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5화 > 1805. 광명승천도
타닥, 타닥.
모닥불에서 시작된 온기가 낡은 객잔 내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적절한 온도에 수마가 몰려왔다.
홍강후와 홍제유 부자가 뭔가 떠돌고 있었는데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대충 강호를 돌아다니며 만난 요괴에 대한 것들이었으니까.
꾸벅꾸벅.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졸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기척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기를 운용했다. 수마가 단숨에 사라지고 머리가 생생해진다.
저벅저벅저벅.
감각이 활성화되자 빗소리를 뚫고 무언가가 진흙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많아 잘 보이지 않는다만, 인간의 발소리가 아니군."
"짐승이라면 좀 더 저돌적으로 달려왔을 겁니다. 요괴가 확실합니다."
홍 씨 부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나도 나서려다가 관뒀다. 이 둘이 나서서 요괴를 죽여주겠다는 데 굳이 내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
기척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객잔 밖을 쳐다봤다. 나무와 어둠, 그리고 비 때문에 보이지 않던 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살덩어리처럼 생긴 것들이었다. 팔과 다리, 몸통이 있지만, 그 덩치가 인간보다 몇 배는 컸다. 대충 10마리 정도가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그 몸에 진흙이 붙어서 꽤 더러워 보였다.
"수락귀(水落鬼)로군."
"보통 강이나 호수 근처에 서식하는 놈들이잖아요. 비 때문에 나온 걸까요?"
"요괴의 행동을 인간인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확실한 건 이놈들이 우리를 먹으려 든다는 게다. 염 대인은 가만히 있으시게. 자리를 내어줬으니, 저놈들은 우리가 처리하겠네."
"괜찮겠나."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의상 한 번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홍제유는 몰라도 홍강후의 실력이라면 수락귀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네."
"강호를 떠돌다 보면 저런 놈들은 쉽게 맞닥뜨리지요. 별거 아니니 걱정마세요."
"제유야. 상대가 그 누구라도 방심하지 말거라. 강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방심이다."
"아버지. 그 말은 백번도 넘게 들어서 지겨울 정도라고요."
홍제유는 아비의 잔소리를 피하듯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나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홍제유의 움직임은 얼핏 보면 단순했다. 허나 단순함 속에서 깊이가 느껴진다.
‘정순한 기운을 보아 정파 쪽 무공이군.’
홍제유는 수락귀를 한 마리씩 차근차근 썰어 죽였다. 수락귀가 단체로 덮쳐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빠져 거리를 벌린다. 그 모습은 무인이라기보다는 사냥꾼에 가까웠다.
"무거우면서도 유의 묘리가 담겨있군. 무슨 검법이지?"
"오산검이네.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검법에 가깝네만, 달리 말해서 다른 검법의 장점을 취했다고 할 수 있지."
"네가 만든 검법인가?"
"내겐 그 정도 능력은 없네. 오산검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만드신 검법이지."
홍강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건 정파 쪽과 달랐다. 정파는 기본적으로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옛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도 무공이 잘 발전하지 않는 이유였다. 짜깁기한 무공? 정파인들은 절대로 자신의 무공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부끄러운 일이니까.
‘낭인 생활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정파인 같진 않군.’
그래도 말투나 성정은 정파인 같긴 했다.
나는 홍제유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홍강후에게 물었다.
"네 아들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나?"
"겨우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게 키우지 않았네."
그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눈은 홍제유에게 콱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수락귀들이 능력을 사용했다. 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더니 물웅덩이가 되어 홍제유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홍제유는 나무를 향해 뛰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나무 몸통을 밟으며 위로 올라간 것이다.
물웅덩이가 된 수락귀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수락귀들이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포위당했군."
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홍강후는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다리가 움찔 떨리는 것을 보니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아직 괜찮네. 나무 위에 있으니 다른 나무로 뛰어서 포위를 벗어나면 그만이네."
겨우 이 정도 위기에 나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남의 일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지켜봤다.
홍제유가 다른 나무로 뛰어 수락귀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수락귀가 하급 요괴라고 해도 짐승처럼 멍청하진 않았다. 수락귀의 포위망은 여전히 견고했다. 이어서 수락귀는 홍제유가 올라탄 나무에 돌진했다.
나무가 부서진다. 홍제유가 놀라며 다른 나무로 뛰었다.
"겁먹었군."
겁먹은 순간부터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게 도움을 바라는 눈치였다.
"저 멍청이가…!"
