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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780화 (1,560/2,000)

죽은 게인의 시체는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나 땅바닥에 패인 땅이라던가 전투의 흔적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일단 못했던 복수를 완수했으니 만족스럽군.’

복수는 허무하다. 라는 말이 개소리란 게 또 증명되었다.

‘놈을 죽이면서 소모된 포인트가 아깝긴 해.’

운명 1,000 포인트, 24시간 소환 비용 65 포인트. 운명을 실험 삼아 사용한 거긴 해도 아까웠다.

‘유성검의 위력은 확인했고, 시간 가속도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돌아가 볼까.’

던전 밖으로 나가려는 내 발걸음은 경쾌했다.

[뱀파이어 형사]가 엔딩나고서 유희 슬롯이 하나 비었다. 새로운 유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떤 유희 세계로 들어가 볼까. 이거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네.’

그동안 꾸준히 본 창작물 덕분에 선택지는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고르는 것도 한 세월이다.

희희낙락하며 들판을 걸어갈 때였다. 눈앞에 30마리가 넘는 정령 오크가 모여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너무 들떠 있어서 주의력이 떨어져 있었다. 방심했다고 보면 된다.

이 던전의 이름은 정령 오크 군단이다. 정령 오크들이 군대처럼 무리 지어 행동한다는 거다.

‘내가 안일했던 건 맞지만, 솔직히 난 안일해도 상관없어.’

정령 오크들이 몰려 있더라도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던전을 나가기 전에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생겼으니 오히려 잘 됐군.’

보통 헌터들은 오크 무리를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정령 오크의 특징 중 하나가 뭉쳐있을 때 시너지 효과가 더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힘의 차이 앞에서 그딴 거 아무 상관 없다.

‘유성검.’

유성검의 크기를 키우지 않는다. 내구성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집중한 것은 유성검의 수를 최대한 늘리는 것.

마나가 대량으로 빠져나간다. 동시에 하늘에 유성검 72자루가 나타났다. 무리를 한다면 100자루까지 가능할 것 같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여력은 남겨둬야 했다.

‘72자루만으로도 충분히 오버킬이지.’

정령 오크 무리가 돌진을 준비한다. 정령의 힘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불, 물, 얼음, 바위 등등 농도 짙은 자연의 힘에 숨이 막힌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저 힘이 내게 닿기 전에, 내 힘이 먼저 놈들에게 닿을 테니까.

의지로 붙잡고 있던 유성검들을 놓는다. 총을 격발하듯 뇌기를 품은 72자루의 유성검이 일제히 지상으로 떨어진다.

콰콰콰콰콰쾅!

충격파와 함께 뇌전의 폭풍이 정령 오크 무리를 뒤덮는다. 정령 오크 무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유성검이 떨어지고 대부분이 즉사했고, 운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은 휘몰아치는 뇌전에 목숨을 잃었다.

정령 오크 무리가 있던 장소는 초토화되었다. 움푹 파인 땅에 유성검들이 묘비처럼 꽂혀 있고, 지면에는 시퍼런 뇌전이 잔류한 상태로 천천히 사라진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조각난 육편들이 전류에 의해 바삭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낙하한 유성검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런 마석도 박살 났군.’

짧게 혀를 찼다. 정령 오크가 육편이 됐는데 마석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C급 마석은 평균 50만 원이다. 정령 오크는 C급 중에서도 상위이니 70만 원 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30개면 2,100만 원. 여기서 세금과 환전 수수료를 떼면 손에 쥐어지는 것은 60~70%. 파티원이 있다면 지분에 따라 나눠지는 구조다.

‘대부분 사람은 헌터 수익을 세전으로 계산하니까. 실질적으로 헌터가 버는 돈은 생각보다 적지. 게다가 장비에도 정기적으로 투자해야 하니….’

헌터는 생각보다 돈을 못 번다. 라는 말이 있다.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다. 목숨 걸고 몬스터와 싸우는 것에 비해 얻는 수익은 적은 편이라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평범한 직장인 보다는 훨씬 많이 번다.

‘헌터는 등급이 높아질수록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물론 나는 돈에 대해 별 미련 없다. 유희 생활 어플이 있으니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어도 하승희를 통해 얻고 있는 돈은 막대한 수준이다.

‘내겐 실적이 더 중요해. 마석은 몬스터를 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30마리의 실적이 다 날아간 거잖아. 마석 파편을 가져가봤자 제대로 정산해줄 리도 없고.’

나는 초토화된 땅으로 걸어가 살펴봤다.

‘아까부터 묘하게 걸렸는데… 전류의 양이 생각 이상으로 많아.’

전류는 보통 흩어진다. 이렇게 땅바닥에 잔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별한 작용이 없고서야.

‘마나 때문인가. 음. 뇌전의 출력이 예상보다 강한데….’

전류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공명. 유성검이 품은 뇌기가 서로 공명한 건가?’

잘은 몰라도 유성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공명을 컨트롤하는 건 지금 나라도 힘들지만.’

나는 유성검 한 자루를 소환했다. 오른손으로 쥐고 허공을 향해 휘둘러본다. 투박한 형태의 유성검은 검으로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번 휘두른 유성검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유성검은 오래 유지할 수 없어. 이건 아마 유성검의 레벨이 오르면 해결될 문제겠지.’

