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0화 > 1810. 광명승천도
변장한 나와 백란은 인파에 스며들며 시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우선은 시장의 구조부터 파악했다.
시장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컸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는 많아졌다. 사람 대부분이 무인이고 술법사도 끼어있었다.
‘대략 2,000명 정도인가.’
많아도 너무 많지 않나 싶다가도 이 세계의 스케일을 떠올리면 그러려니 한다. 이 세계에 넘쳐나는 게 인간이었으니까.
‘상인놈들을 보니 손이 근질거리는군.’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상인을 죽이고 가판대의 물건과 가진 천옥을 모조리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저지르기엔 인파가 너무 많았다.
"자네, 눈치챘나?"
옆에 있던 백란이 내게 물었다.
"뭘 말하는 거지?"
"여기 시장 공간이 절묘하게 나뉘어 있네. 보게. 저기 꺾어진 길목. 다른 곳보다 폭이 좁다고 느껴지지 않나? 저기 있는 상점은 약간 앞으로 밀려나 있네. 여기 중심에 보이지 않는, 절묘하게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뜻이지."
백란이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며 설명했다. 솔직히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얘 진짜 뭐 하는 여자야?’
길목의 폭이 다른 곳보다 좁다? 누가 길목의 폭을 일일이 신경 쓰면서 걷나.
상점이 앞으로 밀려나 있다? 여기 있는 상점들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앞으로 밀려나 있는지, 뒤로 들어가 있는지 알게 뭔가.
‘쪽팔리게 못 알아들은 척할 순 없지.’
다행히도 나는 지금 시점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백란의 말이 맞았다. 시장 중심에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 그 공간에는 건물이 있었다. 마차를 개조해서 급조한 듯한 외형의 건물이다. 외벽에는 이상한 그림이나 도형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고, 천장 쪽에는 법기 24개가 박혀 있었다. 건물 문 앞에는 간판 하나가 걸려있었다.
"백란. 네 말이 맞다. 숨겨진 공간에 유운상회 본점이 있다."
"확신하는 말투군. 혹시 자네에겐 숨겨진 공간이 보이나?"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인다. 그런 편리한 능력이 있으면 좋겠군."
백란은 가진 패를 까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굳이 패를 깔 필요는 없다.
‘묘하게 정보를 캐내는 느낌이야. 이런 여자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은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그 관심을 좋게 끌고 가면 호감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공략의 반은 끝난 거라 볼 수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쳐들어가서 죽인다.
라는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나는 눈에 힘을 줬다. 천안의 능력 중 하나인 투시를 사용했다.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그 흔한 의자와 가구 같은 책상도 없었다.
‘여긴 놈들의 본거지가 아닌 건가…?’
저 격리된 공간으로 갈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가더라도 얻을 수 있는 건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인파는 많았고 유운상회의 상인들은 여전히 본색을 숨김 채 활동 중이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주위는 아까보다 어두워졌다. 해가 저물고 있다.
"…일단 정보가 너무 없다. 적당한 놈을 잡아서 정보를 캐내야겠군."
"아, 그건 의미 없네."
"왜지?"
"이미 내가 시도해봤다네. 놈들의 머리에 금제가 걸려있더군. 유운상회에 대해 억지로 정보를 캐내려고 하니 백지가 되더군."
"……."
지금이라도 그냥 날뛸까?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말한다.
"상인을 몰래 한 명씩 죽인다. 겸사겸사 놈들이 가진 것도 빼앗고. 어쩌면 놈들이 가진 것 중에 정보가 될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약탈이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백란은 내 말에 토를 전혀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너무 고분고분하다. 그냥 대놓고 날뛰자 할 것 그랬나?
***
"히히히."
영약 상인은 가판대 안쪽, 손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확인하며 음침하게 웃었다.
"이 정도 수익이면 유운상회에 바치고도 내게 떨어질 몫은."
기쁨에 겨워 중얼거리는 놈에게 다가간다. 기척을 완전히 죽였기에 놈은 바로 뒤에 있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용히 칼을 들었다.
흠칫.
상인이 무언가를 느낀 듯 뒤를 돌아본다. 늦었다. 이미 내 칼은 놈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서걱!
상인의 머리가 바닥에 굴렀다. 나는 상인이 쥐고 있던 주머니를 습득했다.
천옥 24개가 들어있었다. 상당한 소득에 미소가 지어진다.
이것들을 합치면 내가 가진 천옥은 총 663개. 37개만 더 있으면 VIP 레벨을 올릴 수 있다.
‘백란한테 37개만 빌려달라고 하면 너무 모양 빠지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백란이 상점을 뒤지며 영약을 찾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 미소를 짓는다.
"자네가 천옥을 가졌으니 영약은 내가 가지겠네. 죄다 하등품이라 내가 손해일세."
"네게 그런 영약은 의미 없을 텐데."
"질 낮은 영약을 최대한의 효율로 끌어내는 방법이 뭔지 아나? 영단으로 만드는 걸세."
"연단술을 할 줄 아는 거냐?"
"예전에 공부했었네. 귀한 영약을 남의 손에 맡기기엔 워낙 살벌한 세상이지 않나. 뭐, 내 입장에선 그리 어렵지도 않았네. 몇 년만 공부하면 됐지."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염구석 보다 나이가 적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저런 실력을 갖추는 것에 이어 연단술까지 익혔다? 술법과 변장술을 익히면서도?