홍강후가 혀를 차며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 존재감에 홍강후가 몸을 긴장시켰다. 나 또한 느슨해진 의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또 뭐 하는 놈이지. 아니, 년인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그 존재를 잘 볼 수 있었다.
나처럼 삿갓을 쓰고 검은색 옷을 입었다. 몸의 선은 약간 굴곡졌다. 여자가 확실했다. 가슴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골반 또한 마찬가지로 과하지 않다.
‘조각상 같다고 해야 할까. 옷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군.’
황금률이라고 해야 하나. 팔 길이, 다리 길이, 몸의 밸런스 등등 비율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얼굴은 삿갓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자면 미인일 게 틀림없었다.
‘고수의 풍모가 뭔지 아는군.’
그녀는 차분한 걸음으로 수락귀를 향해 걸어갔다. 수락귀들은 뒤늦게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홍강후는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으나 나서지 않았다. 여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흥분해 있던 수락귀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그녀는 차분히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진흙 위를 사뿐사뿐 걸으며 수락귀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그녀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고 검은 끊기지 않았다.
‘진흙 위를 밟는데 발걸음이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락귀가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검법에 집중했다. 정파의 검법도, 사파의 검법도 아니었다. 마도의 검법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검법은 간결하고 너무 효율적이었다. 일부러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날카로움을 세운 듯한 검. 사람을 죽인다는 이상을 실현한 듯한 검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수란귀를 시체로 만든 그녀는 검을 갈무리했다. 우리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홍강후의 긴장이 풀렸다.
"실력은 우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나쁜 이는 아닌 모양이군."
"저 검술, 살수의 검술인가?"
"응? 아, 어떻게 보면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노골적일 정도로 효율적인 검술로 보이니까. 그러나 살수의 검은 아닐세. 살수의 검은 저토록 깊지 않네. 저건 황실의 검술일세."
"…황실의 검? 황실 소속의 검객이라고? 군부 쪽이 아니라 황실?"
내가 되물었다. 제국의 황실은 대놓고 활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물며 여긴 황실이 있는 제국의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황실의 검객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군부의 검술은 저것보다 훨씬 더 투박하지. 황실 소속이 맞네."
"…그 황실의 검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그리고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보게."
그녀와 홍제유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홍제유는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청력을 높여보니 검술이 뛰어나다, 구해줘서 고맙다 등등의 말들이었다. 여검객은 간간이 대답하며 듣기만 했다.
‘목소리가 맑고 좋네.’
이윽고 여인이 낡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삿갓을 썼으나, 그것만으로 비를 온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옷과 등에 멘 보따리는 흠뻑 젖어 있었다.
"비가 너무 억세게 오더군. 잠시 여기서 쉬어가도 되겠나?"
목소리는 고왔다. 음색은 20대의 것이다. 문제는 그 말투가 꼰대스럽다는 것이었다.
‘경지는 오기 중단…. 오기의 경지이니 20대 일리가 없지. 못해도 200살 이상이겠지.’
이 세계에서 강한 놈들은 죄다 몇백 살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홍 씨 부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 객잔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가장 먼저 왔고, 모닥불도 내가 만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마음대로 해라."
"고맙네."
여인이 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내 왼편에 앉았다. 옷이 젖어 있어 철퍼덕 소리가 났다.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삿갓을 벗어 조심히 옆에 뒀다.
드러난 얼굴은 예상 이상의 미녀였다. 깨끗한 피부는 백옥과도 같았고, 눈이 크고 눈매는 부드러웠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머리카락이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묶어 올려 비녀로 고정했다.
‘무공의 영향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했나. 드물긴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녀의 외모에 홍제유는 멍하니 쳐다봤고, 홍강후는 더 경계했다.
"나는 백란이라고 하네.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낭패당했지 뭔가."
"저, 저희도 비를 피하려고 여기에 들어왔어요. 아, 전 홍제유입니다."
"오산구검 홍강후네. 자네의 검술실력이 범상치 않은 듯한데… 별호가 뭔가?"
"강호에 출사표를 던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별호는 없네. 자네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백란이 나를 보며 물었다.
여자답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확 덮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허나 아까 실력을 보면 그것도 쉽지 않겠지.
"섬전도 염구석이다."
"흐음. 그런가."
백란은 젖은 옷을 잡고 쭉 짰다. 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실 출신이냐?"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씨 부자가 숨을 삼켰다. 이 세계에서 황제의 권위는 막강하다 못해 신과 비슷할 정도다. 그에 황제와 황실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다행히 백란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네. 내 검술을 보고 알아차린 건가? 눈썰미가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