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8화 > 1808. 광명승천도
"진정하십시오. 저는 손님에게 시비는 거는 게 아닙니다."
상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 개의 눈이 서로 달랐다. 왼쪽 눈은 검은색이고 오른쪽 눈은 황금색이었다. 황금색 눈은 이질적인 기운이 돈다.
"그 눈은 법기인가?"
"네! 오기의 고수님이십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금정안(金晶眼)이라는 법기입니다! 대상의 기운을 알아볼 수 있지요. 손님께서는 뇌기와 마기를 수행하고 계시죠. 여기 패별초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상인의 강함을 가늠했다. 경지는 출지 초단. 전력을 다한다면 일격에 죽일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죽이고 물건들을 챙기고 싶군.’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자들 중에는 나도 쉽게 볼 수 없는 놈들이 많았다. 당장 홍강후와 백란만 해도 오기의 고수다. 눈앞의 약해빠진 상인이 나댈 수 있는 것도 유운상회의 힘을 믿기 때문이겠지.
"너도 유운상회 소속인가?"
"예, 뭐. 여기 있는 상인들은 모두 유운상회 소속입니다."
"이 영약들은 다 어디서 구한 거지? 직접 산에서 캐낸 건 아니지 않나."
"딱히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말씀해 드리죠. 유운상회에서 구매했습니다. 유운상회와 저는 계약 관계죠."
"…계약 관계? 이런 값비싼 영약을 직접 판매하지 않고 계약 상인들을 쓴다고?"
유운상회의 입장에서 그건 더 손해 아닌가.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아마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그보다 손님. 패별초는 정말 손님에게 도움이 될 영약입니다."
"도움은 무슨."
괜찮은 영약이긴 해도 당장은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삼정(三頂)의 경지에 도움이 되는 영약이 필요하다."
"헉. 삼정의 경지를 노리고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선 보조 영단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건 물량이 너무 적어서…. 그리고 보조 영단은 대형 세력에서 집중관리 품목 대상이라 시중에 잘 풀리지도 않습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품에서 공간함을 들었다. 공간함에서 꺼낸 건 영약이었다.
『백야초(白夜草)
피를 맑게 해주는 약초입니다.』
일주일 출석 체크 보상으로 자주 나오는 약초 중 하나였다. 물론 평범한 약초는 아니다. 이 약초에는 영기가 서려 있다.
"우오오! 최상급의 백야초군요!"
"영약을 구매한다고도 들었다. 살 거냐?"
"피를 맑헤 해주는 백야초는 해독약의 주재료가 되죠. 게다가 영기까지 품고 있으니… 당연히 구매합니다! 천옥 네 개! 어떻습니까?!"
"고작 천옥 네 개? 감히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들어? 뒈지고 싶은 거냐?"
기세를 끌어올리고 살의로 상인을 압박한다. 상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한다. 상인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네 개도 충분히 값을 쳐준 겁니다! 영기를 가진 백야초이긴 하나, 본래 백야초는 해독과 병자를 위해 사용하는 약초! 그 이상의 값은 쳐줄 수 업습니다!"
상인이 악을 쓰듯 외쳤다. 그 절박한 외침에 시선이 이쪽으로 모인다. 유운상회 소속의 낭인들이 슬그머니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대부분 출지의 경지에 이른 무인에 불과하지만 숫자가 많았다. 나는 기세를 가라앉혔다.
‘쯧. 압박해서 값을 후려치려고 했는데… 안 되네.’
상인은 헉헉거리면서 천옥 4개를 준비했다.
"여, 여기 천옥 네 개 있습니다…!"
"거래는 나중에 하지. 일단 시장부터 둘러봐야겠다."
"그 백야초를 천옥 네 개 이상으로 거래할 상인은 없을 겁니다!"
"시끄럽다. 둘러보고 올 테니 기다려라."
나는 탐욕을 숨기며 가판대를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상인에게 물어봤다.
"이 장갑은 뭐지?"
"독생(毒生)이란 이름의 장갑입니다. 착용자의 기를 독기(毒氣)로 바꾸는 법기지요."
"기의 속성을 바꾸는 법기라. 귀한 물건이군. 얼마지?"
"천옥 육십 개입니다. 싸지요.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이런 물건 구경 못 합니다!"
나는 조용히 계산해봤다.
‘괜찮은 영약의 가격이 천옥 15개…. 60개면 영약 4개의 가격. 진짜 싸군.’
이건 안 사면 손해 아닐까. 내가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먼저 산다면?
