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793화 (1,573/2,000)

“세계수여. 내게 미래를 알려다오.”

테레시아는 어둠 속에 있었다. 눈을 감았으니 당연했다.

이 상태에서 세계수와 감응한다. 온몸의 감각이 확장되고 높이 올라간다. 하늘을 넘어서 우주로 날아가는 감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감각은 사라졌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던 조금 서늘한 바람의 촉감부터 시작해서 숲의 향기와 소리가 사라진다. 모든 감각이 사라진 그녀는 어둠 속에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두렵다. 이 어둠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둠은 계속되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붉은 장막이 나타나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테레시아는 경건한 마음으로 장막을 들추었다.

“…….”

멸망한 세계가 있었다. 잿빛으로 변한 멸망한 세계에서 광기에 침식된 악신의 종자들이 불경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저 미쳐서 악신을 찬양하며 춤을 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악신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줄 것을.

그리고 저 어두운 하늘이 꿈틀거린다. 아니, 저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악신의 육체. 그 일부다.

“윽….”

강력한 정신적 충격이 테레시아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장막이 쳐지며 눈 앞을 가렸다.

‘미래의 광경인 건 확실하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악신은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노리는 건가.’

그녀는 미래의 장면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원하는 미래를 지정할 수 없다. 당연히 보이는 미래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미래를 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뿐이다.

지금처럼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없이 부족한 미래의 경우엔 해석하기 힘들었다.

‘아직 여력은 남아 있으니… 다른 미래를 내게 보여주오.’

장막을 걷는다.

온몸에 문신한 여자 엘프가 보였다. 테레시아는 그녀를 보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여자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딸은 양손으로 부풀어 오른 배를 잡고 있다.

‘임신? 누구와. 누구와 결혼한 거지?’

애석하게도 보이는 거은 딸 뿐이었다. 딸은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 누군가는 테레시아는 볼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자신의 딸이 누군가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장막을 들추었다.

숨이 턱 막힌다. 미래를 보는 건 정신과 영혼에 굉장히 큰 부담을 준다. 이번 이후로는 최소 1년 이상은 미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악신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미래면 좋으련만….’

보이는 것은 거리의 풍경이었다. 익숙한 도시. 그곳이 사이코트 엘프령의 거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거리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 오래된 미래는 아닌 건가.’

중요한 건 거리 풍경이 아니라, 거리에 있는 엘프들이었다. 여자 엘프. 그 모든 인원의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아까 전에 본 자신의 딸처럼.

‘여자 엘프 모두가 임신했다고?’

엘프는 쉽게 임신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남자 엘프의 성욕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프의 문화는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을 더 추구한다.

육체적인 사랑. 다시 말해 섹스는 야만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또 엘프는 임신 확률이 낮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종족들 보다 임신 확률이 훨씬 낮았다. 그랬기에 임신을 목적으로 섹스할 때는 마법과 약을 복용하며 섹스한다.

‘인구수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임신한 여자 엘프만 100명이 넘어 보이는데 모두 임신하는 게 가능한 건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좋은 미래인지, 나쁜 미래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 이변을 막기 위해 섹스 금지령이라도 내려야 하나? 일단 임신한 엘프들의 안색이 어둡지 않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미래의 파편 3가지. 무리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미래는 여기서 끝이지만….’

어쩐지 아쉽다.

잠깐 고민하던 테레시아는 마지막으로 미래를 보길 원했다.

미래의 장막을 들춘다.

그녀는 미래를 보고 경악했다.

미래의 광경, 그 중심에는 테레시아가 있었다. 사이코트 엘프령의 옥좌, 세계수의 대리자인 테레시아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는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실루엣만으로 남자라는 걸 짐작할 뿐이다.

테레시아는 옥좌의 앞에 알몸으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정성스럽게 남자의 발을 잡고, 발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테레시아의 정신이 흐트러졌다.

세계수와 이어져 있던 감각이 끊어졌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비틀거리며 세계수에 몸을 기댔다. 아까 본 광경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이코트 엘프령의 주인인 내가 남자의 앞에 무릎 꿇는다니…!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그녀는 세계수의 대리자다. 물론 이 세계에는 흩어진 엘프 파벌과 세계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허나 그녀만큼 뛰어난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히 엘프의 여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다? 모든 엘프가 무릎을 꿇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미래를 바꿔야 한다.