어쨌든 알아볼 건 다 알아봤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긴장했다.

‘몬스터가 아니야. 인간이다. 상당히 가까워. 20m 정도인가? 내 감각에 걸리지 않고 여기까지 거리를 좁힐 줄이야. C급은 아니야.’

나는 들판 한쪽을 쳐다봤다. 육안으로 봤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기감은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렁인다.

‘아니, 저건 눈속임이다. 공간이 일렁이는 게 아니라 바람이야.’

바람으로 몸을 감추고 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는 사람이었다.

“유진 형!”

박수호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그런지 박수호는 상당히 반가워했다.

“여기서 형과 만날 줄은 몰랐네요. 형은 보통 B급 던전에 가시지 않나요?”

“오늘은 피곤해서 C급 던전으로 왔어. 힘도 시험할 겸.”

“여긴 B급 헌터도 꺼리는 던전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유진 형은 대단하네요.”

“입 발린 말은 됐다. 넌 왜 여기에 있어? 돈을 벌 거면 다른 던전이 효율이 더 좋잖아.”

“그게 얻을 게 있어서요.”

나는 박수호를 빤히 쳐다봤다. 박수호는 전에 봤을 때보다 강해져 있었다. 더 단단해진 육체, 대놓고 풍기는 자신감, 정련된 기세. 확실했다. 박수호는 C급의 강함을 뛰어넘었다. B급. 그것도 완연한 B급이다. 신체 능력만 따지면 A급에 가까울 것 같다.

‘박수호의 문신 능력까지 생각하면 B급 중에서 상대할 자는 없겠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박수호의 성장은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몸이 아예 안 보이던데, 새로운 능력을 각성한 거야? 아니면 마법?”

“아. 그건 이 녀석 덕분이에요.”

박수호가 옆을 가리켰다. 바람이 모여들더니 하나의 형상을 취한다. 해마처럼 생겼다. 묘하게 익숙했다.

“…정령?”

“네. 바람의 정령 마야에요. 얼마 전에 계약했어요. 아직 어려서 힘은 약해요. 모습을 감출 수 있었던 것도 마야의 힘이에요.”

“놀랍네. 정령은 진짜 희귀한 존재라고 하던데.”

현실에서도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는 존재했다. 그러나 무척 희귀했다. 인구수 대비 헌터가 많은 한국에서도 정령사는 100명이 되지 않는다.

“형은 짐작하겠지만, 마야는 이 세계의 정령이 아니에요.”

“문신 세계?”

“네. 문신 세계에서 만나고 계약했어요. 근데 현실로 데려올 수 있더라고요.”

“…….”

정령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박수호가 특별한 건가?

“이 던전에 들어온 것도 정령 때문이야?”

“네. 정령 오크의 어금니가 정령에게 좋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마야는 아직 어린 녀석이라 이런거라도 꾸준히 챙겨줘야 빠르게 성장할 테니까요.”

“성장은 했어?”

박수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각보다 성장이 훨씬 느려요.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정령에 대해선 나도 잘 몰라서 뭐라 할 수 없네.”

“괜찮아요. 문신 세계에서도 정령사는 희귀한 존재더라고요. 아, 여기 유진 형이 한 거예요?”

“새로운 기술을 좀 실험해봤지. 결과는 보는 대로야. 일종의 필살기 같은 거라고 할까.”

“장난 아니네요. 근데 마석까지 박살 났으니… 좀 아깝네요.”

박수호는 엉망이 된 땅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돈에 미친 새끼답다고 해야 할까.

‘박수호랑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고… 호감이나 쌓아볼까.’

박수호는 능력이 있는 놈이니 일단 빚을 씌워둔다.

“마침 정령에게 좋은 물건이 있는데. 줄까?”

“그런게 있아요?”

“나도 던전에서 우연히 얻은 거야.”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 인벤토리에서 소환한 건 파란색의 작은 보석, 정령옥이었다.

[정령옥

순수한 자연의 힘이 서린 보석이다.

정령에게 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가격: 20 포인트.

※주의

오직 정령에게만 효과가 있다.]

박수호의 바람의 정령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정령옥을 보자마자 최면에 걸린 듯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마야?!”

박수호가 당황하며 정령을 붙잡았다. 정령은 박수호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으나, 그 시선은 여전히 내 손에 뿌리박혀 있었다.

“정령옥이란 건데 순수한 자연의 힘이 담겨있다더라.”

“마야의 반응을 보니 엄청나게 좋은 물건인 것 같네요. 그냥 받을 순 없어요.”

“괜찮아. 몇 개 더 있거든.”

나는 정령옥을 손가락으로 튕겨 정령에게 던져줬다. 정령은 해마와 닮은 외형과 어울리지 않게 크게 입을 벌리더니 단번에 정량옥을 삼켰다.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령의 몸에서 정령의 힘이 폭발했다. 정령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며 회전했다. 휘몰아치던 바람은 이윽고 정령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정령은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크기다 좀 더 커지고 아까보다 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워낙 약해서 그런지 정령옥 하나로 눈에 띄게 성장하는군.’

박수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박수호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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