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 화면 속에 있는 수십 명의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초고화질 TV는 그들의 세세한 변화를 잡아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허, 허세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것은 굳게 닫혀있는 성문을 열어젖힌 것과 다름없었다. 성문이 열리니 다른 이들도 우르르 달려간다.
“맞아! 허세다!”
“페이크다!”
“다우트다! 다우트!”
“여러분! 저건 허장성세가 확실합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나, 대천 그룹의 부회장! 성수운의 이름을 걸고 말하겠습니다! 전염병은 없습니다!!!”
성수운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동요하던 각국의 수장들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최고급 의자에 앉은 흰 머리 노파가 먹잇감에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말문을 열었다.
“대천 그룹의 부회장 성소미입니다. 바이오 제약, 바이오 화장품, 바이오 드러그…. 모두 제가 담당하는 계열입니다. 전염병도 당연히 제 소관이지요. 현재 제작 중인 전염병은 있으나 제가 통제 가능합니다.”
“웨잇! 전염병이 진짜 있다고?!”
미대통령 게인이 양손으로 뺨을 잡으며 기겁했다. 크리스마스에 홀로 집에 버려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도 알고 있었다. 50년 전, 갑자기 들이닥친 전염병에 미국을 크게 앓았다. 경제는 휘청였고, 감염당한 미국인들은 죽어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흑사병 정도는 아니었으나 미국의 트라우마가 되기엔 충분했다.
내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전염병. 내가 만들어서 살포했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애새끼들 코 묻은 돈을 뜯어내기 위한 감기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치사율은 1%도 안 됩니다.”
“오마갓! 전염병이 있다는 거잖아!”
“전염병의 백신과 치료제는 모두 준비되어있습니다! 전염병이 퍼지더라도 바로 제압할 수 있어요! 감기 수준의 전염병이라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세요!”
“감기 수준인 거 확실합니까?!”
“말하면 좀 믿으세요! 무엇보다 전염병은 모두 제가 완벽히 컨트롤하고 있습니다! 남극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제어되고 있죠! 전염병이 퍼질 일은 없습니다!”
나는 성소미를 쳐다봤다. 성소미라는 이름은 기억에 있었다. 슈퍼 모델인 여자와 나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다.
2,791녀. 한때 그 빛나는 외모로 내 총애받았던 딸이었다.
“소미야. 네가 감히 내게 반기를 드느냐? 내 너를 어여삐 여겼거늘!”
“제가 젊었을 때야 그랬죠. 하지만 제가 늙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았죠.”
“시들어버린 꽃을 찾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래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네가 부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이다. 그걸 잊었느냐?!”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같은 젊음과 영생을 원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주지 않으셨죠! 지금에 와서 불로를 누리는 건 아버지와 김 비서가 전부!”
나는 성소미가 노리는 게 뭔지 알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명의 구슬.
인간이 먹으면 초인적인 힘과 불로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뱀파이어가 얻으면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이 세계의 영약.
“생명의 구슬은 이제 얻을 수 없다!”
“알아요. 하지만 불로의 실마리는 아버지와 김 비서가 가지고 있죠!”
“이, 불효막심한 년! 감히 아비와 어미의 몸을 실험하려 하는가!”
“젊음과 영생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한 짓도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각국의 수장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빛이 대답을 말했다.
‘이놈들이 노리는 건 내가 가진 재산뿐만이 아니었군.’
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이 세상에 군림하는 걸 봤다. 저들이 성인이 되고 늙어갈 때도 나는 조금도 늙지 않으며 돈과 권력을 휘둘렀다. 부러울 수밖에 없다. 내 아들과 딸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더 심할 것이다.
“마지막 경고다.”
나는 살기를 담아 말했다. 심약한 이들은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나마 무표정하게 버티는 건 내 피를 이은 자식놈들과 선진국 수장들 정도다.
“항복하고 모든 사태를 수습해라. 내가 전염병을 퍼뜨리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갈 것이다.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 내겐 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있다!”
“오우 맨! 페이크는 이제 안 통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쓰러뜨리고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강 대통령이 엄숙히 선언했다. 그에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며 동조한다.
저들의 박수 소리는 날 향한 조소였으며 조롱이었다.
내 얼굴은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주체할 수 없는 짜증과 분노가 치솟는다.
“나, 대천 그룹의 회장이 이 하늘만큼이나 높고 넓은 관대한 마음으로 자비를 내렸거늘…. 그걸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나를 조롱해? 네놈들은 기군망상을 저질렀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기군만상?!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후회는 아버지가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업보입니다! 달게 받으십쇼!”
“성수운! 네이노오오옴!”
분노한 나는 슈퍼블레이드로 TV를 베어 갈랐다. 한 번 벤 것만으로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쓱쓱쓱!
108인치 TV를 수백 조각으로 만든 뒤에야 내 팔이 멈췄다. 조금이지만 분노가 풀렸다.
“후우.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낸다. 물론 평범한 카드는 아니었다. 신용 카드도 아니다.
