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7화 > 1807. 광명승천도
"이래 보여도 진미란 진미는 꽤 먹어보았다고 자부한다만, 수테이크? 라는 요리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색다른 요리더군. 단순히 구운 고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풍미가 엄청났으니. 포도주라는 술도 무척 좋았네!"
식사를 끝내고 백란이 흥분한 듯 감상을 내뱉었다.
"과장이 심하군. 내가 듣기로는 세상의 모든 진미가 황실로 모인다고 하던데."
"그 말은 사실이네. 황실에는 온갖 귀한 음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진상되지. 모두 황제 폐하를 위한 것들이지. 일개 검사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그 귀한 음식들을 먹겠나."
"진미란 진미는 꽤 먹어봤다며."
"몰래 먹어봤지. 황실에는 인맥이 중요하다네."
백란이 웃으며 말했다. 황실에 자기 인맥이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인맥을 만들기 쉬웠을 것이다.
어쨌든 식사를 끝낸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었고, 적당히 큰 나무 아래에서 노숙을 준비한다. 저녁 식사도 사슴고기였다. 낮에 잡은 사슴 고기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예 입도 대지 않고 떨어졌다.
냇물이 흐르는 곳에 적당히 자리 잡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최근에는 치킨을 먹지 않았다. [다크 문] 세계의 치킨을 개발한다고 질리도록 먹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두 번 다시 치킨을 먹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지금처럼 치킨이 땡겼다.
치킨 포장을 뜯자마자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양념의 달콤한 냄새는 식욕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반반 치킨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백란이었다. 그녀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잖아.’
방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깨닫고 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내 기감을 속일 정도로 은신술이 뛰어나다. 그게 아니면 순간이동을 했던가.’
어느 쪽이든 만만하게 볼 여자가 아니었다.
"크흠. 같이 먹겠나?"
"사양하지 않겠네."
그녀가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역시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결국 나와 그녀는 나란히 앉아 치킨을 뜯었다.
바사삭!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으로 촉촉했다. 치킨을 한 입 베어 문 백란은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나와 치킨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닭고기…? 내가 알던 닭고기랑은 전혀 다르군! 이 또한 진미로다!"
연신 감탄한 그녀는 빠른 속도로 치킨을 뜯어 먹는다. 그 작은 입에 치킨이 끊임없이 들어가는 광경은 꽤 신기했다.
나는 그녀에게 유리컵에 담긴 콜라를 건넸다. 투명한 얼음이 둥둥 떠 있었다.
콜라를 받은 백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싼 잔이로군. 근데 이 검은 물은 뭔가?"
"아아. 이건 콜라라는 거다. 치킨의 친구지."
"조금 꺼림직하지만… 자네를 믿고 마셔보겠네."
콜라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두 눈을 부릅떴다. 목이 따가운지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쓰다듬었다.
"별로인가?"
"…맛있다! 너무 생소한 맛이라서 당황했을 뿐이네. 목을 때리는 음료라니…. 이런 음료가 세상에 존재하는지 몰랐군!"
백란은 희희낙락하며 콜라와 치킨을 먹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닭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치킨을 처음 먹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발골 실력이 뛰어났다.
"자네는 정말 신기하군. 이런 음식들을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건가?"
"내가 발견한 게 아니야. 얻은 거지."
"말하기 싫다면 됐네. 얻어 먹은 입장에서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지."
그녀는 흐르는 냇물에 손과 입을 씻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백란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야망이 무엇인가?"
"야망?"
"자네 같은 남자가 야망을 갖지 않을 리가 없지. 혹시 천마신교의 장로가 되는 게 야망인가?"
고작 장로 따위에 만족하라고? 라고 할 만큼 천마신교의 장로직은 낮은 지위가 아니었다. 판타지 세상으로 비유한다면 어지간한 대귀족급 이상의 지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출생이 평범한 염구석이 오를 수 있는 최대의 지위가 장로직이다.
"맞다. 장로가 될 수 있으면 좋지."
"…그 이상의 자리를 원하는가. 자네는 욕심이 많군."
"나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보면 안다네. 자네는 겨우 장로직에 만족할만한 인물이 아니야. 그 이상. 부교주…. 혹시 천마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건가?"
"……."
입을 다물었다. 천마신교는 일개 문파가 아니다. 왕국에 가깝다. 그리고 천마는 왕이다. 천마에 대해 멋대로 떠드는 것은 반역죄나 다를 바 없었다. 백란의 목적을 알 수 없는 이상 말을 아끼는 게 나았다.
"천마의 자리는 혼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닐세. 정말로 천마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게. 천마라고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네."
천마.
내가 떠올린 것은 이 세계의 천마가 아니라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천마였다.
