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8화 > 1818. 광명승천도
"벽에 막힌 모양이로군."
눈을 뜨자마자 백란이 말했다. 순간적으로 열이 뻗쳤으나 조용히 숨을 내쉬며 분노를 다스렸다. 그녀는 딱히 비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벽을 넘지 못한 것에 짜증이 났을 뿐이다.
"자네에게서 마기가 느껴졌네. 참귀도법의 마기는 절대 아니었네. 천마신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대체 어떤 마공을 익힌 건가?"
"천마신공."
"음. 대답하기 싫다는 건가. 알았네. 민감한 질문이었으니 내 사과하지."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는다. 내가 가진 천마신공이 그녀가 알고 있는 천마신공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 물어보지."
"해보게."
"넌 어떻게 삼정의 벽을 넘은 거지?"
백란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천천히 갸웃거렸다. 그러다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자네는 착각하고 있네. 나는 삼정의 벽을 넘지 못했네."
"네가 운기행공을 하는 걸 봤다. 머리 위로 세 개의 꽃이 흐릿하게 보이더군. 삼화취정의 증거가 아닌가."
"자네가 흐릿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정녕 삼정의 경지에 올랐다면 3개의 꽃은 선명했을 걸세. 지금 나는… 반쯤 벽을 걸치고 있다 해야겠지."
"혹시 원하면 언제든 경지를 넘을 수 있는 거냐?"
백란은 회귀자다. [천마복수전]의 배경은 선협이 아닌지라 그녀가 회귀전에 어느 경지까지 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회귀 전에도 명계와 연관됐다는 건데…. 확실한 건 그녀도 천마였으니 삼정 이상의 경지에 올랐음은 틀림없다.
"내 부족함이 채워진다면 삼화가 피어날 걸세."
"그 부족함이 뭔데."
"글쎄."
백란이 야릇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약점에 대해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결계의 매개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그건 뭐였지?"
"뭘 말인가?"
"검은색 분신. 비녀를 검은 심장으로 바꾸더군. 법기인가?"
"법기가 아닐세. 마술(魔術)이지. 술법과는 다르네. 혹시 마술을 배우고 싶은 겐가? 기초 정도라면 가르쳐줄 수 있네만."
"됐다. 난 술법에는 재능이 없다."
"술법이 아니라고 말했네만."
"무공이 아닌 건 맞지 않나?"
백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천강성 시스템은 술법을 보조해주지 않는다. 아마 10년을 수련해도 술법 하나 제대로 부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마술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그 시간에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기공술이면 또 모를까.’
그건 무공 카테고리에 드는 모양이니.
콰콰콰쾅!
기를 담아 주먹을 휘두르니 건물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결계가 흔들리더니 그대로 풀린다. 저 멀리 어두운 하늘 아래의 도시 불빛이 보였다.
"아 참, 이걸 묻지 않았군. 자네는 어디를 무슨 목적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공간함에서 작은 우리를 꺼냈다. 작은 우리 속에는 점혈에 의해 가사 상태에 빠진 만리서종(萬里鼠踪)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붉은색의 작은 쥐를 꾹꾹 누르며 점혈을 풀었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만리서종을 찍찍거리며 머리를 흔들더니 어느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만리서종이군. 만리추종향을 쫓고 있었나?"
"천유운의 부탁으로 만리추종향을 추적하고 있었다. 어떤 간 큰 놈이 천유운의 방에 침입했던 모양이다."
"흐음. 정정할 게 있네. 놈이 아니라 년일세."
"…뭐? 설마 범인이 너였나? 근데 만리서종은 왜 다른 곳을 가리키는 거지?"
"만리추종향이 묻은 옷은 매를 이용해 서쪽으로 보냈네. 적당한 곳에 갖다 버린 모양이군. 훈련시킨 보람이 있어."
"천유운의 방은 왜 몰래 들어갔지? 그런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있나?"
"이유는 두 가지였네. 하나는 역마신공이 천유운이 퍼뜨렸다는 증거. 그러나 방안은 깨끗했네. 아무것도 없더군. 둘은 자네를 만나기 위해. 현재 천유운이 믿을 수 있는 수족을 몇 없을 테니 자네가 올 줄 알았지."
"…처음부터 날 노렸던 건가."
"전에도 말했듯이 자네라는 변수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네."
과연 회귀자라고 할까. 그녀는 천유운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의 손 위에서 놀아 난 기분이니까. 그래도 그녀가 내 조력자이니 참아야겠지.
"묵지련 말이야. 그놈들은 내버려두지."
"묵지련과 천유운을 엮어서 처리하는 게 상책일세."
"…묵지련은 나를 돕기로 했다. 묵지련주와 이미 계약했지."
"흐음. 묵지련주와 천유운이 벌써부터 틀어졌다는 건가…. 이러면 일이 더 잘 풀릴 수 있겠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우리는 윤가로 향했다. 백란은 어수선한 윤가의 대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대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경계하며 외쳤다.
"멈추시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오?! 이름과 소속을 밝히시오!"
"나는 백란. 황실에서 온 일급금위일세.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윤가를 조사하러 왔으니 문을 열게."
백란은 품에서 황금색의 반짝이는 천을 꺼내 문지기에게 보여줬다. 황제의 인장이 무지개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일급금위?!"
