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6화 > 1806. 광명승천도
"그렇네. 내 검술을 보고 알아차린 건가? 눈썰미가 좋군."
"황실의 검술을 보는 건 이미 처음이었다. 검술을 보고 알아낸 건 내가 아니다."
백란의 시선이 홍강후에게 향한다. 고작해야 출지의 경지에 불과한 홍제유는 우리 사이에 낄 자격이 없었다. 홍제유도 그 사실을 알기에 조금 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산구검이라 했나? 미안하군. 강호초출이라 처음 들어보는 별호일세. 황실의 검은 알아보는 이가 별로 없지. 자네 혹시 황실에서 일했나?"
"강호를 떠돌다 보니 황실 출신의 검객을 몇 번 본 적 있을 뿐이네."
"떠돈다라. 낭인인가?"
"그렇네."
"지금도 그냥 떠도는 건가? 아니면 정착할 곳을 찾고 있나?"
의외로 백란은 말이 많았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라 정보를 캐내려 하고 있다. 직업병일 가능성이 컸다. 홍강후는 그런 백란이 거북해 보였다.
홍강후가 잠시 머뭇거리자 틈을 보고 있던 홍제유가 나섰다. 백란의 미모에 홀라당 넘어간 게 확실했다.
"저흰 배영시로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곳에서 유운상회가 장을 열거든요! 여기 염 대인께서도 저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를 걸고넘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운상회? 그냥 상회는 아닌 모양이군."
홍제유는 유운상회에 대한 모든 정보를 말했다. 그것만 하면 좋을 텐데. 홍강후와 관련된 정보까지 말한다. 덕분에 홍강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 새끼 나중에 존나 맞겠네.’
나에 대한 정보는 말하지 않는다. 내 눈치를 봐서? 절대 아니다. 그냥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전부 떠벌렸을 거다. 미녀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말이다.
백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녀는 자기 미모를 이용할 줄 알았다.
"유운상회에 관심이 생기는군. 나도 자네들과 함께해도 되겠나?"
"물론이죠! 제가 유운상회에 대해 좀 알고 있는데 도착하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든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녀가 동행하겠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홍강후는 제 아들을 한 번 보고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렇게 하게."
홍제유는 유운상회에 대해 한참을 떠들다가 밤이 깊어지자 꾸벅꾸벅 졸더니 잠들었다.
"백란이라고 했나. 황실 어디 출신인지 말해줄 수 있나?"
홍강후가 조용히 물었다. 백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실에 관한 것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네. 미안하네. 그리고 충고하나 하자면 황실에 관한 관심은 접는 게 좋을 걸세. 황실과 관련되면 대부분 일이 좋지 않게 끝나니."
황실 출신의 검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홍강후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묘했다.
"…충고를 받아들이지."
홍강후는 자기 아들과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나와 백란은 멍하니 모닥불을 쳐다봤다.
‘백란을 덮치는 건 무리겠군.’
괜히 엘프 지배 조교 어플이 아쉽다. 인간에게도 통했다면 백란은 지금 내 밑에 깔려 앙앙거리고 있을 텐데.
꼬르륵.
백란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백란이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든다.
"…부끄럽군. 여기까지 오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서 말이야."
"식량도 안 챙겼나?"
"오늘 낮에 다 소모했네. 곧 도시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지."
나는 그녀의 봇짐을 힐끔거렸다. 봇짐은 크지 않았다. 식량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공간함을 꺼내 그녀에게 육포를 건넸다.
"거부하기에는 너무 허기지군. 고맙네."
백란은 육포를 먹기 좋게 찢어 작은 입에 넣었다. 그녀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곧 그녀의 눈이 커진다. 하얀 머리카락과는 다른 검은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맛있군! 내가 평생 먹어본 육포 중에서 제일일세! 이 육포는 어디서 얻었는가. 혹시 직접 만들었나?"
"아는 사람이 만들어줬어."
유리아가 만들었다. 최상급의 소고기와 향신료를 듬뿍 사용했다.
"그런가. 그 인맥이 부럽군. 어떻게 나도 구할 수 없나? 이런 육포가 있으면 여행이 즐거울 것 같군."
"못 구해. 그녀는 아주 먼 곳에 있으니까."
"아쉽군."
나도 육포를 입에 넣어 질겅거렸다. 질겅질겅. 오물오물. 나와 그녀는 한동안 육포를 씹었다.
그녀에게 추가로 육포를 건네줬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육포를 받아 봇짐에 넣었다. 뻔뻔한 면이 있었다.
"아까 들어보니 자네의 본래 목적은 유운상회가 아니었던 듯하군."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군."
"내 성격이 원래 좀 이러네. 호기심이 많아서 문제지. 황실에서도 이 성격 때문에 제법 고생했네."
"그쪽의 목적을 먼저 말하면 나도 알려주지."
백란이 기막을 쳤다. 홍 씨 부자가 듣지 못하도록.
"거래인가. 나쁘지 않지. 나는 천마신교로 향하고 있네. 모종의 임무를 받았지. 무슨 임무인지 말할 수 없네."
황실 출신 검객이 누구에게 임무를 받겠나. 황실의 임무겠지.
‘천마신교와 무림맹의 전쟁 때문에 찾아온 건가.’
그러고 보니 백란은 강호초출이라고했지, 황실 소속이 아니라고 한 적 없었다.
"나도 임무를 받았다. 임무의 내용은 말할 수 없다."
"으음. 그런가."
"그런데 괜찮겠나. 유운상회가 열리는 배영시는 천마신교가 있는 곳과 정반대다."
"괜찮네. 급한 임무는 아니니까. 유운상회에 들렀다가 가도 늦지 않네."
