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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26화 (1,606/2,000)

< 1826화 > 1826. 광명승천도

‘이럴 수가.’

천현삭이 조용히 경악했다.

천배복과 성유진의 전투는 처음엔 천배복이 유리했다. 성유진이 심상의 보조를 받아 공격 하나, 하나가 위협적으로 변했으나 천배복과 성유진에는 애초에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성유진은 오기경 끝자락의 무인이었고, 천배복은 조화경 초단의 고수였다.

‘천배복이 성유진을 인정하든, 성유진이 천배복에게 꺾이든.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심상의 우위? 그건 극초반에만 이루어질 뿐이다. 심상이란 곤 정신. 심상의 힘이란 정신력이라 할 수 있었다.

심상의 힘을 세련되게 다루기에는 성유진의 경험이 부족했다. 단순 무식하게 심상의 힘을 휘두르니 그 힘은 빠르게 바닥나기 마련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심상의 힘이 무한히 휘두르고 있다.’

도리어 성유진은 심상의 힘에 익숙해졌다. 천배복은 빠르게 지쳐갔다. 원래 남의 심상에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그들은 이미 죽은 망령들이었으니까.

‘녀석이 사용하는 저 마공은 뭐지?’

천마신공과 굉장히 흡사하나, 천마신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마신공을 모방해 만든 마공이라하기엔 그 깊이가 천마신공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천배복이 죽기 살기로 성유진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허리 옆구리를 길게 베는 치명상. 내장이 쏟아져 나와 거동도 못 해야 정상인데 성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다시 보니 그의 치명상은 사라져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천배복이 소리쳤다. 기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처절했다. 성유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성유진은 아예 몸을 내줬다. 팔이 잘리든, 몸통에서 내장이 나오든, 머리가 박살 나든 개의치 않고 공격했다. 천배복에게 낙뢰와 검이 떨어지고, 성유진의 몸에서 흘러나온 짙은 마기는 용의 형상을 취한다.

성유진은 불사신과도 같았다. 죽더라도 죽지 않는다. 아니, 성유진의 정신이 꺾이지 않는다.

‘몸을 회복하는 것에도 정신력이 소모될 터인데…. 정신력이 무한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젠장…. 내가, 내가 이런 어린놈에게!!"

천배복이 패배했다. 그의 거구가 쓰러지며 사라진다. 천현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패배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존재가 어딘가로 흡수되고 있었다.

‘미쳤군. 4대 천마의 영혼을 흡수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상위 경지의 영혼을 흡수한다면… 역으로 영향을 받아 돌아버릴 가능성이 높을 터인데.’

그러나 성유진은 멀쩡했다. 천배복의 영향을 받아야 할 심상도 마찬가지로 고요하다.

성유진이 획 돌렸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천현삭에게 향한다. 천현삭은 저도 모르게 부채를 접고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았다.

"이제 네 차례다. 죽어서 내 천마신공이 되어라."

천마의 자질과 자격을 판단한다? 잘못됐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초대천마시여. 이놈은 괴물입니다.’

스르릉.

검을 뽑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승산은 없었다. 그래도 천마라는 이름이 있으니 포기하거나, 꼴사납게 목숨을 구걸할 순 없다. 구걸하더라도 살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불사의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

15대 천마 마려곤은 한때 망나니라 불렸던 천마였다.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부하들을 싸움 붙이기를 좋아했다. 패악을 일삼은 그는 천씨가 아님에도 천마가 될 수 있었는데, 당대의 천마신교에서 그를 뛰어넘는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원을 지나 난생처음 보는 웅장한 구조물을 향해 내달렸다. 그는 모르나 서양식 성벽과 성이었다.

‘크흐흐흐. 여자 냄새가 난다. 아주 달콤한 여자 냄새! 관속에 처박혀 있는 것도 지겨웠지. 이참에 회포나 풀어야겠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 하더라도 내 욕구만 만족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내달리던 그의 시야가 낮아진다. 마려곤은 뒤늦게 자신의 양무릎이 잘렸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검은 사슬이 허공에서 나타나 붙잡는다.

촤르르르르륵!

사슬에 붙잡힌 그는 꼼짝할 수 없었다. 천마신공을 사용해도 천마신공은 끊어지지 않는다.

파지직.

사슬에서 검은 전류가 흐르며 그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끄아아아아악!"

"시끄럽습니다."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려곤은 격통을 참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정면, 성벽 위에 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복장을 입었다.

그 아름다움에 잠깐 넋을 잃었고, 무감정한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두려움이 일었다.

"흐, 흐흐. 그 괜찮은 계집이구나. 이 몸께서 너를."

여자가 손에 쥔 단검을 허공에 그었다. 세상에 검은색 가는 선이 그어졌다. 하늘과 땅, 마려곤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마려곤은 억지로 버텼다. 여긴 심상 공간. 남의 심상 공간이라 하더라도 정신력만 충분하다면 버틸 수 있다.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들어 와서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겁니까. 그냥 그대로 죽어 주인님의 양분이 되어주시죠."

마려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죽어도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흐흐흐…. 네년을 내 최대의 적수로 인정하마. 내 모든 걸 걸고 네년을 죽이겠다. 천마신공 파."

