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입니다.”
김 비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확신이 가득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이건 함정이다. 너무 노골적이라 헛웃음이 나온다.
“성수운은 철두철미한 놈입니다. 분명 도쿄에 회장님을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해놓았을 겁니다.”
“너무 노골적이라 함정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정도지. 뭐, 함정이겠지만.”
“KOREA의 핵미사일을 발사해 도쿄를 쓸어버리시지요. 적들의 농간에 놀아날 필요는 없습니다.”
“안 돼. 내가 왜 지존 성유진 병을 퍼뜨렸는데. 도쿄에 있는 노동력을 잃을 수 없다.”
나는 파멸이 아닌 지배를 원한다. 그리고 핵미사일을 쓸 경우 다른 국가들 또한 핵미사일을 쓸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에서 시작하는 건 사양이다.
“도쿄로 간다. 가서 패륜아 새끼의 모가지를 딴다. 그 후에 각국 수장들을 죽이고 충성심 있는 놈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
“……성수운이 그들의 최후의 발악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이 왔다. 이게 마지막이다. 유희 생활로 단련된 내 직감은 상당히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은 성수운이다. 놈만 죽이면 된다.”
“성수운은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을 뿐이지.”
나는 씩 웃으며 슈퍼 블레이드를 허리춤에 장비했다.
패륜아 새끼가 뱀파이어 진조가 됐다. 조금 젊어지고 초능력이 생겼다.
‘그래봤자 뉴비일 뿐이지. 뱀파이어가 되면 없던 전투 경험이 생기는 줄 아나?’
무엇보다 이 세계의 뱀파이어 능력은 고만고만했다. 현실 시간으로 몇 년 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내겐 뱀파이어 진조는 잡몹 수준에 불과했다.
“후우. 말려도 듣지 않으시겠군요. 그럼 하다못해 병사들을 데려가십시오.”
“됐다. 병사들은 널 지켜야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내 안위가 아니라 김 비서의 안위다. 나를 끌어들이고 김 비서를 붙잡는다. 같은 전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비는 되어 있다. 김 비서는 나와 함께 오래 살아온 만큼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전투력만 따지면 어지간한 병사들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그녀에겐 비상용으로 쓰라고 공간 이동 주문서를 다발로 건네줬다.
“일이 끝난 뒤에 축제를 열자고.”
“축제? 어떤 축제 말입니까?”
“우리 둘만의 축제 말이야.”
“회장님….”
딱딱하던 김 비서의 얼굴이 풀어진다. 내가 양팔을 벌리자 김 비서는 나비처럼 우아하게 내 품 안으로 안겼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김 비서의 등과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좋은 냄새와 좋은 감촉이다.
우리의 입술은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이끌려 딱 붙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빨아대면서 생각했다.
‘축제도 예행연습이 필요하지. 도쿄는 내일 가야겠다.’
나는 김 비서의 정장을 벗기며 침대로 향했다.
• • •
다음 문제는 일본 도쿄로 가는 방식이었다.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어느 쪽이든 끌리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에서 습격당할 가능성은 둘째치고… 타고 가는 시간이 귀찮아.’
내겐 다행히도 일본 도쿄 좌표가 찍혀 있는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었다.
찌이이익!
일본 도쿄 주택가에 도착했다.
주택가는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교토에 거대한 구름버섯이 피었는데도 여긴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조용하다.
그리고 난 이 평화로운 주택가를 보며 잠깐 추억에 잠겼다.
‘옛날 생각나네. 유희 생활 어플을 막 각성했을 때지. 그때 그 유부녀의 집이 딱 저랬는데…. 음. 한 번 들어가 볼까.’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힘을 살짝 주자 문고리가 박살 나며 현관문이 열렸다. 신발을 보니 안에 여자가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청소하던 여자가 날 보며 비명을 지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돌아서 현관문을 나섰다.
‘웬 독두꺼비 같은 아줌마가….’
야동과 현실은 달랐다. 여기가 야동 세계였다면 예쁜 얼굴에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미시가 나를 반겨줬을 것이다.
주택가를 걷던 나는 멈칫했다. 주택과 주택 사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골목길에 머리가 터진 시체가 있었다.
‘지존 성유진 병이군.’
지존 성유진 병.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은 전염병.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지존 성유진’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전염병 제조 카드의 힘이겠지.
주택가를 빠져나온 나는 신호 대기하는 차량으로 걸어갔다. 대천 그룹이 만든 서민용 자동차.
‘나쁘지 않군.’
쨍그랑!
주먹으로 운전석 창문을 박살 냈다.
“히이이이익?! 회장?! 회장?! 난데?!”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경악한다. 나는 그가 시트에 실금하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 차는 대천 그룹에서 만든 것. 즉, 회장인 내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차는 내가 써야지. 오줌싸개는 집으로 꺼져라. 노모의 축 늘어진 쭈쭈나 빨아라.”
“히에에에에에에엑!”
운전대를 잡자마자 액셀을 밟는다. 제로백 4초. 서민용이라 어쩔 수 없다. 계기판은 순식간에 올라가 시속 300km에 달했다.
