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프린 도시의 중심인 시장 저택 앞에는 새벽부터 일련의 사람들이 모였다. 베로프린의 시장인 박수호의 주도하에 모인 사람들로 그 구성은 정예 기사, 정예 마법사, 정예 모험가 등 다양했다.
이 무리의 목적은 베로프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이코트 엘프령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뒤쪽에 있는 엘프들을 힐끗거렸다. 정확히는 엘프들 중심에 있는 한 여인을 힐끗거린 것이다.
그녀는 하넬 사이코트.
사이코트 엘프령의 정식 후계자이다. 그것만으로 그녀가 인간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녀를 호위하고 시중드는 엘프들까지 그녀를 힐끔거렸다.
하넬은 처음 베로프린에 왔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고귀하면서도 우아한 자태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옷은 유독 짧았다. 상의는 배꼽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하의는 튼실한 허벅지가 보였다. 그것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엘프나 인간 모험가들 중에는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는 여자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몸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목과 손목에는 가시 문신, 오른쪽 골반에는 장미 문신, 왼쪽 허벅지에는 머리가 두 개인 뱀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하복부에 새겨진 자궁 문신의 끝부분도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등이었다. 옷에 의해 반쯤 가려져 있지만 불타는 나무 문신이 확실했다. 그것도 평범한 나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웅장함을 느끼게 하는 나무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유명한 세계수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지만 애써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문신의 주인은 하이 엘프였다. 설마 그런 모독적인 문신을 몸에 새기겠는가. 뭐, 평범한 나무라도 엘프가 나무가 불타는 문신을 등에 새긴 순간부터 모독적이긴 했지만.
‘크크크. 존나 웃기네.’
나는 박수호의 옆에서 웃음을 참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싸늘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혼자 웃을 수는 없었다.
하넬이 노출도 높은 옷을 입고 있는 건 당연히 내가 원인이다. 내가 직접 그녀에게 노출도 높은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저년은 걸레 컨셉이니까. 컨셉에 맞게 행동해야지.’
다만 아쉬운 건 수치심으로 인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이었다. 나는 그녀가 걸레답게 당당했으면 한다.
“수호야. 저 엘프 왜 저래? 원래 저러진 않았잖아.”
나는 시치미를 떼며 박수호에게 물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선빵을 친 것이다. 뭐, 그게 아니어도 박수호는 이 일에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 글쎄요. 심경의 변화라도 있지 않았을까요?”
“심경의 변화로 몸에 문신을 새기나. 너랑 저 엘프는 친한 사이 아니었어?”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친구 미만이라고 할까요. 애초에 서로 알게 된 시간도 오래되지 않았고요.”
“가서 왜 저러는지 물어봐.”
“제가요?”
“저 여자 성격 장난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박수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서 물어보면 혐오감 가득한 표정으로 욕하며 꺼지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박수호는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나중에 한 번 물어볼게요. 지금은 출발 준비로 바쁘니까요.”
출발 준비. 바쁘긴 했으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베로프린과 사이코트 엘프령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건 거리보다는 사이에 있는 숲이었다. 숲에서는 몬스터가 우글거린다.
“병력을 이끌고 갈 필요가 있나? 엘프들은 네 도움만 원할 텐데?”
“네.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정식으로 요청했는데 저 혼자 가면 베로프린의 체면이 떨어진다더라고요. 일종의 정치죠. 제가 베로프린의 대표자지만 이런 부분은 좀 어려워요. 외교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박수호가 한숨을 내쉰다.
영지를 운영해본 나였기에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한다.
‘아니지. 박수호가 더 힘들려나.’
베로프린은 중립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말이 좋아 중립 도시지 실제로는 사방이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더라도 그게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베로프린이 더 커질수록 베로프린을 노리는 자들은 많아질 것이다.
‘나였으면 중립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달라붙어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했을 텐데. …뭐, 박수호가 알아서 하겠지.’
결국 이 도시의 주인은 박수호였다. 도시의 흥성망쇠는 그에게 달렸고, 어느 쪽이든 나랑은 관계없었다.
“출발하자!!”
준비가 끝나자 박수호가 소리쳤다. 우리는 당당히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베로프린의 시민들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배웅했다.
“박수호 시장님! 무사히 다녀오시길 기원할게요!”
“여신이시여! 우리 시장님에게 축복을!”
“빨리 돌아오실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조금 충격 먹었다. 강제로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나와서 지배자를 축복한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였나.
‘시민들은 강제로 동원하는 게 기본 아니었나.’
문화 충격이었다.
• • •
“사이크토 엘프령의 숲으로 들어섭니다. 긴장해야 합니다.”
