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던 지면이 녹아내리듯 흘러내렸다. 그리고 강한 접착제처럼 내 발을 붙잡는다.
주위에 보라색 연기가 스멀스멀 나타났다. 독연기였다. 깨닫자마자 바로 호흡을 멈췄다.
염동력인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압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온이 올라가고 갑자기 손에서 피가 흐른다.
‘뱀파이어들의 초능력이군.’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초능력 하나, 하나의 힘은 약해도 수십 개가 동시에 발현되니 상당히 강하다.
서걱!
뱀파이어 진조 하나를 베어 죽였다. 놈은 죽는 그 순간까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으며 무표정했다. 죽음을 죽음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여기 있는 뱀파이어는 모두 성수운 한 사람이다. 저 뱀파이어 하나가 성수운에겐 손가락 하나인 셈이다.
‘어쩌면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나는 싸우면서도 김 비서를 주시했다. 지금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김 비서의 안위였다. 김 비서가 살해당하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똑똑한 김 비서는 날 돕는 걸 선택하기보다는 거리를 벌려 전투에서 멀어졌다.
다행히 성수운은 김 비서에게 관심 없어 보였다. 나를 죽이면 김 비서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까앙!
휘두르던 슈퍼 블레이드가 뱀파이어의 몸을 가르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뱀파이어의 몸은 광석처럼 변해 있었다. 무슨 광석인지 몰라도 레이저 칼날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곳도 단단하나 보자.”
다시 한번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어째 칼이 가벼워졌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니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 쪽 난 칼신이 보인다.
슈퍼 블레이드는 내구도 보다는 레이저 칼날에 의한 절삭력에 의존하는 칼이었다. 설마 이 세상에서 레이저 칼날로 베지 못할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크크크. 이제 그 잘난 칼도 없군?”
눈앞의 뱀파이어가 재수 없게 웃는다. 나 또한 마주 보며 웃어줬다.
“크크. 아직도 내 능력을 모르냐?”
뭐, 모를 수도 있었다. 이 세계의 나는 직접 나서서 전투하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내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건 김 비서뿐이다.
‘스톰 브레이커.’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창이 그대로 뱀파이어의 머리에 내려찍는다. 슈퍼 블레이드로는 흠집조차 줄 수 없었던 뱀파이어의 몸이 산산이 조각났다.
‘와라.’
바닥에 꽂힌 스톰 브레이커에 손을 뻗는다. 스톰 브레이커는 조각조각 분해되었다. 수십만 개의 금속 조각들은 내게 날아와 다시 조립되기 시작했다.
눈까지 가리는 완전 전신 갑옷을 입었으나, 몸은 훨씬 가벼웠다. 호흡도 편해졌다. 스톰 브레이커가 내 몸을 압박하던 초능력을 차단해준 덕분이다.
‘화련비도.’
허공에 나타난 붉은 칼을 움켜쥔다. 칼은 그대로 스톰 브레이커에 스며들었다. 스톰 브레이커와 융합한 것이다.
파지지직.
전신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손바닥을 펼친다. 손 위로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스톰 브레이커의 분신 능력이다.
나는 검을 꽉 쥐고 앞으로 내달렸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3]
뱀파이어들을 향한 질주.
적들은 당황했다. 설마 내가 적진 한복판으로 달려갈 줄은 몰랐을 테니까. 곧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수십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데도 군더더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은 모두 한 명이니까.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2]
나는 놈들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그 중심에 들이닥쳤다. 뇌전을 머금은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뱀파이어들을 훑었다. 적뢰에 감전당한 그들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뱀파이어는 계속 나타났다.
“아직이다.”
“겨우 그 정도로 끝날 것 같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내 주위에 자리 잡은 수십 마리의 뱀파이어가 초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날 공격한다. 그중 일부는 육체를 강화하고 돌격했다. 물론 스톰 브레이커를 보호 받는 내게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그래도 데미지는 쌓이고 있다.’
스톰 브레이커는 단단하다. 그러나 스톰 브레이커 속에 있는 나는 그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체력이 소모되고, 공격할 때마다 마나가 줄어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리가 멀어진다. 적인 성수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서걱!
내 등을 노리던 뱀파이어 하나를 벤다. 단번에 베었으나 손맛이 별로였다. 칼이 무뎌진 건 아니다. 잡념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기술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됐어.’
잡념을 지운다.
‘보이는 대로 죽이면 돼. 그럼 죽겠지.’
무념무상.
보이는 적들을 죽여갔다.
들리는 것은 피가 쏟아지는 소리와 뇌전이 튀는 소리, 시체가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에 뱀파이어 시체가 널려있는 걸 확인했다. 직후, 온몸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근육을 한계까지 혹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놀랍군. 강한 줄은 알았으나, 설마 이 정도 일 줄이야.”
고개를 위로 올렸다.
공중에 총 12명의 뱀파이어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가볍게 처죽인 뱀파이어 진조들과 달랐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무겁다.
