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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11화 (1,591/2,000)

< 1811화 > 1811. 광명승천도

주위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사람들은 긴장한 채로, 묘종의 희망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백란은 어느새 구속된 무인들을 풀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스포트라이트는 내게만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피도 안 묻은 칼을 한 번 털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우린 놈들의 함정에 걸렸다."

"대인은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소?"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정확히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놈들은 우리를 가지고 무언가를 저지르려고 한다는 거다."

"유운상회… 이 빌어먹을 자식들. 처음부터 이딴 수상한 상회를 찾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늦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정신 바짝 차리고 유운상회 놈들과 싸우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만 기다리던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거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그들은 곧 무기를 들었다.

"대인의 말씀이 맞소. 이미 우리는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꼴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지."

"이대로 순순히 죽을 수는 없지."

"대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유운상회고 뭐고 우리를 해할 수 없을 것이오."

그들이 전투 의지를 활활 태웠다. 나는 씩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저 상인들을 잡아 죽여라."

무인들이 두 눈을 번뜩이며 기회를 봐서 도망가거나, 숨죽이고 숨으려던 상인들을 쫓아가 무기를 휘둘렀다. 무공을 익힌 상인들은 저항했으나 한 손에 열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처럼 고수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게서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서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아 주머니를 털었다. 그리고 혀를 찼다.

‘고수인 놈이 천옥을 7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니…. 거렁뱅이였군.’

법기도 없었다. 오기의 경지에 이르면 최소 법기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는 게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좀 이상했다.

‘자기 실력을 어마어마하게 믿고 있던 놈이었거나, 아니면… 법기를 살 여유도 없는 놈이었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니 백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자네. 아까 보여준 그 검들은 비장의 한 수인가?"

"맞다. 내가 가진 법기의 힘이지."

"구명절초를 이렇게 쉽게 보여줘도 되는가?"

"아끼똥이란 말을 아나?"

"…모르겠군. 처음 듣는 말이네. 혹시 술법의 이름인가?"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지. 그게 뭐든 써야 할 땐 써야지."

"음. 조금 저렴한 듯한 단어지만 틀린 말은 아니로군. 이제 어떡할 텐가?"

"아까처럼 놈을 죽이고 무인들과 합류해야지. 우리 덩치가 커져야 더 유리해지니까."

"마냥 쉽지만은 않을 듯싶군. 적들은 이미 이변을 눈치챈 모양이네."

무인들이 상인을 죽이면서 소란을 피웠다. 가까운 곳에 있던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면 더 이상했다.

"그러니 놈들이 모이기 전에 덩치를 더 키워야 한다."

나는 무인들의 앞으로 나섰다. 죽은 상인들의 시체가 눈에 밟혔다. 시체는 이미 모두 털렸다.

‘시간이 없으니 챙기는 건 나중에 해야겠군.’

나는 무인들에게 외쳤다.

"가자!"

***

지이이이이이잉.

불쾌한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직후, 몸이 무거워졌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내 몸을 잡고 아래로 질질 끄는 듯한 감각.

"죽어라, 섬전도 염구석!!"

나와 칼을 나누던 놈이 소리치며 성큼 다가온다. 입가에 걸린 것은 승리의 웃음. 놈은 지금 승리를 확신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8]

찰나로 놈의 칼을 피한다. 허나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푸른색 강기가 담긴 칼은 내 오른쪽 가슴을 약간이나마 베었다. 고통과 함께 피가 튀었으나 멈출 수 없다. 여기서 멈추면 이번엔 내 목숨이 달아날 것이다.

참귀도법(斬鬼刀法) 귀살극(鬼殺劇).

살극을 열었다.

내게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졌다. 근육의 팽창하며 힘이 넘친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도 근육에 의해 멈췄다.

칼을 휘둘렀다. 놈이 내 칼을 칼로 받아냈다. 교차하는 칼에서 불똥이 격렬하게 튀었다. 나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살극을 열었으니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내가 죽는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놈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내 칼을 받아내고 있었다. 집중력이 더 올라갔는지 놈의 칼은 무뎌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뇌천류나 천마신공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는 꾹 참았다. 근처에 백란이 있었다. 그녀에게 밑천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템포를 올려야겠군.’

내가 죽든가. 아니면 놈이 죽든가. 이판사판이다.

쾅!

폭음이 들렸다. 폭음은 내 안에서 들렸다. 일부러 마기를 기폭 시켜 순간적인 힘을 얻은 것이다. 그 대가로 기혈이 조금 망가져야 했지만, 지금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틈은 없다.

힘이 담긴 일격에 놈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놈이 다급히 이를 꽉 깨물었다.

지이이이이잉!

놈의 가짜 이에서 나온 불쾌한 소리가 또다시 나를 자극한다. 몸이 다시 무거워진다. 살극을 열면서 쌓인 근육의 피로는 천근만근이 되어 나를 잡아끈다.

