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812화 (1,592/2,000)

< 1812화 > 1812. 광명승천도

"나는 백란. 일급금위(一級錦衛)일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체에 두 눈을 치떴다.

내 반응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녀는 공간함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색의 반짝이는 천. 일급금위라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다. 황제의 인장은 은은한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저 인장에서 그 누구도 사칭할 수 없는 존귀함이 느껴졌다.

‘금위. 황제의 오른팔.’

금위는 황제의 친위대이자, 특수 요원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의 눈과 귀이며 칼이다. 감찰권을 가지고 있기에 황실에서 일하는 관료들도 금위를 보면 벌벌 떤다는 말이 있다.

‘일급이라.’

금위에는 특급, 일급, 이급이 존재한다. 특급이 가장 높고 그다음이 일급이다. 정확히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모르나, 금위에게 감찰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높은 자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황실의 일급금위이신지 몰랐습니다."

"평소대로 하게. 나도 그편이 편하니.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내 정체는 비밀일세."

"일급금위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내가 금위이기 때문일세.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금위는 특급금위 뿐일세. 일급과 이급은 임무를 받으면 궁 밖에서 일하네."

"임무를 받았다? 무슨 임무지?"

"알고 싶은가?"

백란이 빙긋 웃는다.

나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천하에 불경하고 사특한 무공이 떠돈다는 말이 있어서 조사하러 왔네. 물론 이 임무를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네."

"불경하고 사특한 무공?"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역마신공(易魔神功). 인간을 요괴로 변이시키는 마공. 나는 그 무공을 조사하고 있고, 천마신교는 조사 대상 중 하나일세."

"역마신공이 황제 폐하의 시선이 향할 정도의 일인가?"

"황제 폐하는 순리를 중히 여기네.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야 하고, 요괴는 요괴로 살아야 하네. 그것이 황제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순리일세. 그런데 역마신공은 인간을 요괴로 만드는 마공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역마신공을 우려하고 계시네."

아무래도 묵지련은 좆된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가 대놓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다. 아직 벗어날 구멍은 있다고 해야 하나.

"역마신공과 천마신교는 아무 관련 없다."

"그 판단을 내리는 건 자네가 아니고 나일세."

이 일에 엮이면 천마신교라도 좆된다. 이 땅에서 황제에게 밉보이고도 멀쩡할 수 있는 세력은 없으니까.

‘천마가 되기도 전에 천마신교가 무너지게 생겼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백란이 내게 물었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자네 정체는 뭔가?"

"천마신교의 적멸대 섬전도 염구석이다."

백란은 낮게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표정이 싹 바뀌었다. 정색한 그녀의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인가? 나를 너무 얕보고 있군. 자네가 염구석이 아니란 걸 알고 있네. 왜 염구석인 척 천마신교에 입단한 거지? 자네의 진짜 목적이 뭔가."

"…내가 염구석이 아닌 건 어떻게 알았지?"

"황실의 정보력.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네 말대로 나는 염구석이 아니다."

진짜 염구석을 죽이고 염구석인 척 연기하고 있다. 염구석인 척한 이유? 천유운 때문이다. 천유운의 지원받기 위해, 또 천유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천유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말해봤자 더 의심만 살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진실을 말한다. 물론 그냥 말해서는 안 되지. 더 이상 내 정체를 파고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낙월신녀의 제자인 성유진이다."

"낙월신녀?!"

"알고 있나?"

"황실이 주목하고 있는 요주의 인물 중 한 사람일세. 낙월산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쉬쉬하고 있네만… 낙월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세상에 파란을 일으킬 인물이니까."

"감시하고 있다고?"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감시가 금지된 인물이네. 그래도 알음알음 소식이 들려오지. 그런가. 그 낙월신녀의 제자인가."

말로는 수긍하면서도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낙월신녀에 대해 알고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조심스러웠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군. 낙월신녀의 제자가 왜 천마신교에 입교한 거지? 낙월신녀가 시켰나?"

"스승님은 방임주의라서.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천마신교에 들어간 건 이전에 말했을 터다."

"천마가 되기 위해 천마신교에 입교했다는 그 말 말인가? 천마가 되려는 이유는?"

"천마가 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하…."

백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어서 그녀의 분위기가 풀렸다.

"알겠네. 일단 자네의 말을 믿겠네. 지금도 계속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말이지."

그녀가 뒤돌아 쳐다봤다. 일련의 무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쉬고 있던 무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쥐며 우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기막을 없애고 앞으로 갔다.

나는 적들을 살폈다. 오기경의 고수가 3명. 나머지 무인 40명이 그 뒤에 서 있었다.

‘배영시에 자리 잡은 마가, 윤가 소속의 무인들이다. 유운상회와 손잡은 건가.’

다시 생각해 보면 유운상회가 배영시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윤가와 손을 잡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유착이 있지 않고서야 도시 근처에서 대놓고 이런 짓을 벌일 수 없으니까.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윤가!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나?!"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섬전도 염구석…. 말이 짧군. 나는 윤가의 가주, 염월삭도(炎月削刀) 윤공석이다. 배분으로 따지면 내가 더 높지. 예의를 갖춰라."