‘유리아처럼 세계관 최고 급의 천재인가.’
쿵!
갑자기 압력이 온몸을 짓누른다. 뭍에 있다가 해저로 집어 던져진 느낌이었다. 나와 백란은 서로를 바라봤다.
"놈들의 수확이 시작된 모양이군."
공간함에 약초를 모두 집어넣은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러면 대놓고 나댈 필요는 없겠지. 조용히 상황부터 보자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이질감을 느낀 건 우리뿐만이 아닌 듯 시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돌연 몸이 무거워졌다. 결계에 이상이 생겼나?"
"기분 나쁘군. 유운 상회라는 놈들은 결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이보게들! 저 하늘에 뜬 달 좀 보시오! 피처럼 붉은 달이오! 너무 불길하지 않소?"
"어떻게 달이 붉을 수 있겠소. 아마 결계의 영향이겠지."
"이봐, 장사치! 유운상회의 회주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그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불길하군. 여기서 나가야겠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시장은 소란스러웠다.
백란은 밤하늘에 뜬 붉은 달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하게."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 전에 누군가가 나타나 발을 굴렀다. 쾅! 그의 발에서 시작된 충격음이 주위를 휩쓴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바라봤다.
"조용!"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의 무인이었다.
"지금부터 선별을 시작하겠다. 가만히 있어라!"
남자는 오기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봤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앞으로 나서며 따지고 들었다. 대표적으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출지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한 그는 약한 주제에 당당했다.
"나는 배영시를 관리하는 마가(魔家)인 윤가의 일원이요! 어찌 나를 겁박하는 것이오?! 유운상회의 회주를 만나게 해주시오! 내 이 일에 대해 단단히 따져야겠으니!"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윤가의 일원을 쳐다봤다.
"쭉정이군."
"뭐?"
"화려한 옷으로도 네놈의 저열함과 무능함은 숨길 수 없다."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으나, 그 손놀림에는 묘리가 스며들어 있었다. 만만찮은 수공(手功)이다.
팍!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의 머리가 터진다. 가판대에 있던 상인들이 튀어나와 그 시체를 옆으로 끌고 가 정리했다.
남자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으로 다른 이들을 쳐다봤다.
"다음."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남자는 사람들을 하나씩 선별했다. 기준에 못 미치면 머리를 박살 냈고, 기준에 충족하면 점혈과 법기로 구속했다. 무인들이 반항하더라도 무작정 죽이지 않았다. 도망치는 이는 근처에 있던 상인들이 따라가 잡았다. 나는 다가오는 놈을 보면서 백란에게 물었다.
"선별의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겠나?"
"무재가 아닐까 하네. 저기 보게. 자신에게 덤벼도 싹수가 보이는 자는 살려두고 있네. 그리고 출지 5단 이상의 경지를 이륙한 자들도 살려두는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린다. 아마 다른 구역에서 지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지금 상태는 어떻지?"
"최상은 아닐세. 압박이 계속 느껴지는군."
"놈이 우리 앞으로 오는 순간 바로 공격한다. 우리가 협공하면 놈이 오기의 고수라도 단숨에 죽일 수 있겠지."
"흐음. 기껏 변장했는데 모습을 드러낼 셈인가? 일부러 잡히는 것도 방법 중 하나 일세."
"그건 너무 위험하다. 그리고 변장했기에 지금 기회가 생긴 거다."
놈과 한패인 홍 씨 부자는 우리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변장하지 않았다면 최우선으로 나와 백란을 죽이거나 잡으려 들었겠지.
‘오기경의 고수를 한 명 줄일 수 있다면 훨씬 이득이다.’
30명을 선별한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나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는 애매하군. 실력을 봐야겠다."
다짜고짜 손을 들어 올린다. 속으로 혀를 찼다. 완전히 방심해주기를 원했으나, 그건 물 건너갔다.
칼자루를 쥐며 발도 자세를 취한다. 그의 눈이 커진다. 명색에 오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놈이 대응하기 전에 칼을 뽑았다. 칼은 칼집에서 나오는 동시에 마기에 휘감긴다.
참귀도법(斬鬼刀法) 악참(惡斬).
놈은 급히 기운을 끌어올려 손을 보호해 내 칼을 잡는다. 놈의 하얀 수강(手?)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홍강후가 말한 섬전도 염구석인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줄 몰랐군."
"태연한 척 말하고 싶으면 입에서 나오는 피라도 숨겨라. 방금 무리해서 기운을 끌어올리며 내상을 입은 걸 알고 있다."
"흥. 네 칼은 내 손에 잡혀있다. 칼을 휘두르지 못하는 칼잡이. 끝난 거나 다름없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옆에 칼 들어간다."
놈은 그저 나를 주시했다. 내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게 놈의 패착이었다. 백란의 검이 놈의 목으로 찔러 들어간다. 그 기척을 완벽히 죽은 살인검은 절묘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놈은 시야 끄트머리에서 검을 확인하고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호신강기를 일으켜 목이 베이는 것도 보호했다.
‘또 무리하는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 않으면 죽었을 테니까. 무리한 대가는 지독한 내상이었고, 놈의 호신강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유성검.’
굳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유성검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놈의 주위에 순식간에 10개의 유성검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무방비한 몸에 찔러 들어갔다.
푹!
"커억!"
온몸에 검이 박힌 놈이 허망하다는 듯 날 쳐다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성검은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