그러나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예의 참격이 이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완전한 천마신공을 익히기 위해선 보다 많은 정수가 필요합니다.』

『정수를 흡수하십시오.』

***

9대 천마 빙하상. 그녀는 천마신교 최초로 술법사로서 천마가 된 인물이였다.

그녀는 미인이었다. 피부는 탱글탱글하고 머릿결은 윤기가 흘렀고 이목구비는 뚜렷했다. 몸에 달라붙는 옷으로 자신의 풍만한 몸매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빙하상은 성유진의 자질이나 자격에 관해 관심 없었다. 어차피 초대천마가 결정할 일이니까.

‘심상이 엄청 넓네? 이참에 자유나 만끽해보자.’

눈앞에 산이 보였다. 높은 산이었다. 저 정상에서 둘러보면 심상의 넓이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대천마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그녀는 재밌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시간이었다.

"……!"

뛰어난 술법사인 빙하상은 산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이변을 알아차렸다. 결계다. 누군가의 결계 속으로 들어왔다.

‘이건 끌어들이는 종류의 결계. 그놈은 술법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느넫… 어떻게 이런 고등 결계를…?’

그녀는 천마신공을 운용하는 대신 술법을 사용했다. 허나 결계는 깨지지 않는다. 미동조차 없다. 빙하상은 결계처럼 보이는 이것이 결계가 아님을 알았다.

"후후후. 알아차렸나 보네?"

여성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 위로 여우 귀가 쫑긋거린다. 미녀인 빙하상이 무심코 패배감을 느낄 정도의 미녀였다. 그녀는 여우 꼬리를 살랑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란 여우불이 일어나 빙하상의 몸을 뒤덮는다.

"꺄아아아아아악?!"

빙하상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술법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대량의 물이 불을 끄기 위해 떨어진다. 허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급한 대로 찬미신공의 마기로 몸이 불타는 것을 막았다.

‘이, 이건 술법이 아니야…!’

현상.

그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타오른다는 당연한 상식이자 법칙.

‘이 불을 없애려면….’

이 빌어먹을 심상을 깨트려야 한다. 즉, 눈앞에 있는 가짜 존재가 아니라, 진짜 심상의 주인을 찾아 죽여서 정신을 꺾어야 한다.

‘그놈! 그놈을 죽여야 해!’

빙하상이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결계가 막아선다.

‘나의 법보 여상패가 있었다면…!’

그러나 여상패는 없었다. 결계를 뚫지 못한 그녀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후후후. 좀 더 발악해보는 게?"

"이이익! 인간도 아닌 가짜가!"

"그 가짜에게 죽는 넌 뭐니? 음…. 불나방? 뭔가 나방을 닮았네?"

"아아아아악! 내가 죽더라도 네년만큼은!"

빙하상은 여자를 향해 내달렸다. 술법을 쓰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어지간한 술법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물리적으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성 있다고 봤다.

여자는 빙하상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빙하상의 손에서 마기가 치솟았다. 수공을 이용해 여자의 어깨를 낚아채려는 그 순간, 여자의 몸이 사라졌다.

"후후후."

"멍청하긴."

"지겨워졌는데 그만 죽지?"

빙하상의 뒤에서 여자 셋이 분열하여 나타나 비웃었다. 빙하상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 붙은 팔나 불꽃의 출력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꺄아아아아아아…."

비명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

6대 천마 천비옥, 7대 천마 천농개, 8대 천마 천주정.

그들은 함께 움직였다. 생전에 함께 천마신교를 지배했었던 가족들은 죽어서도 함께했다.

"할아버지. 이 건물들 좀 보십시오. 정말 신기합니다."

"그놈은 다른 대륙에서 온 것 같구나."

"아버지, 아들아. 그놈은 천씨가 아니니 천마의 자격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6대 천마 천비옥은 혀를 끌끌 찼다.

"농개야. 넌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다. 음?"

"아버지? 갑자기 고개를 왜 돌리십니까?"

"방금 파란 나비가 지나가지 않았더냐? 난생처음 보는 아주 아름다운 나비였다. 그 파란 날개는 어찌나 아름답던지. 순간적으로 홀려버렸구나."

"할아버지가 홀렸다고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일편단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래. 내가 실언했구나. 나는 그녀에게 일편단심… 크아아아악! 검성!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내 아내를 죽이려 왔느냐?! 내 오늘 네놈을 죽이고 그 심장을 씹어 먹어주마!!"

"할아버지? 갑자기 왜… 아아악!"

천비옥의 검이 손주인 천주정의 명치를 찔렀다. 천농개가 깜짝 놀라 그사이에 들어가 천주정을 빼냈다. 천주정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영혼이었기에 살았다.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아버지!"

"검성! 네이놈!!!"

"빌어먹을! 환술이다! 아버지는 환술에 걸렸다! 주정아! 아버지를 제압해야한다! 도와라!"

"네, 아버지! 상처가 전부 아물었으니 제가 돕… 감히 반역이냐! 죽어라 반역자!"

천주정이 돌변하며 아비인 천농개를 찔렀다. 환술에 걸린 셋은 서로가 죽을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그들 주위로 파란 나비가 유유히 날아다녔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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