문지기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바로 대문에 막혔지만.
"어, 어르신께 말씀드릴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기다리라고 했는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움직이는 나를?"
백란이 불쾌한 듯 목소리를 낮추며 쏘아붙였다. 문지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윤가의 가주 윤공석이 대역죄인과 함께 일을 벌이다 사망했다는 걸 알고 찾아왔네. 문을 열게. 조금이라도 미적거린다면… 역적으로 취급하겠네."
역적.
창백하다 못해 거무죽죽하게 변한다.
그 이유는 나도 안다. 자비심 깊은 황제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부류가 역적이었다. 역적을 모의라도 하는 순간 어떤 가문이라도 끝장난다. 뿐만이 아니라 몇십 년 전에 역적 한 명 때문에 도시 하나가 통째로 지워졌다는 말이 있었다. 그 소문은 묘하게 구체적이었으니….
문지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열었다. 대문 안쪽 건물들은 모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마 죽은 가주때문 일 것이다. 이놈들은 아직 가주의 시체도 찾지 못했을 테니까.
"황실의 일급금위께서 납시었나이다!!!"
문지기가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문지기는 백란의 존재를 가문에 알린 것이다. 문지기 치고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내가 알아차린 걸 백란이 모를 리 없었다. 백란은 느긋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누군가는 4층 건물 창문에서, 누군가는 1층 창문 끝에서, 누군가는 뒷간에서. 경공까지 사용하며 달려온 그들은 바로 백란의 앞에 부복했다.
‘그래. 똥 싸다가도 튀어나와야지! 캬아! 이게 권력이지!’
그녀의 등 뒤에서 권력의 힘을 지켜본다. 아주 짜릿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공손함을 보이며 다가왔다. 포권지례를 한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윤가의 소가주, 윤섭이라 합니다."
"일급금위 백란이네. 윤가의 가주, 윤공석에게 역적 혐의가 있네. 마가(魔家)는 혈맹을 이룬 가문들이라고 들었으니… 그대들 여섯 가문이 반역을 모의한 것인가?"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윤섭이 화들짝 놀라며 부인했다.
"그걸 확인하는 게 내 일일세. 다른 다섯 가문에게 연통하여 일주일 내로 윤가로 모이도록 전서구를 보내게.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네. 다만, 그때는…."
"지금 당장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그, 다만… 천가는 저희와 선을 그을 것입니다."
"천가는 마가가 아닌가?"
"그들은 마가가 아닌 마종가(魔宗家)라 칭하며 저희와 함께하지 않습니다."
"천가라 하면 천마신교. 후에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니… 다른 네 가문은 어서 모이는 게 좋을 걸세.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네."
"사흘내로 모일 것입니다! 백란 님,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드시지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나와 백란은 윤가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둘이 있게 된 백란이 차를 홀짝이며 웃는다.
"어떤가. 일이 잘 풀리고 있지 않나?"
"일급금위의 권력이 대단하군."
"모두 황제에게서 나오는 권력이지. 아마 내일쯤이면 천유운의 귀에 오늘 소란이 들어갈 것이네. 자네와 나와 함께하는 것 또한."
"윤가에게 일부러 나를 보였군. 왜지? 천유운이 경계할 텐데."
"그래야 천유운과 천마신교가 자네를 경계할지언정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 내가, 그리고 마가가 뒷배가 되어야 자네가 소천마의 자리를 노릴 수 있네."
"그렇군…. 근데 내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나?"
"내일까지 있게. 갑자기 사라지면 이상할 테니. 내일 천마신공이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 그곳으로 가게. 만리서종은 내게 주고."
"만리서종은 왜?"
"쓸 곳이 많으니.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네. 천옥 10개. 어떤가? 값은 꽤 쳐주는 것이네만."
"됐다. 선물이다."
그녀에게 만리서종을 내밀었다. 자고로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란은 잠시 만리서종과 나를 번갈아보다가 웃으며 받았다.
"고맙네. 아, 보름 뒤에 천마신교로 오게. 정확히 보름이네. 그보다 빨라서도 안 되고, 그보다 늦어서도 안 되네. 그때가 최적의 시기일 테니."
보름.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열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천마신공을 익히라는 말이다.
‘음. 불가능할 것 같진 않군.’
[이세계 천마]의 천마신공을 단숨에 흡수했었으니까. 그때처럼 흡수하지 못하더라도 내겐 천강성 시스템이 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백란에게 지도 하나를 받았다. 지도를 펼쳤다. 낙서 수준이었다.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천마릉(天魔陵)은 멀리 있지 않네.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천마릉이 나올 것이네. 나머지는 이 지도를 보고 찾아가면 되네. 무운을 빌겠네."
"드디어 천마신공이 내 손에 들어오는군."
"보름일세. 보름에 꼭 찾아오게. 절대 늦어서도, 빨라서도 안 되네."
"반복해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다."
"절대로 잊지 말게. 천마신공에 심취하지 말고. 일이 끝난 뒤에 천마신공에 깊이 파고들어도 늦지 않으니."
"그래. 그래."
나는 백란을 내려다봤다.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색 입술에 시선이 갔다. 마음 같아선 작별의 키스를 하고 싶으나, 그랬다간 검이 날아오겠지.
나는 그녀에게 짧은 인사는 나누고 천마릉을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