가짜 세계라고 해도 유지할 에너지가 필요하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정보, 리소스 하나, 하나가 전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그 막대한 에너지를 자네가 가지는 거네.”

성하리는 그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막대한 에너지를 흡수하라는 것.

“…그걸 내가 할 수 있어?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막대한 힘을 손에 넣어서 파멸하는 놈들을 여럿 봤어.”

“자네는 그것들과 다르네. 자네에겐 가능성이 있네. 가능성의 악마인 내가 보증하지.”

성하리가 이계의 신을 바라봤다.

“그게 네 소원인가?”

“…그래. 내 소원이야.”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 가짜 세상은 무너질 것이고, 그 모든 정보는 네가 가질 것이다.”

성하리는 느꼈다. 이 탑의 밖, 세상의 모든 것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가짜 세상을 이루던 모든 정보는 에너지가 되어 성하리에게 모여들었다.

바로 라플라스가 개입했다. 성하리에게 모여드는 에너지들을 관리했다. 다시 분류하고 가공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걸 감당할 수 있는 거야?”

“할 수 있네. 그러기 위한 연산장치도 아까 손에 넣었지. 아, 불청객께서 오셨군.”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불청객.

검을 쥔 성유진이 나타났다.

“오빠!!”

주저앉은 성하리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리야!”

성유진 또한 소리쳤다. 그가 성하리를 향해 내달렸다. 성하리도 움직이려는 찰나, 라플라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선순위를 헷갈리지 말게. 지금 자네가 해야 할 건 저자와 함께 하하 호호 웃는 게 아닐세. 진짜가 될 기회를 포기할 건가?”

가짜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저 가짜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성하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성유진은 달려오다가 뒤로 날아갔다. 라플라스가 힘을 쓴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딱!

라플라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성하리의 옆에 공간이 갈라졌다. 시커먼 공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게. 자네를 위한 둥지일세. 가짜가 진짜로 거듭나기 위한 둥지.”

“오빠는.”

“죽이지 않겠네. 맹세하지. 뭐, 지금 나로서는 죽일 수도 없네.”

“하리야!!”

성유진이 자신을 부른다. 성하리는 각오를 다졌다.

“오빠! 난 가짜가 아닌 진짜로서 오빠를 마주할 거야!”

성하리는 라플라스가 연 공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떨어지고 떨어지다가 멈췄다. 뜨겁고 끈적한 어둠이 그녀의 몸을 감싼다. 성하리는 막대한 에너지를 느꼈다. 정령왕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힘이 자신에게 스며들었다. 근본부터 바꾸고 있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어가는 느낌.

성하리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 •

“이 새끼가!! 하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성하리가 공간 속으로 사라진 직후, 나는 라플라스에게 달려갔다.

나를 튕겨내던 라플라스의 힘은 사라져 있었다. 너무도 싱겁게 라플라스의 목을 움켜쥐고 그 명치에 검을 겨누었다.

라플라스는 여유로웠다.

“운이 좋군. 탑과 밖의 시간이 달라서 다행일세. 자네가 더 빨리 왔다면 모든 일을 그르쳤겠지.”

“하리는 어디로 데려간 거냐! 대답해라!!”

“하하. 그녀가 죽거나 고통을 겪는 일은 아니니 진정하게. 아, 지금 나를 죽이면 그녀 또한 죽는다네. 그래도 나를 죽일 건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선 그냥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의 말이 진짜라면?

“그걸 믿고 저항하지 않는 거냐?”

“자네에게 저항할 힘이 없네. 지금 나는 이 세상의 정보 에너지를 분류하고 가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네. 그녀가 잘못되지 않으려면 내가 계속 가능성의 권능을 써줘야 하거든.”

“씹새끼가…!”

“진정하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이미 모든 조건은 갖춰졌으니 3시간이면 충분할 걸세.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며 수다라도 떨겠나? 세상이 무너지는 건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지.”

탑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탑 너머에서 보이는 건 무너지는 하늘이다. 잘게 부서진 하늘이 가루처럼 떨어지더니 사라진다.

나는 라플라스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퍽!

그의 얼굴이 엉망이 되어간다. 나는 분을 풀 듯이 계속 주먹을 휘둘렀다.

“그만하지. 그러다 진짜 죽을 수 있다. 그 악마가 죽는다면 그 여자도 죽는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옆에서 침묵하던 존재가 끼어들었다. 나는 인상을 구기며 그를 노려봤다.

“씨발. 넌 또 뭐야?”

“카르마의 천칭을 가진 자여, 나는 그대의 적이 아니다.”

“지랄!”

쿠사나기의 검을 휘두른다. 검날은 정확히 그의 목을 지나갔다. 허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허공을 베는 느낌이다.

“아직 업이 많이 부족하군. 충고하나 하지. 업을 계속 쌓아라. 업이야말로 너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이 새끼는 지 할 말 만 지껄이고 지랄이야!”

쿠사나기의 검을 계속 휘둘렀다.

소용없었다. 여전히 허공만 벤다. 스사노오의 힘을 담아도 의미 없었다.

“하하. 그는 이계의 신.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 중 한 명. 비록 가짜라고 하더라도 그딴 공격이 통하리라 보나?”

“아직 웃을 기운이 남아 있나?”

라플라스의 얼굴로 날아가던 주먹이 멈췄다. 라플라스의 꼴이 말이 아니다. 진짜 한 대 더 때렸다간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 성하리까지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라플라스의 헛소리를 들으며 악마 사냥꾼(S)의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악마 사냥꾼(S)이 군단장을 죽이기를 원합니다!』

‘닥쳐.’

3시간하고 20분이 흐른 뒤였다.

세상은 이미 무너졌다. 남은 것은 나와 라플라스, 이계의 신이 있는 이 공간뿐이었다. 이 공간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지이이이잉.

돌연 공간이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그 얼굴은 성하리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져 있었다. 복부와 팔다리 일부를 드러낸 검은색의 갑주를 입었고, 손에는 악마의 힘이 느껴지는 검은색 창을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 있었으며, 눈동자는 심홍을 머금은 것처럼 붉었다.

뚜벅뚜벅.

무표정한 그녀가 다가온다.

“하하하하하! 내 최고 걸작이 드디어 완성됐군! 새로운 여덟 번째 군단장이여! 네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마! 바알! 너는 최강의 악마가 될 것이다!”

푹.

성하리의 검은 창이 라플라스의 몸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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