“이제야 좀 운전할 맛이 나는군.”
정주행은 너무 시시했기에 역주행을 시작했다. 시속 300km의 역주행. 일반인에겐 자살 그 자체지만, 내겐 달랐다.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이용해 무사히 질주한다. 내 질주에 놀란 자동차들이 핸들을 돌리며 여기저기 처박았다. 내가 지나간 도로에선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이, 이 자식! 성유….”
운전자 중에는 나를 보고 기함하다 머리가 펑 터져 죽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라디오에서 긴급 방송이 울렸다.
-지금 최악의 범죄자 성유진이 도쿄 도로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도쿄 시민 여러분은 도로에 나오지 말고 건물 안으로 대피하십시오! 성유진을 적대하지 마십시오! 성유진은 폭풍입니다!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이며 지나갈 것입니다. 절대로 성유진을 적대… 펑!
작은 폭음과 함께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전해져온다.
‘적대감을 품지 말라고 하다가 내게 적대감을 품은 건가?’
뭐,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사람 감정이란 게 100%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자기도 모르게 나를 적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라디오를 듣는 일본인 중에서도 머리가 터진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꺄아아아아아아가!”
“성유진이다!!!”
“도망쳐!!”
역주행하는 차를 보자마자 일본인들은 혼비백산 도망쳤다. 도망치는 일본인 중 몇 명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전염병 성능 확실하군.’
NEW 도쿄 타워가 가까워진다. 이전에 내가 터트렸던 도쿄 타워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허나 기존의 도쿄 타워에 비하면 뭔가가 부족하다. 기품이 없다고 해야 하나.
‘또 날려줘야지. 이번에는 어떻게 복원하려나? NEW NEW 도쿄타워의 모습이 궁금해지는군.’
쿠웅!
보닛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군복을 입었으나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용병이라고 하기엔 몸에 걸치고 있는 장비들이 뛰어났다. 얼굴을 가리는 헬멧도 최신이다.
‘군복도 좀 이상하군. 구속복과 군복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시속 300km로 달리는데도 놈은 떨어지지 않는다. 양팔로 차의 윗부분을 잡고 버티고 있다.
‘외골격 슈트도 없이 버틴다라…. 이 세계에 초인은 나랑 김 비서밖에 없다. 뱀파이어로군.’
근데 차 앞에 매달린 놈이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야를 가려서 질주를 막을 속셈도 없는 것 같다.
그때, 놈의 헬멧이 열린다. 현대 기술이 들어간 헬멧은 제법 까리했다.
얼굴은 서양인이었다. 피부는 창백했고, 콧대는 드높았다. 신경 쓰이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목에 찬 금속 목걸이.
‘딱 봐도 폭탄 목걸이군.’
다른 하나는 놈의 눈깔.
작은 원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는 눈깔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진다. 인간의 눈깔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금속 눈깔도 아니었다.
“쇼 미!”
뱀파이어가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봤다. 그의 눈깔이 기괴하게 움직인다. 눈동자 안에 있는 원들이 일제히 회전한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이 무슨 짓을 버리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최면 비슷한 능력을 가진 거겠지.’
성가신 능력이지만 내겐 통하진 않는다.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자동차 유리를 박살 내고 놈의 목을 틀어쥔다.
“끄윽!”
놈이 주먹으로 내 팔을 퍽퍽 때린다. 이게 뱀파이어 진조의 힘? 헛웃음이 나온다.
“가렵지도 않다. 내 손을 떨쳐내려면 이보다 몇 배는 더 강해야지.”
손아귀에 힘을 주는 대신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지직!
시퍼런 전류는 뱀파이어의 몸속으로 흘려들어 갔다. 신경을 태우고 근육을 찢는다. 놈은 역겨운 눈동자가 위로 올라간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화르르륵!
마침내 그 몸에 불이 붙었다. 나는 불타는 시체를 자동차 옆으로 내던졌다. 자동차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도쿄 타워로 직진한다.
도쿄 타워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제 화상 통화로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듯한 모습의 정수운이었다.
“볼 때마다 젊어졌군. 영생의 비법이라도 찾아낸 건가.”
자동차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이대로 패륜아 새끼를 들이받을 생각이었다.
그때, 앞바퀴가 위로 떠 오른다. 핸들을 아무리 돌려도 소용없었다. 차는 내 제어에서 벗어났다.
‘…바람인가? 자연적인 바람은 절대 아니고. 저놈이 바람을 조종하는 능력은 얻은 건가?’
뒷바퀴까지 위로 떠 오른다. 이대로는 도쿄 타워에 처박고 자동차와 함께 짜부될 것이다. 나는 차 문을 열고 긴급 탈출했다.
광학미채 천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던 적들이 총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제히 내게 총알을 쏜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쏟아진 금속 탄환들이 일제히 공중에 멈춘다. 나는 그대로 탄환을 반사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앞서 금속이 한 지점으로 뭉치더니 액체가 되어 나를 덮쳤다.
이것 또한 초능력이다.
‘이 새끼들… 이제보니 그냥 병사가 아니라 전부 뱀파이어로군.’
그것도 전원 진조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