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3화 > 1803. 광명승천도
독고시를 지나온 나는 천마신교로 돌아왔다.
천마신교는 무림맹과의 전쟁으로 인해 바쁘면서도 한가했다. 전쟁인데 한가하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붙었지만 사실이었다.
‘이 세계가 워낙 넓어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음날 적들이 처들어 오는 건 아니지.’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전쟁.
이렇게 말하면 큰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이 전쟁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결국 천마신교나 무림맹이나 진 제국 내에 있는 거니까. 판타지 식으로 보면 영지전에 가까울 수 있었다.
‘결국, 황제가 개입하면 단숨에 끝나는 전쟁이다.’
황제의 한마디에 무림맹이고, 천마신교고 벌벌 길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무림 세력을 줄이는 게 목적인가? 황제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상태로 전쟁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전쟁은 바로 끝나지 않고 최소 10년 이상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200년 이상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스케일이 너무 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여튼 당장 뭔가를 한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무림맹과 천마신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전면전도 힘들다. 그리고 전면전은 서로 피하고 있다. 전쟁의 규모가 너무 커지면 황제가 개입할 수 있으니까.
"왔나."
방에 들어가자 천유운이 가벼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깨어나 보니 천마가 되어 있었다.]의 주인공이다. 대충 말해서 빙의 천마. 현 천마의 아들인 그는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 천마의 핏줄이 얘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직계는 천유운 뿐이다. 게다가 천유운은 두각을 보이는 인재. 차기 천마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천유운의 앞에 앉았다. 천유운의 손이 움직여 차를 준비했다. 그윽한 차향이 퍼진다. 비싼 차일 게 틀림없었다.
‘독을 넣었나?’
천유운은 음흉한 놈이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다. 보통 웹소설 주인공들은 독을 잘 안 쓰지만, 이놈은 필요하면 쓴다.
천유운이 차를 마셨다. 그에 나도 차를 마셨다. 독은 들어있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천유운의 수하이기도 하니 당연했다.
"염구석. 못 본 사이에 강해졌군. 독고세가를 뒤집어 놨다지?"
독고세가는 봉문에 들어갔다. 이번 전쟁에서 빠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독고세가는 들은 만큼 강대하지 않았다. 정파 오대세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군."
"오대세가에 비교하면 부족하긴 하지. 그래도 독고세가다. 한때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가문. 그런 가문을 혼자서 봉문 시키다니….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지?"
천유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직감이 경고한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서늘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떠보는 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왜?’
모르겠다. 워낙 자기 속내를 숨기는 데 능숙한 놈이라 뭘 의심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흡성대법의 효과가 컸다. 무림맹 놈들의 내공을 빨아먹으면서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그게 흡성대법의 최대 장점이지. 하지만 흡성대법에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걸 잊지 마라. 그 한계를 조금이라도 잘못 파악하는 순간 몸이 터져 죽을 거다."
"알고 있다. 본래 내 것이 아닌 내공이니까. 그 내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천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내게서 떨어져 찻잔으로 향했다. 그는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는 염구석에 대해 생각했다. 다혈질이고 성격이 급하다. 그 사실을 천유운도 잘 알고 있었다.
"날 왜 부른 거지? 단순히 이야기나 하려고 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해줬으면 하는 일?"
"얼마 전에 거슬리는 일이 생겼다. 누군가가 내 방에 침입했었다."
"살수인가."
"모른다. 확실한 건 그 흔적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는 거지. 나 또한 모종의 장치를 해놓지 않았다면 침입한 것도 몰랐을 것이다."
원작 내용이 떠올랐다. 천유운은 자신의 방 창문과 문에 장치를 해둔다. 뭐, 장치라고 하기엔 민망했다. 그저 문이 열렸는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그것이다. 창문에 일부러 먼지를 묻혀 놓는다던가, 문틈에 표식을 해둔다던가.
"도둑일 수도 있겠군."
"아니, 사라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네가 놈을 추적해 잡아줬으면 한다."
"불가능하다. 이미 사라진 범인을 어떻게 추적하라는 거냐."
"단서라면 있다. 아까 말했듯이 장치를 해뒀다."
천유운이 씩 웃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구석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손바닥만 한 작은 강철 우리였다. 강철 우리 안에는 빨간 쥐새끼가 있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철창을 잡고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다.
"혈서(血鼠)?"
피를 먹는다는 붉은색의 괴물 쥐는 여러 가지로 유명했다.
"아니다. 이건 만리서종(萬里鼠踪)이다. 각인시킨 만리추종향을 쫓는 특성이 있지. 장치에 의해 범인의 옷에 만리추종향이 묻었다. 이놈을 들고 범인을 추적해라."
만리추종향. 냄새라고 하지만 사람은 맡을 수 없는 특수한 냄새다. 사람이 이 냄새를 맡으려면 특수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만리서종이란 게 있을 줄 몰랐지만.’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굉장히 귀찮았지만, 천유운이 날 따로 불러 직접 시키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굳이 내가 해야 하나? 추적이 전문인 놈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
네가 해라. 확고한 뜻이 담긴 눈빛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천마신교 내부에는 없겠지?"