‘끝없이 나타나던 뱀파이어 진조가 없다.’
대충 감이 왔다.
“수십 마리의 동족을 먹은 건가?”
“동족은 무슨. 자기 자신을 먹었다는 게 맞는 말이지.”
“예전에 폭주했던 놈이 간땡이도 크군.”
“그 폭주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놈들을 향해 뻗는다. 손 앞에 붉은 뇌전이 모이더니 시계 방향을 회전했다.
뇌천류(雷天流) 만뢰(卍雷).
번개가 뱀파이어에게 쏘아진다. 하늘을 거스르듯 올라가던 번개는 갑자기 휘어지더니 지상에 처박혔다.
공간 왜곡.
그것도 꽤 수준 높은 공간 조작이다. 전 세계에 있는 뱀파이어를 어떻게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겠다.
‘평범한 진조의 능력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동족을 최소 100마리 이상 잡아먹었겠지.’
다른 11마리도 범상치 않다. 지금 몸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까드드득!
몸에 압력이 가해진다. 중력이다. 중력이 갑자기 강력해졌다. 나는 최대한 버티려고 했으나 점점 강해지는 중력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세상은 끝이다. 세상의 주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종지부는 내 손에 찍힌다.”
뱀파이어 하나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들려있었다.
“크아악!”
갑자기 고통을 느껴져 신음을 흘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갑옷을 뚫고 내 몸 안으로 침투했다.
‘영체 비슷한 건가? 근육을 헤집고 있군.’
고통이 범상치 않다. 분근착골에 버금가는 고통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 좆같은 기운을 떨쳐내고 싶었다.
“크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도 뱀파이어는 계속해서 내려왔다.
“그 머리를 잘라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산에 전시하겠다.”
성수운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진다. 최소 3가지 이상의 초능력이 저 검을 유지하고 있다.
검이 떨어진다.
나는 그 순간 움직였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완전 회복으로 기력을 회복한다.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천심으로 내 몸을 압박하는 것들을 떨쳐낸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최고의 재능이 몸에 깃든다. 감각이 넓어지고 사고 속도가 가속한다. 몸에서 날뛰는 기운을 완벽하게 제어한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
뇌천류(雷天流) 극기(極技) 천광(天光)
한 줄기의 빛이 되어 눈앞의 뱀파이어를 베고 위로 올라갔다. 성수운은 아직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찰나가 끝났는데도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렸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허공에 발판을 생산하고 강제로 방향을 바꾼다. 빛이 반사되듯 앞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는 아직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뱀파이어가 있었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방향을 바꿔 뱀파이어를 죽인다.
전부 죽이고 싶었으나, 도중에 힘이 떨어져 10마리밖에 죽이지 못했다. 온몸을 덮치는 탈력감을 느끼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이런 미친!”
성수운이 경악한다. 나는 남은 두 마리를 죽이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0]
정면으로 도약해 뱀파이어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 가슴에 칼을 쑤셔 박았다. 뱀파이어가 피를 토하며 죽는다.
‘나머지 하나.’
고개를 획 돌려 놈을 노려본다. 놈이 초능력을 사용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곳에서 김 비서가 나와 붙잡혔다. 놈의 손톱이 김 비서의 목을 겨눈다. 김 비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성유진!”
“…공간 능력자가 둘이었나.”
혀를 찼다. 공간 능력자를 우선적으로 죽였는데 설마 마지막에 남은 놈들 중 하나가 똑같은 공간 능력자일 줄이야.
“나는 혼자 죽지 않는다. 네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대모를 죽이겠다.”
“어쩌자는 거냐? 그대로 도망치려고?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이미 세상은 끝났는데 어딜 도망친다는 거냐. 우선 그 망할 갑옷부터 벗어라.”
스톰 브레이커가 벗겨진다. 스톰브레이커는 창의 형태가 되어 내 옆으로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천재의 시간이 끝났다. 안 좋았다. 찰나도 전부 사용했고, 아직 유지 중인 천심은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인트를 써서 찰나의 쿨타임을 초기화하면….’
성수운이 비릿하게 웃는다.
“원래 이런 추잡한 짓거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별 효과도 없을 줄 알았지. 근데 네놈의 그 얼굴을 보니 썩 나쁘지 않군. 이 여자가 그렇게 특별했나? 자살…. 아니지. 그리 쉽게 보낼 줄 순 없지. 우선 스스로의 다리부터 잘라라.”
탕!
총성이 울렸다.
김 비서가 권총을 자신의 복부에 겨누고 쏜 것이다. 총알이 그녀의 복부와 뱀파이어를 관통했다. 뱀파이어가 비틀거리고 김 비서가 앞으로 쓰러진다. 그 과정에서 놈의 손톱이 김 비서의 목을 긁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뛰어갔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주먹으로 놈의 머리를 박살 냈다. 나는 놈의 시체에 시선도 주지 않고 김 비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