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2화 > 1802. 운명
브라마센으로부터 나와 박수호를 지켜준 빛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빛의 정체는 뻔했다. 셀브레티나. 문신 세계의 여신. 박수호를 용사로 선택한 장본인.
나는 힐끗 박수호를 쳐다봤다. 미쳐서 발광하던 박수호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기절한 상태였다. 그의 하반신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랴고 노력했다. 셀브레티나는 박수호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내려왔다.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브라마센. 그 빌어먹을 놈도 절 알고 있으니 당연히 알겠죠."
-악신의 본체를 보고도 미치지 않는 뛰어난 정신력과 신비한 힘…. 당신은 악신의 대적자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용사가 되어 주세요. 이 세계엔 당신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됐습니다. 문신충이 되고 싶지 않거든요."
박수호의 문신 세계 능력은 별로 탐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귀찮아 보인다. 무엇보다 박수호와 같은 문신충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온몸에 문신이 생기면 한하린도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셀브레티나. 이 년은 존나 예쁘다면서 왜 모습을 안 보여주는 거지?’
불경한 생각이 절로 들었으나 따질 수는 없었다. 신은 신이다. 밉보여서 나쁠 건 없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문제가 되진 않겠지요. 당신에겐 저와 다른 신이 함께하는 것 같으니.
"…다른 신이 함께한다고요? 무슨 뜻입니까?"
-저번에 당신이 신의 힘을 사용하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 힘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하지만… 악신이 당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보면 보통 신이 아니겠지요.
"……."
눈앞의 여신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신성력이라… 저번에 팔라딘이 되어서 신성력을 쓰긴 했지. 그때를 말하는 건가.’
셀브레티나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지.
-당신과 그를 보고 있으면 초대 용사가 생각납니다. 그도 정신력이 뛰어났고 올발랐지요.
‘…내가 올바르다고?’
여신이라면 내가 엘프들을 따먹는 걸 보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면 엘프 따위에겐 관심도 없는 건가.
‘어쩌면 내게 아부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엎어진 박수호를 쳐다봤다. 여신이 말하는 그는 박수호를 뜻한다.
"박수호가 초대 용사와 닮았다고요?"
저 똥오줌을 지린 녀석과?
-…그는 초대 용사처럼 심성이 곱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장할 시간이지요. 그를 지켜주세요. 부탁합니다.
"박수호는 친한 동생이니 걱정마십쇼."
능력 있는 박수호와 친하게 지내서 나쁜 점은 없었다.
여신의 빛이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나와 박수호는 어둠 밖으로 나왔다.
숲이었다. 엘프들이 긴장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가 흔들렸다. 싱그러운 바람에는 이상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반사적으로 박수호를 찾았다. 그는 똥오줌을 지린 채 실신해 있었다.
악신의 힘이 사라지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던 엘프들이 멈칫했다. 그녀들은 박수호를 보고 경악했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 새끼 좆됐네.’
아마 오늘이 가기 전에 똥오줌 지린 베로프린 시장이란 별명이 도시 전체로 퍼질 것이다.
박수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나는 박수호를 버려두고 하넬과 벨가에 어깨의 팔을 감았다.
"이거 놔!"
"…이거 놓아주시죠."
이미 나와 몸을 섞은 주제에 앙탈을 부렸다. 무시하고 그녀들의 가슴을 움켜쥔다. 각각 다른 크기지만 부드럽고 만지는 맛이 있어서 기분 좋다.
"일은 끝났으니 돌아가자."
"잠깐! 박수호 시장님을 이대로 버려두고 가자는 말이야?!"
"맞습니다. 박수호 시장님을 데려가야 합니다."
나는 박수호를 돌아봤다. 기절한 박수호의 하반신은 부풀어 있었다. 성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누가 데려갈 건데?"
턱짓으로 박수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두 좆집 엘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넌 박수호 시장님의 친구잖아."
"저희는 함부로 시장님의 육체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지랄하네."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하자, 그녀들이 나를 째려봤다. 그 시선은 무시했다. 그녀들에게 박수호를 업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 여자들의 손에 더러운 걸 묻힐 순 없지.
"너희는 정령들을 이용하면 되잖아."
"정령은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정령들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부탁하는 거지요."
"맞아. 그리고 정령들은 하기 싫은 일은 안 해."
정령도 똥오줌 지린 박수호를 만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박수호는 곧 일어날 거야. 그럼 알아서 찾아오겠지. 이 녀석은 저래 보여도 능력이 좋거든."
"우린 박수호 시장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게 의심하는 게 아니면 뭐냐. 수호가 혼자서 못 올 것 같애?"
"이 숲엔 몬스터가 있어. 기절한 시장님을 두고 가는 건 몬스터 밥으로 넘겨주는 것과 같아."
음.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몬스터를 제법 만났다.
‘그래도 똥오줌 지린 박수호를 업고 가긴 죽기보다 싫은데.’