"있었다면 이미 잡았을 거다. 만리서종의 주동이가 향하는 곳을 보면 알겠지만, 놈은 서쪽으로 향했다."
우리에 갇힌 만리서종을 바라봤다. 작고 빨간 쥐새끼는 어느 한쪽만 계속 보고 있었다. 거기가 서쪽인 모양이다.
"서쪽에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
"딱히 떠오르는 건 없군."
천유운이 찻잔을 내렸다. 찻잔의 바닥이 보였다.
"그럼 부탁하지."
축객령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회색빛의 하늘은 유독 건조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칼바람처럼 차가웠다.
"겨울이 오고 있다."
일부러 있어 보이는 척 중얼거렸다. 한서불침은 진작에 이뤘기에 겨울이든 여름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천마가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천유운이야. 놈을 죽여야 내가 천마가 될 수 있어.’
천유운이 죽는다고 바로 천마가 되는 건 아니지만, 천유운이 없어야 내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끝까지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더 좋은데… 왠지 날 의심하는 것 같고.’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출석 이벤트! 일주일을 출석할 때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현재 7일 출석 완료.』
『출석 일주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랜덤으로 주어집니다.』
『혼백정수(魂魄淨水)가 주어집니다.』
『혼백정수(魂魄淨水)
혼백 일부가 깃들어 있는 물입니다. 정신을 맑게 해줍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천강성 시스템으로부터 영약을 받았다.
일주일마다 받는 출석 보상이었다.
‘얼마 전에 받았던 게 또 나왔군.’
혼백정수는 괜찮은 영약이었다. 마시면 약간이지만 내공이 상승하고, 사특한 기운을 일부 정화 시켜준다. 마공이나 사공을 익힌 이들에게 특히 효과가 좋았다.
나는 주섬주섬 혼백정수는 챙겼다. 지금 나는 영약을 끊은 상태였다. 영약을 먹어도 효과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영약은 별 도움이 안 돼.’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나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세계에 와서는 매일 아침 운기행공을 한다.
‘할 게 없어.’
여자가 없는 아침에는 더럽게 할 게 없었다. 그리고 운기행공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진다. 수련 효과는 딱히 없었다.
나는 지금 오기 10단의 경지다. 다음 경지인 삼정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깨달음은 부차적인 거다. 이 선협 세계에서 중요한 건 기운과 힘이었다.
운기행공을 끝낸 나는 방을 나서 개인 수련실로 이동했다.
‘원작의 염구석은 다혈질적이지만 부지런히 수련했지. 성실한 단련이 곧 자신의 힘이 될 거라고 믿는 놈이야.’
염구석을 연기하려면 그 행동도 따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천유운의 의심을 받을 테니까.
참귀도법(斬鬼刀法) 역귀추(逆鬼追).
칼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벤다. 파공성과 함께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음?"
뭔가 부족하다. 분명 어제 수련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한번 역귀추를 행했다.
‘뭔가 간질거리네. 재채기를 할 것 같은데 하지 못하는 느낌이야.’
마기가 새어 나온다. 천마신공은 아니었다. 그래도 천마신공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기가 짙었다.
칼을 휘두른다.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천재의 시간을 써볼까? …아니. 이번에는 그냥 한 번 해보자.’
칼을 휘둘렀다. 계속 똑같은 방법으로 휘두르진 않았다. 그렇게 해봤자 부족한 걸 찾지 못할 테니까.
2시간을 넘게 칼을 휘두른 끝에 변화가 있었다.
파직.
뇌기(雷氣)가 일어났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뇌기는 마기와 뒤섞인다. 밝은 파란색이었던 뇌전의 색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무거워졌다. 이 번개는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재밌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마기와 뇌기가 섞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새로운 기술을 손에 넣었다는 거다.
‘슬슬 기력도 딸리니 마무리할까.’
파지지직.
군청색의 뇌전이 칼날을 타고 흐른다. 나는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칼끝이 바닥을 향했다.
‘천근추(千斤錘)’
무게 중심에 기운을 실어 몸무게를 한순간에 늘렸다. 그 무게는 모두 손에 쥔 칼로 이동시키며 무릎 꿇었다.
칼날이 단단한 지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군청색 뇌전이 지면으로 이동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면에서 칼을 빼냈다. 군청색 뇌전은 여전히 지면에 잔류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군청색 뇌전이 움직일 때마다 흙이 갈라지고 있다.
‘퍼지지 않고 갉아 먹는다라…. 마치 침식하는 것 같군.’
나는 이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새로운 뇌전에 마땅히 이름이 필요하다.
‘마기가 섞여서 탄생했으니 마뢰(魔雷)? 아니. 어감이 별로야. 독 같으니 독뢰(毒雷)? 이건 더 별론데.’
고민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악뢰(惡雷). 악귀도법을 수련하다가 터득했고, 딱 봐도 악랄해 보이니 악뢰다.’
새로운 뇌천류 기술이 탄생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