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62화 (1,542/2,000)

“김치 통조림이 필요하다. 되도록 많이.”

“…….”

김 비서가 잠시 침묵했다. 100년 넘게 내 옆에서 일했던 그녀도 뜻밖의 말에 당황한 것이다.

“얼마 전에 강원도에서 생산을 시작한 김치 통조림 말입니까?”

“그래. 되도록 많이 필요하다.”

“관련자들에게 연락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 비서는 3분 만에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회장님! 대천 식품 사장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 외의 식품 계열 관련 임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현실보다 과학이 더 발달했다. 통신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 세계에서 통신기기가 먹통 되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하물며 임원들 전원의 통신기기가 먹통이다? 통신사가 돌아버린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

이놈들은 일부러 내 연락을 피하고 있다.

“…식품 계열이라. 정확히 무슨 일이지?”

대천 그룹에서 식품계열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인간의 삼대 욕구 중 하나가 먹는 것이고, 전 세계인들은 대천 그룹의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김 비서의 예측은?”

“…반란입니다. 회장님을 끌어내리기 위해 식품계열사들이 일제히 움직인 것 같습니다.”

“최악이군. 다른 계열사들은 어떻지?”

“일단 화학과 전자 쪽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지금 확인했습니다. 섬유와 유통 쪽은 먹통입니다. 식품과 연계한 것 같습니다. 미국과 중국 쪽이 비협조적입니다. 자동차 쪽에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갑자기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김 비서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좋은 말은 없었다. 동남아 쪽에서는 노동자 차별 문제가 터졌다. 호주에서는 동물보호단체가 지랄이다. 중동은 더 문제다. 테러 단체가 회사를 공격했다고 한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군.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 터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가끔 있는 일이다.

“김치 통조림은? 빅 스카이 타워에는 김치 통조림이 없나?”

“없습니다. 최근 대천 김치 통조림이 전 세계적인 유행이 되면서 미국과 유럽 쪽으로 먼저 공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도는 김치 통조림은 공장에 있는 것이 유일합니다.”

“쯧. 식품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당장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군. 근데 반란의 주동자는 누구지?”

“식품과 섬유, 유통, 외국 지부 관리는 성수운 부회장이 맡고 있습니다.”

“…….”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대천 그룹은 워낙 큰 기업이라 부회장이 5명이나 된다. 그리고 부회장 5명보다 김 비서가 권력이 강했다. 김 비서 위에는 당연히 그룹 총수인 내가 있다.

성수운.

그 이름을 반복해서 읊조려도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회장님의 2,225남입니다. 70년 전,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니말레이아와 낳은 자식입니다.”

“니말레이아…. 기억에 있는 여자다. 우아한 외모와 달리 입이 좀 거칠었었지. 그 여자와 낳은 자식이 있었나.”

“…30년 전에 회장님께서 직접 그를 부회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뭐,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군.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하나? 중요한 건 그 호로새끼가 감히 내게 반기를 들었다는 거지. 그 새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3개월 전 미국으로 출장했고, 3주 전 미대통령과 만난 걸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미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 회장님. 지금 막 성수운 부회장으로부터 화상 대화 요청이 왔습니다.”

“호로 새끼가 먼저 연락을? 뭐라 지껄이는지 궁금하군. 연결해.”

지이이이이잉!

바닥에서 최신 TV가 올라온다. 108인치에 두께는 무려 1.8센치.

뚝.

화면이 켜진다. 최신 TV 화면에 나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였다. 하얀 머리카락과 얼굴 곳곳에 핀 검버섯. 큰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얼굴 때문에 순간적으로 토악질이 나올 뻔했다.

“이런 씨발. 쌍욕이 나올 정도의 개좆같은 면상이군.”

노친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게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시는군요. 역시 당신에게 그 자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 때문에 죽은 이들만 수천만, 수억에 달합니다. 그런데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이 새끼가 갑자기 지랄이야. 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이라 불러라. 반란자 새끼.”

“…저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좋습니다. 회장님. 저도 당신을 아버지라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런 불효자 새끼. 네가 대천 그룹 부회장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모두 내 덕이다! 그걸 잊은 거냐?! 은혜도 모르는 새끼!”

“하. 그렇지요. 덕분에 많은 것을 손에 넣었습니다. 돈과 권력.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 오더군요. 하지만 이 중에 진짜 제 것은 없었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것이지요.”

“회장이 되고 싶다는 거냐?”

“대천 그룹은 너무 큽니다. 그리고 적이 많아도 너무 많지요. 대천 그룹은 운명이 다할 때가 왔습니다.”

TV에 새로운 작은 화면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대부분이 늙은이들이었다. 백인 늙은이, 흑인 늙은이, 동양인 늙은이. 다른 부회장들도 보였다. 한때 귀여워했던 딸들이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4명의 부회장들과 각국의 정상들입니다.”

스피커에서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용케도 오늘까지 준비했군.”

“아버지는 그룹 운영에 별 관심 없다는 걸 저희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아버지의 김 비서, 대모(大母)의 눈과 귀만 막으면 아버지에게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지요. 아버지는 항상 대모를 통해 그룹을 운영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회사는 전부 손에 넣지 못한 모양이군.”