[전염병 제조 카드
원하는 전염병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제조된 전염병은 30일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가격: 600,000 포인트
※주의
30일이 지나더라도 전염병에 걸린 상태는 해제되지 않습니다.]
무려 60만 포인트짜리 물건이었다.
“전염병은 내 손에 있다. 버러지들. 하늘을 분노케 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전염병을 만들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떤 전염병을 만들어야 하지?’
치사성 100%, 전염성 100%의 끝내주게 위험한 전염병을 만들었다고 쳐보자. 문제는 이 전염병에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거다.
‘완전 백신! 완전 백신을 쓰면 전염병에서 무사해. 하지만 나 혼자 무사하다고 될 게 아니잖아?’
이 세상에 살아남은 최후의 1인. 그딴 타이틀을 가져서 뭐 하겠는가. 나는 초국가적 기업인 대천 그룹의 회장으로서 군림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러니 적당히 죽여야 한다.
‘흐으으으음.’
고민이 깊어진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김 비서가 뛰어왔다.
“회장님!”
검은색 긴 생머리,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 치마, G컵의 풍만한 가슴. 딱 내 취향의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특수 개조한 권총을 들고 있었다.
콰아앙! 쾅! 콰콰쾅!
타워가 흔들린다. 화상 대화가 끝나고 국군의 공격이 더 거세졌다.
“김 비서. 오늘도 아름답군.”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빅 스카이 타워를 벗어나야 합니다!”
“빅 스카이 타워는 대한민국 최고의 요새다. 굳이 여길 벗어날 필요가 있나?”
“무도한 테러리스트 따위가 상대라면 몰라도… 지금 빅 스카이 타워로 진격하고 있는 건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거기에 수도방위사령부의 필승 기갑부대가 출격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빅 스카이 티워라도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야 할 곳이 있긴 하나?”
“강원도 전자 공장으로 가야 합니다. 전국에 있는 대천 그룹의 사병들 모두 강원도 전자 공장으로 모일 것입니다. 모두가 모이면 역전의 기회가 생깁니다!”
나는 김 비서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알고 있는 평소의 김 비서와 달랐다. 이지적인 그녀는 항상 차가우면서도 여유롭게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여유는 조금도 없다.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김 비서. 우리에게 승산은 얼마나 있는 거지?”
“그게….”
“솔직히 말해도 된다.”
“전자와 화학, 한국 보안 쪽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가 등을 돌렸습니다. 부회장들 모두가 손을 잡은 게 큽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부회장의 권력을 다섯으로 나눈 건데….”
“하필이면 그 다섯이 전부 작당했지. 전자와 화학은 네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보안원들은 의외로 등을 돌리지 않았군.”
“저번에 회장님의 명령으로 보안 쪽은 전원 초소형 폭탄을 심었습니다. 폭탄 스위치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흠. 그랬었나. 정확한 승산은?”
“3%… 미만입니다. 한국이 국군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회장님을 범죄자로 지목했습니다. 수배까지 떨어졌습니다.”
“수배? 현상금도 붙었겠군.”
“생포 시 2조 원입니다. 제게도 1조 원의 현상금이 붙었습니다.”
“놈들은 우리의 몸을 노리고 있다. 젊음과 영생의 비밀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는 거지.”
“회장님.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동남아 쪽으로 도망쳐 숨으며 저들도 찾지 못할 겁니다.”
나는 김 비서의 뺨을 쓰다듬었다.
“김 비서.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회장님과 함께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후후. 그 일편단심. 내가 김 비서를 사랑하는 이유지.”
나는 김 비서의 입에 입을 맞췄다.
“으응…. 회장님. 지금은 이럴 때가… 아….”
이럴 때 하는 키스일수록 더 달콤한 법이다. 하지만 딱 키스랑 가슴을 주무르는 것까지만이다. 이 이상 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김 비서. 강원도로 가지. 식품 쪽으로 간다. 우선 김치 통조림부터 손에 넣어야 한다.”
“아, 예. 알겠습니다. 지하 5층으로 내려가시지요. 회장님 전용 전투무장장갑차, 더블 드래곤 트레인이 대기 중입니다.”
나와 김 비서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5층으로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그러나 지하 5층까지 내려가기까지 못해도 5분 이상은 걸린다. 빅 스카이 타워 정상의 높이는 무려 2km가 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며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이 불타고 있었다. 탱크에 달린 포신이 불을 뿜고, 전투 헬기가 미사일을 쏘아낸다.
“개판이군.”
“…대통령이 아주 큰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이러면 본인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책임은 전 세계가 져야 할 거다.”
“하지만 저희에게 남은 건….”
“전염병.”
“…아까 그들에게 한 말은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까?”
“김 비서. 나를 뭐로 보나. 전염병은 허세가 아니다. 세계를 뒤덮을 전염병… 그게 내 손에 있다. 될 수 있으면 쓰고 싶지 않다만…. 세계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