그녀는 육포를 오물거리면서 질문을 던져왔다. 이름의 유래, 부모 형제의 여부, 고향, 취미, 무공 등등. 나는 대충 둘러대다가 졸린다며 눈을 감았다.
***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천강성 시스템에 출석했다. 오늘이 일주일째였다.
‘천마신교를 떠난 지도 일주일이군.’
『출석 이벤트! 일주일을 출석할 때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현재 7일 출석 완료.』
『출석 일주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랜덤으로 주어집니다.』
『영지초(靈芝草)가 주어집니다.』
영지초. 초(草)라는 말과 다르게 버섯이었다. 물론 천강성 시스템이 준 물건인 만큼 평범한 영지버섯은 아니다.
‘영지초는 달리 불로초라고도 불린다지.’
손에 쥔 영지버섯에는 엄청난 영기가 느껴졌다.
"호오. 영초로군. 이 근처에서 얻었나? 자네에게 운이 따라주나 보군."
객잔 문 앞에 백란이 서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 걸까. 그녀의 기척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언제 온 거지?"
"지금 왔네. 토끼를 잡아 왔지."
"홍 씨 부자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네. 그 영지초는 조심히 간수하게. 영기를 가진 영지초는 복용자의 수명을 늘려주는 효능이 있어서 욕심의 대상이 되네."
"그쪽은 별로 욕심이 없어 보이는데."
"후후. 내 탱탱한 피부를 보게. 이처럼 젊은데 영지초 따위에 관심이 가겠나."
백란이 한 손으로 자기 뺨을 문지르며 주책을 떨었다. 그녀의 손에는 굳은살이 없었다. 환골탈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몇 살인데?"
"비밀이라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자네보다 젊다는 거지."
"내 나이는 네가 어떻게 알고."
"다~ 아는 수가 있네."
백란이 미소 지었다. 그 옅은 미소는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든다. 나는 영지버섯을 공간함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객잔에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향해 홍제유가 소리친다.
"아침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준비된 건 토끼탕이었다. 홍제유는 나와 백란에게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을 건넸다. 백란의 그릇에 토끼 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었다.
‘이 새끼가 대놓고 사람 차별하네.’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관뒀다. 그랬다간 홍강후를 상대해야 될 테니까. 나무 숟가락으로 토끼탕을 한입 떠먹은 나는 바로 그릇을 내렸다.
"맛없어서 못 먹겠다."
나는 육포를 꺼내 씹었다. 원래 무협지 주인공들은 육포를 잘 씹는다.
"이, 이 정도면 제법 먹을만 한데요? 백란 님은 어떻습니까?!"
"그냥저냥 먹을만 하네."
아침 식사를 끝낸 우리는 서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아무도 안 볼 때 품에서 만리서종을 꺼내 방향을 확인했다. 만리서종은 어제와 똑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번에 객잔 갔을 때 사파 고수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검을 뽑더니…."
홍제유는 쉬지 않고 쫑알쫑알 거렸다. 주로 백란을 향해. 백란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말이 많을 것 같은 그녀는 의외로 조용했다.
결국 홍강후가 홍제유의 어깨를 잡았다.
"제유야. 조용하거라. 남자는 말이 많아선 안 된다."
"아버지. 그건 편견입니다. 요즘 여자들은 과묵한 사내보다 말 잘하는 사내를 좋아한다고요."
"나는 과묵한 사내가 이상형이네만."
홍제유가 입을 다물었다. 백란에게 잘 보이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나는 과묵한 무림 고수를 연기하고 있었기에 과묵했다. 백란의 이상형에 완전히 적합하다는 뜻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며 걷던 우리는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쉬기로 했다. 홍 씨 부자는 식량을 구하러 갔고, 백란은 적당한 나무 아래에서 검을 손질했다.
나는 그녀의 검을 빤히 쳐다봤다. 수많은 검을 봤기에 안다.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대단한 검이군. 법기인가?"
백란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녀검(烈女劍)이라고 하네. 검의 주인의 신념과 맹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네."
"반대로 말하면 신념과 맹세가 꺾이면 부러진다는 말이군."
"그렇지. 하지만 이 검이 부러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네. 절대로."
백란이 말했다. 가볍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 열녀검에 건 신념과 맹세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
"비밀일세."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점심은 사슴 고기였다. 이번에도 맛없어서 한 입 먹고 일어났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거리를 벌려 인벤토리에서 스테이크가 놓인 접시와 테이블을 꺼냈다. 따끈따끈한 스테이크에 군침이 싹 돌았다. 와인까지 꺼내니 금상첨화다.
나만의 고급스러운 점심 식사를 하려는 찰나였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백란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년은 어떻게 기척을 숨기는 거지?’
이번에도 우연일 리가 없다.
‘황실 살수 출신인가.’
꿀꺽.
그녀의 하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홍 씨 부자의 사슴 고기는 팽개치고 여기서 따로 음식을 먹다니…. 그건 예의가 아닐세."
"내가 맛없는 건 먹지 못해서. 그리고 이건 나눠 먹기엔 귀하거든. 같이 먹겠나?"
"방금 나눠 먹기엔 귀하다고 하지 않았나?"
"미녀와 함께 먹으면 음식은 더 맛있어지는 법이지."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백란이 테이블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스테이크와 와인, 포크와 나이프를 줬다. 나를 따라 하듯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쥔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자 그녀도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썬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다. 고기를 씹자마자 육즙이 폭발하듯 나왔다. 살짝 달콤한 소스는 스테이크에 감칠맛을 더한다.
백란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다시 없을 진미일세…!"
그녀는 짧은 감탄을 내뱉은 후 스테이크를 써는 데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