“…그러고 싶었습니다만, 대모의 직속인 전자와 자동차, 기계, 감사 쪽은 손을 쓸 틈이 없더군요. 과연 대모이십니다. 아버지는 대모께 감사해야 합니다. 대모가 없었다면 대천 그룹은 진즉에 망했을 겁니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차분히 앉아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노려본다.

“강 대통령. 네가 거기에 있을 줄은 몰랐군. 얼마 전에 내 발밑에서 평생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위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세상에 초국가 기업은 필요 없습니다. 기업에 지배당하는 국가라니… 그건 말이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이미 칼을 빼 들었다. 혀를 찼다. 이래서는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방법밖에 없다.

금발의 미대통령을 쳐다봤다.

“게인 케이지 대통령. 기회를 주지. 당장 빌어먹을 패륜아를 잡아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럼 미국에 자비를 내려주지.”

“오, 지쟈쓰.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나? 헤이, 성유진. 네 하늘은 끝났어. 아무리 대천이라도 우리 모두를 감당할 수 없지. 포기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라. 그럼 여생만큼은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해주지. 언더스탠?”

“이 씨발 양키 새끼가…!”

내가 주먹을 꽉 쥐자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직 모르겠나? 대천 그룹은 찢어질 것이네.”

“도쿄 타워 테러의 배후에 당신이 있는 걸 우리 일본이 모를 줄 알았습니까?”

“중국인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마더 러시아의 자원을 약탈해간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주지.”

“미국은 다시 위대해진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고 빅 스카이 타워가 흔들린다.

나는 다시 균형을 잡아 쓰러지는 것을 면했으나, 타워는 폭음과 함께 계속 흔들리고 있다. 김비서가 다급히 말했다.

“회장님!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국군의 탱크와 전투기가 저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정했군. 용병들을 보내 견제해!”

화면 속의 성수운이 클클 웃는다.

“클클. 아버지. 뉴스는 보셨습니까? 모든 나라는 아버지를 범죄자로 지정했습니다. 전쟁 범죄, 테러리스트, 사기, 살인, 강간, 탈세…. 죄목만 해도 엄청나군요. 그리고 아버지가 국군에 대응하는 순간부터 국민들의 여론은 등을 돌렸습니다. 차라리 조용히 항복하시지 그랬습니까.”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우리 부회장은 당신을 회장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회장님이라 부르겠습니까? 이제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입니다.”

“다 늙은 새끼가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뒤질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조용히 있다 가면 안 되나? 돈이랑 권력도 줬잖아.”

“…제가 왜 이러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아버지는 제 아들을 죽였습니다! 청계천 악어들에게 제 아들을 던졌지요!!”

“내가?”

“김 비서, 대모님에게 추파를 던진 녀석의 잘못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녀석은 대모님에 대해 몰랐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까?!”

“내 여자에게 추파를 던져? 죽을 만했군.”

“이 개새끼야!! 넌 아버지라 칭할 자격이 없다!”

성수운이 분노를 터트렸다.

나도 짜증이 났다. 그냥 김치 통조림 몇 개 가지러 이 세계에 온 것뿐인데 이게 뭔 개지랄인가.

“회장님! 전투기가 최상층으로 날아갑니다!”

김 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창을 통해 이쪽으로 날아오는 전투기 한 대가 보인다. 미사일을 쏘지 않고 타워 최상층 옆을 지나쳤다. 그 여파에 창문이 거칠게 흔들리고 귀가 아팠다.

“미사일을 쏘지 않는다라…. 아하. 날 죽이려는 건 아니군. 왜지?”

“회장님의 비밀 재산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김 비서. 지금 어디에 있지?”

“엘리베이터 안입니다! 최상층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래. 빨리 와라.”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칼을 손에 쥐었다. 이 세계의 최신 기술로 만든 슈퍼 블레이드. 칼을 쥐자 온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마침 저 멀리서 선회한 전투기가 날아온다. 슈퍼 블레이드가 전기를 머금는다. 내부의 작은 코어가 전기를 먹으며 레이저 칼날을 생성한다. 칼날은 순식간에 30M 이상 길어졌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타이밍을 잡아 칼을 휘두른다. 레이저 칼날이 전투기의 조종석을 베었다. 전투기는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더니 지상으로 추락해 꼴데 타워에 처박혀 폭발했다.

침묵.

내게 비난을 퍼붓던 각국의 대표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경악했다.

“서 대통령. 경고하지. 국군을 돌려보내라.”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좋다. 죽여주마. 미대통령 게인. 네게 진짜 마지막 기회를 주마. 상황을 정리하고 반란자 새끼를 내 앞으로 데려와라.”

“오, 갓!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셨나?! 너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

“전염병.”

갑작스레 내뱉어진 말에 그들이 나를 주시했다.

“전염병으로 다 뒤지기 싫으면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언제든지 전 세계에 전염병을 퍼뜨릴 수 있다. 내 비장의 카드지. 설마 내가 이럴 때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나?”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