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4화 > 1804. 광명승천도
천마신교를 나온 나는 서쪽으로 걸었다.
사실 정말 서쪽인지는 잘 모른다. 만리서종의 주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유운이 서쪽이라 했으니 서쪽이 맞겠지.’
방향은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왼손가락으로 삿갓의 끝부분을 쓸어 넘겼다. 검은색 장포, 삿갓, 허리에 찬 칼.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고고한 무림 고수 룩이었다.
‘캬아, 취한다.’
칼자루를 쥔 손이 근질거렸다. 괜히 칼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내 옆에 베기 딱 좋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벤다.’
칼집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섬광은 나무를 지나쳐 반원을 그리며 다시 칼집으로 돌아왔다.
철컥!
칼집에서 소리가 난 직후, 나무의 몸통에 선이 생기더니 미끄러져 쓰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완력과 검술의 결과물이었다. 이 세계의 나는 다른 세계보다 훨씬 강했다. 육체는 말할 것도 없고 무공은 천강성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다. 나는 무공 천재 성유진이다.
멧돼지가 보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천방지축 뛰어다녔다. 하필이면 내 주위를 말이다. 마치 먹을 걸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평범한 멧돼지가 아니다. 이마에 붉은 점이 찍혀 있고, 가진 기운이 사납다.
‘요괴인가.’
다른 약해빠진 놈이었다면 육포라도 꺼내 저 멀리 던졌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거슬리는군.’
오른손이 칼자루로 움직인다. 멧돼지의 눈이 살벌하게 빛나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뛰었다. 멧돼지의 어금니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칼을 뽑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걸어갔다. 공중에 떠 있는 멧돼지를 베고 칼을 납도 한다.
철컥!
멧돼지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피와 내장이 쏟아진다. 요괴라고 해도 먹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요괴이기에 그 시체가 더 비쌌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먹지 못하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멧돼지 시체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사람이 보였다. 그는 혼자서 걷고 있었다. 정면에서 천천히 걸어온다.
‘힘 좀 쓸 것 같이 생겼군.’
체격이 컸다. 등에는 폭이 넓은 칼을 찼다. 머리카락은 산발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옷은 더러웠으며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산적인가. 아니면 낭인?’
낭인이나 산적이나 다 더럽게 생겨서 이런 곳에서 마주치면 바로 구분하기 힘들었다.
가슴팍에 힘을 주고 턱을 끌어올렸다. 고수의 풍모를 흘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고수의 풍모에 압도된 놈이 겁먹은 표정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살짝 올라간 걸 보니 비웃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방금 멧돼지 요괴를 죽였기에 시원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놈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응축된 살기가 느껴졌다. 일부러 목소리에 살기를 담은 것이다.
‘살기를 목소리에 담을 줄 아는 놈이 고수의 풍모를 못 알아본다고?’
나는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역량을 볼 줄 아는 놈들은 알아서 기었으니까.
‘상대방의 강함도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았으며, 살기를 담아 위협까지 했다.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멧돼지를 갈랐을 때처럼, 나무를 벴을 때처럼 칼집에서 칼을 뽑아 가볍게 휘둘렀다.
깡!
너무 가볍게 휘두른 탓일까. 칼은 놈의 넓적한 칼에 막혔다.
"하하하. 넌 아주 맛있어 보이는군. 산채로 썰어 먹어주마."
놈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좆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천천히 죽여주마."
칼을 움직인다. 끼이이이이이익! 맞닿은 칼이 마찰하며 비명을 질렀다. 칼끝은 놈의 목으로 향했다. 놈의 기가 움직였다. 짐승처럼 사나운 마기가 폭발하듯 터진다. 내 칼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흐하하하하!"
승리를 자신한 놈이 크게 웃으며 내 머리로 칼을 내리친다.
나는 기를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가속했다. 떨어지는 놈의 칼이 느릿했다.
굳이 뇌천류를 쓸 필요는 없다. 기를 담아 칼을 휘두른다. 내 칼은 놈의 칼보다 늦게 움직였음에도 더 빠르게 놈에게 당도했다.
서걱!
놈의 오른팔이 넓적한 칼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아아아아악!"
놈이 비명과 함께 상체를 숙였다. 놈의 마기가 터져 나왔다. 놈의 육체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색깔이 검게 변하고 머리에는 곤충 더듬이 같은 게 생긴다. 놈에게서 느껴지던 마기는 거짓말처럼 요기로 변했다.
‘인간인 척하는 요괴 느낌이 아니었다. 원래는 인간이었나? 역마신공(易魔神功)이군.’
설마 이런 어중이떠중이까지 역마신공을 익혔을 줄은 몰랐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1]
뇌천류(雷天流) 악뢰(惡雷).
일이 더 귀찮아지기 전에 찰나를 사용했다. 놈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 넣고 군청색 뇌전을 흘려보낸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놈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꿈틀거렸다. 군청색 뇌전은 악랄하게 그의 몸속에서 잔류했다.