‘아니. 잠깐만.’
독생이란 법기는 너무 싸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싼 거지? 주위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는 걸 봐선 나보다 먼저 온 손님만 해도 수십 명은 될 것이다.
‘가격에 속지 말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제대로 된 법기가 아니군. 독기가 사용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거냐?"
상인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합니다만… 해독약을 사용하면 됩니다. 독공을 수련할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개소리. 기를 독기로 바꾼다면 단전에서부터 중독된다는 뜻이잖아. 그건 아무리 독공을 익혔어도 버티기 힘들어. 아주 개좆같은 걸 파는군."
"그, 그래도 비장의 한 수는 될 겁니다. 독생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이 맞다. 비장의 한 수로는 제법 쓸만해 보였다. 위험할 땐 뭐든지 해야지. 하물며 내겐 완전 회복까지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무릅쓸 정도로 이 장갑이 대단한 물건인 건 아니었다.
"필요 없다."
나는 다른 법기들을 살펴봤다.
이젠 내 스킬이 된 유성검. 그 본래의 법기인 유성검천 수준의 법기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기대했군.’
실망감이 크게 다가온다. 기대가 너무 컸었다.
‘이딴 곳에서 대단한 유성검천처럼 대단한 법기를 구할 순 없지.’
쓸만해 보이는 법기들은 죄다 나사가 빠진 것처럼 문제가 하나씩 있었다. 멀쩡한 것들은 효과가 별로였다.
그럼 이들이 판매하는 무공은 어떻지?
"무당파 장로를 죽인 혈랑의 무공입니다! 그 혈랑의 무공! 단돈 천옥 300개에 모십니다!"
혈랑.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무당파 장로라면 삼정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일 가능성이 크다. 무인들이 그의 가판 앞에 모여들었다.
"정말 무당파의 장로를 죽인 것이오?"
"물론 사실입니다! 20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요. 혈랑이라는 낭인이 있었는데 강호를 유람하다가 사파 쪽 인물과…."
상인이 줄줄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원한과 원한이 쌓여 무당파 장로와 혈랑이 싸우다 공멸했다는 이야기였다. 완전한 승리도 아니고 공멸. 그렇기에 더욱 신빙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정말 혈랑의 무공이오?"
"유운상회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혈랑의 무공인 십일혈조(十日血爪)입니다."
"오오. 그렇단 말이지!"
무인들이 두 눈을 빛냈다. 무인들은 법기나 영약 이상으로 무공을 원했다. 당장 써먹을 수 없는 무공이라도 자신이 익힌 무공에 다른 방식으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무인들이 침을 삼키며 옆으로 피했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고수의 풍모가 그들을 압박한 것이다.
"정말로 무당파 장로를 죽인 무공인지 궁금하군. 한 번 줘봐라. 내가 직접 확인해주지."
"아, 안 됩니다! 구입하시기 전까지는 내용을 볼 수 없습니다!"
"내용이 사기인 건 아니고?"
"사기라뇨?! 유운상회의 이름을 걸고 절대 아닙니다!"
"난 유운상회의 이름 따윈 믿지 않는다. 혈랑의 무공은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을 수 없다."
상인이 눈동자를 굴린다. 도움을 바라는 눈치다. 주위에 있는 무인들은 헛기침하며 모른 척했다.
"그, 그럼 앞부분만…. 앞부분만 보셔야 합니다! 앞부분만 보시겠다고 약속하시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약속하지."
"별호와 이름을 걸고 공언해주십시오!"
"나는 천마신교의 적멸대 소속인 섬전도 염구석이다. 됐나?"
"반드시 앞부분만 보셔야 합니다!"
상인이 무공서를 건넸다. 나는 무공서 앞부분을 읽었다.
"……."
십일혈조의 구결 앞부분을 마음속으로 외운다.
『십일혈조(十日血爪)에 사술이 숨겨져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십일혈조의 습득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천강성 시스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술이 걸려있다고?’
이 책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강성 시스템을 의심할 수는 없다. 천강성 시스템을 통해 얻은 이득이 몇 개인데.
‘구결 자체가 사술의 구결인가.’
나는 책을 덮었다.
"어, 어떻습니까? 대단한 무공이지요?"
정말로 앞부분만 읽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상인이다. 상인은 십일혈조에 사술이 걸려있는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무슨 사술을 왜 걸어둔 거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살의를 끌어올렸다.
"너 이 새끼…. 이 책에 사술을 걸어뒀군!"