다행히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녀는 엘프와 세계수를 위해 몇 번이나 미래를 바꿔보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똑바로 섰다. 직감에 불과하지만, 방금 본 미래는 아주 먼 미래가 아닐 것이다.

• • •

사이코트 엘프령에 도착했다.

숲의 중심에 고립되어 있는 사이코트 엘프령은 규모는 작아도 엄청나게 발전한 도시였다. 대로는 깔끔했고, 건축물은 엘프만의 방식으로 지어져 있다. 건축 재료를 보면 콘크리트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도시의 규모는 작아도 발전도는 베로프린 이상이군.’

도시 중심에 보이는 건 50m가 넘는 거대한 나무다.

세계수.

여기까지 오면서 박수호에게 들은 말로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이곳에 심어 저렇게 키워냈다고 한다.

세계수 앞에는 고귀함이 느껴지는 저택이 있었다. 겉모습은 성에 가까운 저택이다. 저 저택에 사이코트 영주가 기거한다.

우리는 대로를 걸으며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엘프들이 우리를 구경했다.

“하넬 님이 돌아오셨군. 누가 용사님이지?”

“잠깐. 하넬의 몸을 봐. 문신을 했잖아?!”

“마, 맙소사! 저런 천박한 문신을 하넬 님이?!”

“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넬을 본 엘프들은 모두 경악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낄낄 웃으며 엘프들을 살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미인들이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여자 엘프 모두 맛있어 보였다. 어떻게 된 게 과일 장수로 보이는 아줌마 엘프도 흠잡을 곳 없는 미녀였다.

‘시발. 이게 엘프지.’

아. 벌써부터 자지가 저릿저릿하다. 발기되면 쪽팔릴 테니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저택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엘프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홀로 이동했다.

홀의 끝에는 한 여자 엘프가 옥좌에 앉아 있었다. 이 도시의 주인인 테레시아 사이코트가 확실했다.

노출도 높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풍만한 여자 엘프였다. 하넬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는데 엉덩이와 가슴은 훨씬 컸다. 오른손에는 거의 2m에 달하는 고급스러운 백금 지팡이를 들고 있다. 지팡이 끝에는 큼지막한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드레스가 아니라 하이레그 수영복 아니야? 허벅지가 다 보이잖아. 저 비닐 같은 로브는 뭐고.’

영주가 왜 저런 창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꼴리기 시작했다.

‘가슴은 L컵이다. 확실해. 저런 어마어마한 크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조심히 눈동자를 굴려 테레시아의 하반신을 쳐다봤다. 하이레그를 입은 주제에 보지를 가리는 면적이 넓었다. 겉으로 봐서는 보지털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다만 보지 부분이 볼록한 걸 보아 보짓살은 통통한 것 같다.

테레시아는 하넬을 쳐다봤다.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였으나, 곧 박수호에게 시선을 옮긴다.

“베로프린의 시장이여,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저녁 만찬을 준비 중이니 방에서 천천히 여독을 푸시지요.”

“영주님. 숲에 악의 흔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러나 급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사이코트 엘프령과 베로프린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허나 갑작스러운 대화는 서로에게 좋지 않을 테니 우선 휴식부터 취해주시지요.”

“네. 영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으로 끝. 테레시아 사이코트와의 첫 만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하게 끝났다. 우리는 엘프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각각의 방을 배정받았다.

방에 들어온 나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자리에선 바로 엘프 어플을 사용하지 않았어.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아쉽네. 의심받더라도 엘프 포획을 할 걸 그랬나.’

테레시아 사이코트.

그 엘프년은 복장에서부터 몸매까지 기존의 엘프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박하지 않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와 은은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힘 때문이다.

‘확실해. 그 엘프년은 S급이다.’

흥분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엘프 어플을 켰다.

‘하넬은 뭐 하고 있으려나. 몸을 문신으로 떡칠했으니 엄마한테 욕먹고 있으려나?’

그 혼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어플을 킨 것이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하넬은 방에 들어가 있었다. 테레시아가 아닌 하녀복을 입은 엘프가 옆에서 하넬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럼 테레시아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다.

“누구지?”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입니다. 손님, 테레시아 님께서 손님과의 독대를 원하십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수호가 아니라 나를? 설마 내가 문신을 새긴 장본인인 걸 알고 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하넬에겐 발설 금지 절대 명령이 내려져 있으니까.’

뭔가 싸한 기분이긴 해도 테레시아와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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