마천의 왕. 모든 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놈. 만약, 그놈이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동료를 만들어서 천마의 자리에 오를까? 그걸 놈이 인정할까?
‘개소리지. 천마는 오로지 천마로서 지고해야 한다.’
동료따윈 필요 없다.
"천마는 만마 위에 군림해야 한다."
"패도적인 말이구나. 허나 그 무엇보다 천마다운 말이로다."
백란은 언제나처럼 옅게 웃으며 멀어졌다.
***
우리는 목적지인 배영시에 도착했다. 제법 큰 도시였다. 동시에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이기도 했다.
‘배영시에는 마가(魔家)가 있다.’
천마신교의 시작을 함께한 여섯 가문. 그중에 하나인 윤가(尹家)가 배영시의 지배자다.
‘마가가 옛날에 비해 영세했다고 하더라도 마가다.’
그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저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으니 조용히 움직여야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운상회라는 대단한 상인들이 있다면 분명 눈에 띌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에 홍강후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유운상회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장사하지 않는다고. 당연히 대놓고 장사하지 않네. 날 따라오게."
홍강후를 따라 걸었다. 그는 도시 안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유운상회는 진귀한 것을 판매하네. 영약, 법기, 무공…. 모두 하나 같이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지. 그리고 보물에는 파리가 꼬이는 법이네."
유운상회가 대놓고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도시 바깥쪽에 졸졸 흐르는 강이 나왔다. 강은 그리 크지 않았다. 홍강후는 바위로 이루어진 징검다리로 걸어갔다. 징검다리 앞에는 두 명의 무인이 지키고 있었다. 2명의 무인은 통일되지 않은 차림새에 장비한 무기마저 검과 창으로 서로 달랐다. 고용된 낭인이 확실했다.
"정지. 여긴 통제구역입니다. 선배님들이라 하시더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홍강후를 보며 긴장했다.
"진정하게. 우린 자네들과 싸우러 온 게 아닐세. 강도도 아니지. 우린 손님이지."
"시장을 찾아오셨군요. 죄송합니다만,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알고 있네. 손님 대접을 받으려면 돈이 꼭 필요하지. 돈이라면 충분히 있네. 오늘을 위해 모아뒀지."
홍강후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줬다. 은자나 금자가 아니라 구슬이 들어있었다. 영기(靈氣)를 품은 구슬, 천옥(天玉)이다.
돈을 확인한 낭인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환영합니다, 손님."
우리는 천천히 징검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바위를 건너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원래는 숲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칼을 찬 무인이나, 호화로운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부자들이 허름한 천막을 돌아다녔다.
나처럼 삿갓을 쓰고 있는 백란이 작게 감탄했다.
"결계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네만, 눈을 가리는 용도로는 괜찮은 결계로군."
다른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홍강후는 우리들을 바라봤다.
"하하.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이만 헤어지지. 아,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천옥이라네. 천옥이 아닌 화폐는 의미가 없지. 돈이 급하다면 자네들이 가진 물건이나 무공을 팔면 되네. 구경만 해도 식견이 오를 테니 손해는 없을 걸세."
그의 아들 홍제유는 진지한 눈으로 백란을 바라봤다.
"백란 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운상회에 아는 상인이 있는데…."
"홍 소협, 제안은 고맙네만, 나는 따로 움직이겠네. "
백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기운까지 서려 있었기에 약해빠진 홍제유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수긍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연이 된다면 우린 또 만날 수 있을 걸세."
백란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홍 씨 부자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영약 팝니다! 값비싼 영약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약 구매합니다! 절대 속이지 않고 정가에 구입합니다!"
"고수님들! 좋은 법기 있습니다! 이 법기가 있으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혈랑의 무공 있습니다! 무당파 장로를 죽인 혈랑의 무공입니다!!"
상인들이 소리치며 호객행위를 이어간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영약 상인의 가판대를 훑어봤다.
대부분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약들이었다.
‘오. 괜찮은 것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쉽게 구할 수 없는 영약이 몇 개 있다. 가격은 최소 천옥 15개.
‘이게 맞는 시세인지는 잘 모르겠군.’
이런 시장은 좀처럼 없어서 비교하기 힘들었다.
현재 내가 가진 천옥은 606개. VIP 레벨을 올리기 위해 모으는 중이었다.
"손님. 패별초(覇鼈草)에 관심 있으신 모양이군요. 눈썰미가 아주 좋으십니다. 이 패별초는 해가 지지 않는 곳에서 양기를 듬뿍 받으며 성장한 영초입니다. 손님처럼 뇌기(雷氣)나 화기(火氣)를 수련하시는 분에게 최적인 영약이지요."
상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상인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