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9화 > 1809. 광명승천도
나는 백란의 눈치를 보며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명인이고, 함정이고 간에 일단 챙길 건 챙겨야지.
‘천옥은 그냥 돈이 아니야.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귀물이지.’
천옥은 영기가 들어있는 구슬이다. 영약처럼 흡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법기나 제작이나 뛰어난 결계에는 천옥이 사용된다. 화폐로도 사용되는데 그 가치는 금 100냥에 달한다.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천강성 시스템의 VIP 등급을 높이려면 이게 필요해.’
상인의 품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십일혈조 무공서였다. 혈랑의 무공인가 뭔가 하는 사술 걸린 무공서. 쓰레기였기에 대충 냅다 던졌는데 백란이 손에 쥐었다.
"십일혈조? 무공서인가?"
"아, 그거."
사술이 걸려있다고 말하기도 전에 무공서를 펼친다. 그리고 정확히 5초 만에 무공서를 덮었다.
"무인이라면 낚일 수밖에 없는 미끼…. 교묘하게 함정을 팠군."
"바로 알아봤나."
"주술이나 사술 쪽으로는 크게 당한 적이 있어서 말일세. 사용하지는 못해도 공부는 해뒀네. 알아두는 것만으로도 쉽게 당하지 않게 되니. 혹시 이게 필요한가?"
"아니, 별로 필요 없다."
"그럼 태우도록 하겠네. 이 세상에 있어봤자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니."
화르륵!
삼매진화가 일어나 무공서를 단숨에 불태운다. 그 흔적인 재는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졌다.
"그 책에 걸려있는 사술이 뭔지는 알고 태우는 거냐?"
"세뇌일세. 사술 중에서도 질이 나쁜 쪽이지. 먼저 무의식을 장악해 자기가 세뇌에 걸린 지도 모르지. 그렇게 서서히 정신을 세뇌하고…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는 거지."
백란의 말을 들으면서 시체의 품 안에 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여니 천옥 4개가 들어있었다.
‘겨우 4개뿐이냐.’
아쉬움에 혀를 찼다. 무공서를 파는 놈이 이정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건 의외였다.
나는 옆으로 움직여 다른 시체로 향했다. 백란이 죽인 시체들이 꽤 있었다. 그 품을 뒤지는데 주머니가 없었다. 다른 시체도 마찬가지였다.
"이놈들은 다 개털인가."
"아, 그놈들의 주머니는 내가 챙겼네. 재물에는 죄가 없지 않나? 다다익선이라고 한다지."
눈살을 구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란을 째려봤다.
"왜 그걸 미리 말하지 않았지?"
"자네를 지켜보는 게 재밌어서 깜빡했네."
백란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뻔뻔했다. 하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보자니 화도 별로 나지 않았다.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죽인 놈들도 아니고… 다른 놈들을 죽이면 돼.’
나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이건 함정이다. 나와 백란을 함정에 빠뜨려 뭘 하려는 건지는 아직 정확히 몰라도 명분은 이쪽에 있다.
‘오히려 잘 됐어. 죽이고 빼앗아도 뒤탈이 없다는 거잖아.’
백란은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의뭉스럽다.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함정을 고안한 게 백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상하다.
물론 괜한 의심이다. 정말로 그녀가 이 함정을 관장하고 있다면 이렇게 나설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놈들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백란. 제안이 있다."
"뭔가."
"이 함정을 뒤집고 영약과 법기를 비롯한 물건들을 나눠 가지자. 5대5."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은 없나?"
"놈들이 이토록 공들인 함정이다. 쉽게 놓아줄 리가 없지. 아마 결계 때문에 못 빠져나갈 거다."
"맞내. 들어온 건 쉬워도 나가는 건 어려운 결계지."
"그래서 내 제안은 어떻게 할 거지?"
"받아들이겠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 말게. 우리가 힘을 합치는 건 놈들도 예상하고 있을 걸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어중이떠중이지만 홍강후처럼 오기(五氣)에 이른 무인이 더 있을 가능성이 크군."
"어쩌면 삼정에 이른 절대고수가 있을 수도 있네."
삼정(三頂)
대문파의 문주급의 경지. 마교와 무림맹으로 치자면 장로급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건 좀 비약인 것 같군. 절대고수가 왜 이딴 짓을 하는 거지? 그 정도 경지면 어디를 가든 대접받을 수 있을 텐데."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네.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절대고수가 인간이란 법도 없지 않나."
맞다. 요괴도 절대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요괴는 무림에 섞이지 못한다. 요괴가 무공을 수련하는 경우도 드물고, 황제가 지배하는 지금은 인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있나?"
"딱히 없네. 자네는?"
"그냥 둘이서 다 쓸어버리자. 절대고수가 나타나면… 합공해서 죽여버리고."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네가 생각하면 안 되나?"
"자네는 천마가 된다고 했지. 천마가 이런 계획 하나 짜지 못해서 되겠는가? 한번 머리를 굴려보게. 나는 적당히 괜찮다고 생각되면 자네의 계획에 따르겠네."