1분 정도 지났을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놈은 돌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의 시체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런 어중이떠중이까지 역마신공을 손에 넣을 정도면…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고 있나?’
역마신공의 시작은 묵지련이다. 그러나 이 일이 묵지련의 짓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역마신공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으니까.
‘모르겠다. 내 일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만리서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비가 쏟아졌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 근처에 있는 낡은 객잔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여기저기 부서져 있지만 잠시 비를 피하기엔 딱 좋았다.
숲에서 가져온 젖은 나무를 한곳에 모으고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직.
뇌화(雷火)가 일었다. 젖은 나무든 뭐든 화력으로 몰아붙이니 불꽃이 활활 일었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불을 쳐다봤다. 가끔씩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졌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으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총 2개의 기척.
"선객이 있었군. 이런 폐가나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살 리 없으니… 자네도 비를 피하러 왔나 보군."
중년인 검객과 청년 검객이었다. 그들은 키가 컸으며 턱은 각졌다. 서로 닮은 것을 보아 가족인 듯했다. 다만,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확신할 순 없다. 이 세계에선 어린아이의 외모를 가졌어도 그 속내는 수백 살 먹은 노인일 수 있었다.
나는 중년인을 빤히 쳐다봤다.
고수였다. 경지는 대략 오기 중단. 숨겨둔 한 수나 법보 같은 게 있을 테니 나보다 경지가 낮다고 마냥 얕볼 수 없었다.
"저희가 잠시 이곳에서 비를 피해도 되겠습니까?"
척!
청년이 포권하며 정중히 물어왔다. 고수와 싸우는 건 귀찮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감사합니다. 저는 홍제유라고 합니다. 여기 옆에 계신 분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중년인도 내게 포권했다.
"고맙네. 나는 오산구검(五山求劍) 홍강후라고 하네. 자네는 별호가 어떻게 되시나?"
그들은 나와 거리를 조금 벌리고 앉았다. 그 거리가 중요했다. 검을 뽑아도 바로 닿지 않는 거리.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살짝 어이가 없었다. 경계해야 할 건 내가 아닌가. 불청객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나는 육포를 씹어 삼킨 뒤에 말했다.
"섬전도(閃電刀) 염구석이다."
"섬전도! 들어본 적 있네! 최근에 독고세가를 멸문시킨 장본인! 그 칼은 번개처럼 빠르다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명성이 높아지니 바로 알아보는군.
"그래. 그게 나다. 근데 오산구검이라는 별호는 들어본 적 없군."
"우리는 낭인일세. 여기 출신이 아니지."
"그 실력으로 낭인이라고?"
오기 중단쯤의 실력이면 어떤 세력이라도 쉽게 들어가 정착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자기가 문파를 세워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오기에 이른 실력자가 낭인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사연이 있네."
"어떤 사연이지?"
"심각한 사연은 아니네. 몸 담고 있던 문파가 멸문했을 뿐이네. 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지."
"멸문인데 용케 살았군."
"안 될 것 같아서 아들 녀석과 몸을 뺐지. 비겁하다고 생각하나?"
"관심 없다."
짧게 대답했다. 딱히 비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
"저. 염 대인.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청년이 내게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청년은 당황하며 손사래 쳤다.
"그, 그냥요? 별 뜻은 없습니다. 말하기 싫으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교로부터 임무를 받아서 서쪽으로 가는 중이다. 어떤 임무인지는 묻지 마라."
청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천마신교란 단어 때문일까. 뻣뻣하게 긴장했다. 나는 그에게 역으로 물었다.
"너희는 어디로 가는 거지?"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홍강후가 끼어들며 말했다.
"어디 수련장에 박혀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수련인 건 아니지. 무인이란 자고로 많은 것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는 내 아들이 좁은 우물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네."
"집 나오면 고생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집에 있어도 고생이더군."
홍강후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아들인 홍제유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저희도 서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유운상회가 배영시에서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배영시라면 나도 안다. 천마신교에 속해 있는 도시 중 하나니까.
"유운상회는 처음 듣는군."
"그럴 수도 있죠. 유운상회는 다소 비밀스럽게 움직이니까요. 일반인은 아예 상대하지 않기도 해서 소문이 잘 안 나거든요."
홍제유가 유운상회에 대해 설명했다. 강호를 유람하는 상회라고 한다. 일정 거리마다 자리를 잡고 장을 연다.
처음에는 몇 명 되지 않는 보따리 상인이었다. 그들은 귀한 영약을 팔았고, 영약을 원하는 무인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들은 유운상회가 되었고, 움직이는 시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커졌죠."
"정말 영약을 파나?"
영약은 쉽게 구할 수 없었기에 미심쩍었다.
"네. 저도 5년 전에 가본 적 있는데 영약을 구매했죠. 유운상회는 영약뿐만이 아니라 법기랑 무공도 팔아요. 거의 만물상이죠."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탐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