숲에 들어가기 직전에 정예 기사가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자신의 장비를 확인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진다.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엘프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리더라 할 수 있는 하넬은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있으니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숲은 복잡하고 위험하지만, 우리에겐 일상인 곳이죠. 우리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우리는 자신만만한 엘프들의 뒤를 따라 숲속을 걸었다.
그리고 숲에 들어온 지 5분 만에 트롤과 마주쳤다.
나와 박수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정예들이 먼저 나서서 트롤을 죽이고 시체를 갈라 마석을 회수했다.
‘여기 몬스터들이 마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직접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던전의 원인이 이 세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뭐, 확신할 수는 없지. 던전과 문신 세계는 엄연히 다르니까.’
모든 던전이 문신 세계와 이어져 있었다면, 문신 세계는 개판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3분 뒤, 날개 달린 호랑이와 마주치고 싸웠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몬스터 두 마리와 마주친 것이다. 그것도 최소 C급 이상의 몬스터들.
“어지간한 던전보다 몬스터가 많군.”
“네. 그만큼 이 숲이 넓기도 해요.”
박수호가 말했다. 그는 전에 이 숲을 경험해봤다.
“엘프들은 이런 위험한 숲에서 산다고? 이해할 수 없네. 이런 숲이면 발 뻗고 자기도 힘들잖아.”
“아, 그건 도시를 지키는 대규모 결계가 있어서 괜찮아요. 몬스터는 그 결계 내로 침범하지 못하거든요.”
“도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이 숲에 있는 몬스터 덕분에 천혜의 요새가 되는 거군.”
“그렇긴 하죠. 몬스터 때문에 군대를 보내긴 어려우니까요.”
군대를 보낸다고 해도 몬스터를 쉽게 처리할 수 없다. 우리와 달리 군대는 일반인으로 구성될 테니까. 우리가 쉽게 몬스터를 처리하고 나아갈 수 있는 건 강자들이 모여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 좋은 점도 있어요.”
“뭔지 알 것 같네.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건 나가기도 어렵다는 뜻이니까.”
“네. 무역이 힘들어요. 그래도 하려고 하면 못할 건 없어요. 엘프들은 강하니까요.”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인간보다 강하다. 인간들 보다 오래 사니 당연했다. 인간의 평생은 100년. 그 평생의 몇 배를 기본으로 살 수 있는 게 엘프였다. 그 시간 동안 수련을 한다고 생각해봐라.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들 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엘프들의 수는 잘 늘어나지 않지. 만약 엘프가 인간만큼 많았다면… 이 세계는 엘프가 지배했겠지.’
그리고 그런 엘프를 내가 지배했을 것이다. 내겐 엘프 지배 조교 어플이 있으니까.
나는 저 앞에 있는 하넬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지금 당장 저 잘록한 허리를 잡고 자지를 박고 싶었으나, 보는 눈들이 많았다.
‘…어플로 만지기만 할까.’
엘프 어플을 켜고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표면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는 촉감이 느껴진다. 하넬은 뒤를 돌아보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꼬라보면 어쩔 건데.’
나는 그녀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하넬은 몸을 움츠리며 덜덜 떨었다.
• • •
사이코트 엘프령.
그 중심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세계수라고 불리는 나무였다. 높이만 50m에 달하는 나무다. 그러나 이 세계수의 나이는 500년도 되지 않는다.
본래 이 세계에 존재했던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큰 세계수는 먼 과거에 악신의 음모로 인해 불타 사라졌다.
악신. 달리 광기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이계의 신.
그 악신은 몇백 년 전부터 이 세계에 마수를 뻗어오고 있다. 그 영향이 이 세계에 점점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증거는 용사의 존재였다. 용사가 이 세계에 다시 나타났다는 건 악신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세계수 앞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하이레그 수영복과 비슷한 디자인의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몸매는 늘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허벅지는 포동포동했다. 그래도 팔과 다리는 엘프답게 길쭉했다. 피부도 하이 엘프이기에 새하얗다.
그녀는 하얀 드레스로 중요 부위를 가렸고, 반투명한 로브를 어깨에 걸쳤다. 찬란히 빛나는 금발은 허벅지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오른손에는 백금으로 몸을 이루고 여러 보석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는 그녀의 키보다 컸다.
사이코트 엘프령의 영주, 테레시아 사이코트는 왼손으로 세계수를 짚었다. 그리고 조용히 청록색 눈동자를 감는다.
그녀 주위로 마나가 움직인다. 반투명한 망사 같은 로브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그 제약 중 하나가 세계수와 감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수여. 내게 미래를 알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