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59화 (1,539/2,000)

푹.

성하리의 검은 창이 라플라스의 몸에 박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라플라스의 존재가 빠른 속도로 성하리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하! 바로 그거네! 나를 먹도록 하게, 바알이여! 나를 먹고 더 강해지는 걸세!”

“시끄러워.”

촥!

성하리가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간신히 생명의 끈을 잡고 있던 라플라스는 그 가벼운 동작에 죽음이 확정되었다. 라플라스의 존재는 성하리에게 빨려 들어가 흡수되었다.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건 마치 성하리가 정령을 흡수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녀의 고유 특성인 정령 포식자(S)는 오직 정령에게만 통하는 특성이니까.

“…하리야.”

“오빠.”

성하리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고요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악마 사냥꾼(S)이 눈앞의 악마를 죽이기를 원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악마 사냥꾼(S)은 악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악마 사냥꾼(S)은 당신이 맹세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닥쳐.’

악마고 나발이고 눈앞에 있는 건 성하리였다. 내가 직접 내 여자를 죽인다? 절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여자를 죽일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악마 사냥꾼(S) 특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제로 내 정신을 건드려 성하리를 공격하려는 낌새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절대정신의 효과로 인해 내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악마 사냥꾼(S)이 할 수 있는 건 내게 찡찡거리는 것뿐이었다.

“하리야. 돌아가자.”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던전 속 세상은 무너지고 있었다. 던전 밖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나와 성하리. 둘 다 살 수 있다. 지금의 성하리라면 나와 함께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

성하리는 내가 내민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오빠. 정말 같이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왜?!”

“이젠 난 악마니까. 평범한 악마도 아닌 군단장이야. 고위 악마가 함부로 중간계에 갈 수 없다는 건 오빠도 알잖아.”

“너는 악마이기 전에 성하리야! 제약만 감수하면 갈 수 있어! 네가 악마라도 정체를 숨기고 생활하면 돼! 같이 가자, 하리야!”

“나도 정말 그러고 싶어. 하지만 안 돼.”

“대체 왜?!”

“그게 악마와 한 계약의 대가니까. 지금의 난 성하리가 아니라 바알이야. 여덟 번째 군단장, 바알.”

『이름: 바알

근력: SSS+ 체력: SSS 민첩: SSS 내구: SSS 마나: SSS+

특성: 인드라의 섬뢰(SS)

스킬: 신창합일(S) 투창(S) 전투감각(S), 전투회복(A+), 역장(A), 악마화(S)

권능: 폭식의 권능(SSS), 가능성의 권능(SS-)

호감도: 92』

그녀의 상태창이 보였다. 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힘이 어마어마해서? 정령 포식자(S) 특성이 사라지고 폭식이란 권능이 생겨서? 모두 아니다. 상태창에 적힌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태창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녀의 근본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이니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성하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여자다.

“계약 따윈 무시하면 되잖아!”

“계약은 이미 내 안에 새겨져 있어. 지금 당장은 오빠랑 함께 할 수 없어. 하지만… 계약을 끝낸 뒤에는 달라. 약속할게. 그때는 내가 오빠 옆에 있을 거야.”

그녀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왼팔로 내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춰온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키스했다. 혀가 자연스럽게 섞였다가 떨어진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줘.”

“아니. 못 기다려!”

나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성하리가 입고 있는 갑옷 때문에 딱딱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놓아버리면 오랫동안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고마워, 오빠.”

성하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세상이 무너졌다.

그리고 우리는 무너진 세상에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품 안에 안고 있던 그녀는 꿈처럼 사라졌다. 손안에 남아 있는 작은 온기만이 그녀의 흔적이 되어주었다.

“이쪽으로 오라.”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렸다. 희한하게도 목소리가 말하는 방향이 어딘지 알았다. 나는 정면으로 걸어갔다.

‘이 목소리는 그놈이군. 이계의 신인가 뭔가 하는 놈.’

나는 놈을 쉽게 봤다. 어차피 던전 속 세계에 속한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쉽게 볼 놈이 결코 아니었다.

‘그놈. 이상하게 내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풍경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빛이 들어왔다. 반짝이는 작은 빛.

‘별빛이군. 여긴 우주인가.’

빛이 모여들며 한 무리를 이룬다. 은하.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봤나?’

다시 생각해봐도 무슨 이름의 은하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왔군.”

정면에 놈이 있었다.