"예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군. 지금 네놈이 저지른 짓거리는 신교를 배신하는 행위다. 알고는 있나?"

"신교는 네가 실종됐다고 판단 내릴 것이다."

"아주 계획적이군, 그래. 그나저나 네놈 따위가 윤가의 가주라니…. 이러니까 마가가 영세했다는 말이 나오지."

"네놈 따위가 감히 마가를 들먹이는가…!"

"그럴만 하니까 그러지."

"감히…!"

윤공석이 살기를 흘리며 월도(月刀)의 칼끝을 내게 겨누었다. 나 또한 칼을 들었다. 아까 부러진 칼이 아닌 화련비도다.

‘저쪽이 유리하다. 이쪽은 오기경의 고수가 나와 백란 뿐이지만… 저쪽은 셋이야.’

놈들이 오기 전에 오기경의 고수 4명을 죽여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3대2가 아닌 7대2로 싸울 뻔했으니까.

‘그건 진짜 답 없지.’

윤공석이 늦게 움직인 이유는 뻔했다. 최대한 자기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지.

‘홍강후가 늦게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랍군. 의외로 신분이 높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놈이 유운상단의 회주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평온한 얼굴로 서 있다. 그게 무척이나 거슬렀다.

‘무인의 질은 저쪽이 더 높고, 수는 우리가 배 이상 많다. 그나마 버틸 수 있겠군.’

비장한 목소리로 우리를 따르는 무인들에게 말했다.

"이번 위기만 이겨내면 우린 살 수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싸워라. 너희가 포기하면 놈들은 가차 없이 너희를 죽일 거다."

이 세계는 중세 판타지 이상으로 사람 목숨을 경원시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경원시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전투를 대비해 자세를 잡는다. 적들의 긴장감이 내게 느껴졌다. 저들의 집중력이 우리에게 향한다. 나는 씩 웃었다.

‘선수필승. 유성검!’

하늘 위로 거대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검은 유성처럼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모여있던 무인들의 진형이 무너졌다. 윤공석을 비롯해 오기경 고수 3명은 눈치채고 몸을 날렸으나, 그 충격파까지 온전히 피하지 못했다.

"죽여라!!"

소리치며 달려갔다. 내 목적은 윤공석이었다. 이놈부터 빠르게 죽인 뒤에 홍강후나 유운상회주를 상대한다.

"배신자 새끼! 천마의 이름으로 죽여주마!"

"감히 네놈 따위가 천마의 이름을 입에 담느냐!"

쓰러진 윤공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월도로 내 칼을 받아냈다. 놈의 무릎이 짓눌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킬킬 웃었다.

"하체가 부실하군. 하체가 기본 중의 기본인 걸 모르나? 수련을 더 해야겠어."

"비겁하게 기습한 놈이 말이 많구나!"

"괴상한 함정을 친 놈이 변명은."

윤공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반박하지 않았다. 함정에 대해선 자기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참귀도법(斬鬼刀法) 나찰회섬(羅刹回閃).

화련비도가 빙글빙글 돈다. 나는 그 회전력을 이용해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윤공석은 긴 월도를 조금 움직여 칼을 막았다. 월도가 워낙 길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빈틈을 커버할 수 있었다.

‘엄청 잘 막는군. 젠장. 뇌천류를 썼다면 못 막았을 것 같은데….’

참귀도법은 대단한 무공이 아니다. 특히 돈만 있다면 참귀도법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때문에 참귀도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을 만나면 전투가 길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잠깐. 백란에겐 내 정체를 밝혔잖아. 낙월신녀의 제자라고. 백란은 어디 가서 나불거릴 성격도 아니고… 나머지는 일이 끝나고 다 죽일 생각이었잖아. 그래야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 가질 수 있으니.’

나는 씩 웃었다.

윤공석은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톡 쏘듯이 말했다.

"뭐가 웃기지? 너도 이미 깨달았겠지만, 네 참귀도법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딴 허접한 무공을 아직까지 잘도 붙들고 있군."

"그래? 정말 참귀도법을 다 파악하고 있는지 시험해볼까. 참귀도법(斬鬼刀法) 악참(惡斬)!"

악참은 커다란 참격. 내가 칼을 뒤로 쳐들자 놈이 양손으로 월도를 잡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막아내는 동시에 바로 반격할 것이다.

하지만 내 칼은 베기가 아닌 찌르기였다. 깜짝 놀란 윤공석이 월도를 돌려 칼을 쳐내려고 한다. 월도에 칼이 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뇌천류(雷天流) 뇌사(雷蛇).

파지직! 붉은 칼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월도를 피해 놈의 명치로 기어간다.

"어림없다!!!"

윤공석이 마기를 담아 소리쳤다. 마왕후(魔王吼). 마도인 버전 사자후였다.

‘젠장. 이딴 잡기술에 당하다니.’

나는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지 않았다면 내상까지 입었을 것이다.

윤공석은 이걸 기회라 판단했는지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입에서 마왕후의 여파인지 피가 새어 나왔다.

화련비도를 들어 반격을 준비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주변 일대 전체를 휩쓸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