주위에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로 수레라도 만들어야 하나? 나는 짜증 담긴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기분 탓일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박수호의 몸이 움찔 떨린 것 같았다. 그녀들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박수호의 움찔거림을 못 봤다.
나는 박수호의 호흡에 집중했다. 자는 사람과 일어나 있는 사람을 가장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호흡이었다. 박수호는 연기를 못 했다. 깨어 있는 게 확실했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쪽 팔려서 못 일어나는 거지.’
속으로는 내가 그녀들을 데리고 사라져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거다.
"박수호가 기절했다고 몬스터 따위에게 당할 것 같아? 돌아가자."
"아니, 그래도…."
"어허.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그리 말하며 혀를 내밀며 양옆으로 흔들었다. 내 신호를 알아들은 그녀들은 질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박수호는 성유진과 엘프들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래도 일어날 수 없었다. 엘프는 청력이 인간들 보다 배 이상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으니까.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되고도 3분 이상 자는 척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바지에 더러운 오물들이 묻어 있어서 기분 더러웠다.
"흑."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서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한참 감정을 다스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진 형이 드녀들을 데리고 가서 다행이야. 근데 제법 친해 보이던데.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성유진은 처음 만나는 여자와도 빠르게 친해졌다. 숙맥인 자신과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일이 어떻게 된 거지? 악신을 마주한 건 꿈이 아니라 진짜인 것 같은데….’
악신 브라마센은 광기의 신이기도 했다. 자신은 아마 그를 보자마자 미쳐버린 것이다. 똥오줌을 지린 원인이 바로 그거다.
"씨발."
욕설이 나왔다. 바른 생활 사나이인 그는 되도록 욕을 하지 않게 노력했으나, 지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유진 형과 엘프들은 내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잠시 지구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면 된다. 소문이 퍼질 일은 없다. 베로프린 시장의 명예는 지켜질 것이다.
막 지구로 가려던 박수호는 멈칫하고 옆을 돌아봤다.
키득키득.
정령이 썩은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본래라면 악의 힘 때문에 가까이 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악의 힘이 제거된 상황.
-키득키득, 똥싸개 인간!
‘바람의 정령?’
일단 사람이 아니란 것에 안심하다가, 바람의 정령이 다른 정령들보다 장난기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계약한 바람의 정령인 마야를 소환했다.
해마를 닮은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마야. 저 친구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 네가 저 친구에게 잘 설명해줘. 난 똥싸개가 아니야."
마야는 박수호의 하반신을 보고는 슬쩍 물러났다. 박수호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마야. 부탁해."
마야는 무언가를 원하듯이 박수호를 바라봤다.
-그거 줘.
"그거?"
-정령옥.
"아, 유진 형이 줬던 거? 그게… 지금 당장은 가진 게 없어. 나중에 줄게."
-지금 줘.
마야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였다. 그에 박수호가 당황했다. 그가 알기로 정령은 탐욕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정령에게 인간의 물건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그렇다. 허나 정령옥은 달랐다. 정령에게 있어 정령옥은 최고의 보약이자, 최고의 음식이었다. 마야는 한 번 맛본 정령옥의 맛을 잊지 못했다.
"지, 지금은 없다니까. 나중에 유진 형에게 말해서 줄게."
-키득키득. 똥싸개. 똥 지리는 인간. 똥 지리는 베로프린 시장! 똥용사!
나무 뒤에 숨은 바람의 정령이 매우 거슬렀다. 애석하게도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마야. 부탁할게."
계약한 정령에게 머리를 숙였다.
-싫어. 정령옥 줘. 똥싸개!
충격받은 박수호가 마야에게 손을 뻗었다. 정령의 주인으로서 훈계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야는 스스로 역소환하여 사라졌다.
-키득키득키득키득. 똥용사! 똥싸개! 똥 지리는 박수호!
"야, 너! 이리 와!"
참지 못한 박수호가 바람의 정령을 향해 뛰었다.
-꺄아아아악! 똥싸개가 쫓아온다!
바람의 정령은 괜히 바람의 정령이 아니다. 박수호가 뛰자마자 바람처럼 도망쳤다. 박수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도시로 돌아왔을 때, 도시 전체에 똥오줌 지린 베로프린 시장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박수호는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다.
***
나는 지구로 돌아와 집으로 갔다.
공간 이동 주문서로 사이코트 엘프령의 좌표를 저장하는 걸 잊지 않았다.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으면 박수호 도움 없이도 문신 세계로 갈 수 있었다.
‘사이코트 엘프령은 천천히 지배하면 돼. 급할 것 하나도 없어.’
악신 브라마센을 떠올린다. 놈은 무리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걸 확인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낼 것이다. 그 아랫놈들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브라마센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이득이었다.
‘그럼 이제 유희 세계로 가볼까.’
새로운 유희 세계는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익숙한 유희 세계부터 들어간다.
[광명 승천도를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