빛인지, 어둠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형상.

“너… 아까 그놈이 맞나?”

“맞다. 허나 가짜 세상의 가짜가 아니라, 지금의 나는 진짜로서 너를 마주하고 있다.”

“이계의 신.”

“그렇게 부르더군.”

나는 그를 보며 긴장했다. 악마 군단장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힘을 가졌다.

“날 여기로 왜 부른 거지?”

“개인적인 흥미다.”

“천칭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인가?”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직접 너를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르마의 천징을 일개 인간이 가진 건 당연한 일이나… 우주 전체를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너의 존재다. 네겐 또 다른 업의 흔적이 느껴진다. 있을 수 없는 업의 흔적. 직접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믿을 수 없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놈의 흥미 때문에 여기로 왔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도 했지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더 짜증 났다.

“속 시원하게 말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러지. 혹시 너는 다른 세계에서 왔나?”

“갑자기 그런 결론이 나온다고?”

“알 수 없는 업의 흔적. 그 중 대부분을 내가 읽을 수 없으니… 다른 세게. 즉, 다른 우주의 흔적인 게 당연하지 않나.”

유희 생활 어플을 눈치챈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차분하다. 유희 생활 어플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제아무리 고귀한 신이라도 눈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게 무슨 짓을 할 거지?”

“우선 물어보겠지. 네가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뭔가 다르군. 신 같지가 않아.”

“나는 내가 신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이 우주를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 네가 날 신이라고 여긴다면, 네게는 내가 신이 되겠지.”

“나는 너한테 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다.”

“그런가.”

“……억지로 알아낼 생각은 없는 건가? 내 머리를 따서 정보를 알아낸다거나.”

“진실을 억지로 알아낼 필요는 없다. 진실이라고 해서 이로운 것만은 아니지. 특히 너와 관련된 진실은 위험할 것 같군.”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알려줄 수도 있다.”

“말해 봐라.”

“성하리를 인간으로 되돌려라.”

“악마가 된 여자를 말하는 건가. 네 부탁은 거절하지. 인과를 조작하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굳이 힘을 써가면서 진실을 알고 싶진 않군.”

“…….”

“이야기는 끝난 듯하니, 돌려보내 주지. 이제 인간에 대한 흥미는 없으니,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목소리에서부터 흥미를 잃은 티가 팍팍 났다.

이게 신인가.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고 느낀 순간 나는 던전 밖의 테라 인공지능이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테라 인공지능의 핵은 라플라스가 박살 낸 그 상태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힘이 쫘악 빠진다.

• • •

골치 아플거라 생각한 건 일의 뒤처리였다.

수백 명이 학살당했으니 일을 처리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의 뒤처리는 싱겁게 끝났다.

텐라이 나기사가 나서 준 것이다.

“스사노오의 곡옥의 힘을 받아 폭주를 일으켰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간이 신의 힘을 완벽히 제어하는 건 힘드니 말이다.”

텐라이 나기사가 말했다. 내가 벌인 학살은 신의 힘에 의한 폭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일본 히어로 협회는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피해가 너무 컸으니까.

“내 아들을 건들기만 해 봐.”

성하리는 무조건 나를 싸고돌았다. 내가 학살을 저질렀어도 나를 혼내기는 해도 외면하거나 버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스사노오의 힘에 취해 폭주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의 멘탈을 위해서라도 구태여 진실을 밝히진 않았다.

“그는 학살자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처벌받아야 합니다. 본래 사형이나, 협회가 그를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처벌을 끝내겠습니다.”

일본 히어로 협회의 주장이었다. 그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성하리가 날뛰기 전에 텐라이 나기사가 움직였다. 그녀는 카소 아카데미가, 죽은 하세가와 잇신이 협회와 손잡고 저지른 비리들을 언급했다. 가장 심각한 건 인체 실험이다. 카소 아카데미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인체 실험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 국제적인 비난은 물론이고 일본 내부에서도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관련된 일본 협회 고위직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텐라이 나기사를 공격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일본 최고의 히어로 중 한 명이니까.

결국 일본 협회는 이 일을 조용히 묻기로 했다.

아라시 아카데미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병실 신세를 졌다. 꾀병이었다.

‘텐라이 나기사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어. 여기서 내가 나서면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지.’

겸사겸사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텐라이 나기사가 들어왔다.

“얄미울 정도로 한가로워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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