‘여기서 멈추면 내가 진다. 이 기회를 놓칠 것 같냐!’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7]

까앙!

최속의 일격이 막혔다. 뿐만이 아니라 칼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강기를 씌웠다고 해도 상대방도 강기를 사용하니 칼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바위도 두부처럼 자르는 강기도 똑같은 강기 앞에서는 평범해진다.

‘거칠게 쓰긴 했지.’

단순 무식한 참귀도법이기에 더욱 칼에 부담감을 안긴다.

칼이 부러졌다고 해서 전투가 끝난 건 아니다. 칼이 부러져도 강기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칼의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좋아.’

앞으로 나아간다. 아주 가까운 거리가 되자 불편해진 건 놈이었다. 놈이 서둘러 백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리려 한다. 물론 나는 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놈의 칼을 쳐낸다. 거리가 좁아졌기에 초조함에 못 이겨 휘두른 칼에는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그게 놈의 패착이었다. 부러진 칼이 놈의 목에 파고든다. 전투는 끝났다.

나는 씩 웃었다. 승리의 짜릿함에 도파민이 마구 분비한다. 참고로 섹스를 할 때도 도파민이 나온다.

‘섹스 같은 승리!’

승리를 만끽하며 쓰러진 놈의 품을 뒤져 전리품을 찾는다. 얻은 것은 천옥 5개.

‘이 새끼 이빨이 법기던데.’

남자 새끼의 입에 손을 넣고 싶지 않았다. 저 이빨을 내 입에 넣을 생각은 더더욱 없고.

‘700개까지 남은 개수는 9개….’

주위를 둘러봤다. 백란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수고했네. 상처가 많군."

백란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받아서 상자를 여니 단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약 특유의 냄새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건?"

"고혈단(膏血丹)이네. 처음 보나?"

고혈단.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고혈단을 먹으면 외상과 내상을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판타지판 포션이다. 물론 치료에도 한계는 존재하지만.

"귀한 걸 주는군. 어지간한 영약보다 비쌀 텐데."

"비상용일세. 그리고 지금은 비상 상황이 아닌가. 자네의 힘이 있어야, 우리는 안전하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네. 잔말 말고 지금 먹게. 자네 꼴이 말이 아닐세. 온몸이 피투성이에다가 내상도 조금 입지 않았나?"

나는 마기를 폭발시키며 한순간에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전투 방식의 장점은 빠르고 강력하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기혈이 조금씩 상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전투가 길어질수록 위험해진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내려 몸 상태를 확인했다. 별로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옷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혈단에 입에 넣었다. 강렬한 쓴맛에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동시에 몸이 간지럽더니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너는 상처 하나 없군."

"운이 좋았네. 자네가 상대했던 놈보다 약했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몇 차례나 반복된 전투 끝에 백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지쳐 있었다. 약간이나마 휴식이 필요했다.

‘마침 잘 됐다. 이참에 한 번 백란의 정체나 알아보자.’

기막을 이용해 주위를 감쌌다. 백란은 기막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놈들도 이제 전력으로 나올 거다."

"그럴 걸세. 적들은 이미 적지 않은 손해를 봤을 테니 빠르게 수습하고 싶겠지."

"마지막에 앞서서 물어보자. 정체가 뭐지?"

"나를 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겐가?"

"적은 아니겠지. 네가 죽인 적들만 해도 몇 명인데…. 하지만 정체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야. 기왕이면 밝히지 그래?"

"황궁 출신의 떠돌이. 라고 하면 믿을 텐가?"

"너 같으면 믿겠나?"

"안 믿겠지. 애초에 황실 출신의 검객이 떠돌이인 것도 이상하니 말일세."

그제 제일 이상한 일이다.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 이 대륙에서 황실은 최고의 직장이었다. 황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검객? 어떤 세력이건 모셔가려고 안달이 날 것이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무림맹이고 천마신교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

"내 정체를 알려주겠네. 대신 자네의 정체를 알려주게. 그게 공평하지 않나?"

"내 정체? 내 정체는 이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난 섬전도 염구석이다."

"싫다면 됐네. 이대로 서로의 정체에 캐묻지 말고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세."

그녀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남궁세가 등 관련된 것들이 몇 있긴 해. 만무탑이라던가. 하지만 오래된 일이고 내 얼굴은 그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이 세상은 넓다. 그리고 문명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사진 같은 것도 없었다. 사람 얼굴은 그릴 수 있으나, 나는 범죄자로 쫓기는 몸도 아니었다.

나는 깊이 고민했다. 차라리 백란의 정체를 묻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알아야 해. 알아야 공략하지.’

이대로 흐지부지 넘어가기에는 그녀가 너무 미녀였다. 그녀와 가까워지려면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

"백란. 네 정체는 뭐지?"

찌이이이익.

백란은 얼굴에 뒤집어쓴 인피면구를 뜯듯이 벗겼다. 더 이상 인피면구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바닥에 내다 버린다.

"나는 백란. 일급금위(一級錦衛)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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