상인에게 무공서를 집어 던졌다. 상인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그는 흐르는 피도 닦지 않고 외쳤다.
"사술이라니! 무슨 소리이십니까?! 이건 혈랑의 무공인 십일혈조입니다! 사술이 아닙니다!"
"병신인가. 이 책이 사술이 아니라 사술이 걸려 있다고 말했다."
"아닙니다! 사술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 네가 직접 구결을 외워보던가."
"이건 판매하는 물건입니다! 제가 어떻게 읽겠습니까!"
"지랄. 무당파 장로를 죽인 무공인데 네가 한 번도 안 읽어봤다고? 네가 무공을 수련했다는 사실은 손만 봐도 알 수 있다. 딱 보니 창을 수련했군."
"저는 무인인 동시에 상인입니다! 상품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짓은 안 합니다! 전 십일혈조를 읽은 적 없습니다!"
"십일혈조에 교묘하게 사술을 걸어뒀으니 안 읽었겠지. 사술이 아니라면 직접 여기서 구결을 외워서 증명해봐라. 그럼 인정해주마."
"크으윽…."
상인이 주츰거렸다. 그 태도에 주변 무인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기의 고수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터…. 정말 사술이 걸린 무공인가?"
"저놈의 태도를 보니 그런 것 같군."
"이봐, 장사꾼. 당장 십일혈조의 구결을 읽고 증명해라. 증명하지 못하면 우리를 속인 죄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진다. 무인들이 내뿜는 기세에 압도당한 상인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직접 구결을 외워서 안전하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상인은 자리를 만드는 척 주변을 정리하다가 서랍에서 연막탄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펑!
거대한 연기가 주위를 가린다. 상인은 보법을 밟으며 도망쳤다. 기척도 사라지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은밀함에 특화된 보법이다. 살수의 보법인가.’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천안을 개안해 연막 속을 꿰뚫어 봤다. 나는 도망치는 상인의 뒤를 쫓았다.
‘잘 됐다. 놈이 날 기만했으니 명분은 내게 있는 거지. 놈을 죽이고 주머니를 털어야겠어. 유운상회 소속 상인이면 못해도 천옥 수십 개는 얻겠지? 크크.’
마침 인적이 드문 산길로 간다. 멍청한 놈이었다. 차라리 거리로 갔다면 유운상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니지. 유운상회에게 버려질 가능성이 더 크나? 어차피 계약 상인일 테니까.’
산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곳.
‘슬슬 죽일까.’
칼자루를 손에 쥔 순간이었다. 도망치던 놈이 멈췄다.
"이, 이게 무슨?!"
상인이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주위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방금 죽은 듯한 시체들.
"대체 누가."
그의 목에 선이 새겨졌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선의 검기. 경계하고 있던 상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이 베여 죽었다. 쓰러진 상인의 너머로 삿갓을 쓴 인영이 보인다. 구면이다.
"…백란."
"으음. 자네와 벌써 재회하게 될 줄 몰랐군."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돈 때문인가?"
"돈? 그렇군. 자네는 돈 때문에 이 자를 쫓아 온 건가…. 돈이 필요하면 이 자들의 것을 가져가게. 내겐 전부 필요 없으니."
"돈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재미로 죽인 건가?"
백란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삿갓 속에 보이는 눈은 살인자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자네는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세상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알고 있나?"
"뭐?"
"인간, 요괴, 영물, 수인, 신선, 마족.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세상은 훨씬 넓고, 훨씬 복잡하고, 훨씬 위험하네. 신선이라 하여 선하지도 않고, 마족이라 하여 마냥 악하지도 않지. 이 세상은 혼돈이네."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으음.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떠돌아다니며 영약과 법기, 무공을 판매하는 상인들. 그런데 그 이름을 자네와 나는 처음 들을 정도로 은밀하지."
내 표정은 심각해졌다.
"함정인가…."
"그래. 우린 덫에 걸려든 거라네. 정신 바짝 차리게. 유운상회의 뒤에는 이질적인 존재가 있을 거라네. 어쩌면 오늘 자네의 세계가 넓어질지도 모르겠군."
"뭐, 명인(冥人)이라도 있는 거냐?"
백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군."
아니, 마족이라길래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이 세계에선 마족을 달리 명인(冥人)이라 부르니까. 참고로 명인은 명계에 속한 놈들, 명계에 영혼을 팔고 윤회에서 벗어난 자들을 통틀어 칭하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