나는 인상을 썼다. 머리를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쓸어버리는 게 편하다. 백란과 함께라면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염구석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존나 부담스럽게 쳐다보네. 얘는 내게 뭘 기대하는 거지?’
어쨌든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으니 계획을 짜내야 했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놈들이 가진 것들, 지금 상황.
‘놈들의 추적은 없다.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 전력을 보내 처리하려 했겠지. 추적하지 않더라도 결국 자기들의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나?’
머리를 굴리자 답답해졌다. 나는 캔콜라를 꺼내 까먹었다. 달콤한 탄산이 답답함을 약간 풀어졌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군. 철로 만든 병인가? 음, 아닌 것 같은데… 특이한 재질의 병이군. 그… 콜라라는 물건인가? 설마 치사하게 혼자만 마시는 겐가?"
"하나에 천옥 1개."
"비싸군. 하지만 놓치면 두 번 다시 못 먹을 것 같은 예감이…. 으으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품속에서 공간함을 꺼냈다. 나는 그보다 앞서 콜라를 하나 건넸다. 그녀를 상대로 양아치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농담이다. 그냥 먹어라."
"잘 마시겠네."
그녀는 콜라캔을 보다가 아까 내가 한것처럼 캔을 따고 콜라를 마셨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나는 빈캔을 발로 밟으며 말했다.
"변장."
"응?"
"변장으로 모습을 감추고 시장에 숨어든다. 이 함정에 걸려든 건 우리뿐만이 아니야. 모습을 숨기고 유운상회의 회주를 찾아내 죽인다. 아니면 협상하거나. 물론 협상은 마지막 선택이다. 겸사겸사 장사꾼을 죽이거나 주머니도 털고."
"전면전보다는 훨씬 낫군. 힘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일세. 변장은 어떻게 할 건가?"
나는 공간함에서 인피면구와 옷을 꺼냈다.
"필요하면 빌려주지."
"괜찮네. 나도 가지고 있다네."
백란의 공간함에서도 인피면구와 옷들이 나왔다. 그녀가 가진 인피면구는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품질이 좋아 보였다.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고?"
진짜 황실에서 키운 살수인가?
"뭘 그리 놀라는가. 자네도 가지고 다니지 않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더 이상한 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스테이크나 콜라나 신기한 음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마피아 게임을 하면 내가 더 불리했기에 대충 넘어갔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장했다.
변장한 백란은 본래의 눈부신 미모를 완벽히 감췄다. 평범한 남자 무인으로 남장한 것이다. 그 솜씨가 어찌나 감쪽같은지 내 눈으로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대단하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내가 할 말일세. 그 완벽한 변장을 보니 자네도 암행을 많이 해본 것 같군."
"아직 해야 할 게 더 남았지."
강호에는 어린이와 노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숙련된 강호인들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기운을 감춰야 한다.’
나와 백란은 오기(五氣). 기의 속성을 깨달으며 본격적으로 기를 통제하는 경지. 기운을 숨기는 건 예삿일이다.
***
"아버지!"
홍강후는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홍제유는 초조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느냐?"
홍강후는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백란! 그녀를 한시라도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후. 진정해라. 시장에 들어온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덫은 이미 그 여자의 다리를 잡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너무 늦게 잡히면 제가 그 여자를 즐길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다른 놈들이 그녀를 탐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
"기다려라. 네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먹이들은 지금도 계속 유입되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홍강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홍제유는 백란이라는 황실 출신의 여자에게 단단히 빠졌다. 그럴 만도 했다. 백란의 미모는 평생 본 미녀들보다 뛰어났으니까. 그 하얀 머리카락이 불길해도 그 미모를 감출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자에게 너무 빠졌군. 수행이 부족하구나.’
그의 아들 홍제유는 영약으로 경지를 올린 무인이다. 천재라 부르기엔 부족해도 무재는 있었다. 하지만 경지에 비해 수련한 시간이 적다 보니 성숙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위험도 겪지 못해 어리숙한 면이 있다.
‘내가 싸고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홍제유는 너무 조심성이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방임하면 비명횡사할 것 같다.
‘적어도 오기경에 올라야 내가 완전히 안심할 수 있겠지.’
그리고 자신은 삼정의 경지에 오른다.
"…아버지. 생각해 봤는데 슬슬 저도 자식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홍강후는 대번에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 여자를…?"
"백란은 미모와 재능. 둘 다 갖추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제 아내가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안 된다! 그 여자는 먹이다! 이미 일이 진행 중이니 예외는 없다! 제유야, 세상은 넓다. 그런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위험한 욕심은 버려라! 알겠느냐? 대답해라!"
홍강후가 호통치자 홍제유는 어깨를 좁히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홍강후는 아들의 어깨를 조심히 두들겼다.
"기죽지 말거라. 이 천하에 그 여자보다 좋은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
"예."
고개 숙인 홍제유의 두 눈동자는 위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