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8화 > 1828. 광명승천도
공간이 획 바뀌었다.
갑자기 피 냄새가 확 끼쳐왔다. 초대천마를 비롯한 천마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곳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여긴 위험하다. 죽을지도 모른다.
‘큰일이군.’
2대 천마 유허군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은 이미 죽어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어서 명계로 가봤자 좋은 대접을 못 받을 것을 알기에 관에 안치되는 것을 선택했다. 초대천마의 말에 따르면 하늘이 열리는 날 새로운 육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천마에게 천마신공을 전수하는 건 부가적인 이유였다.
‘이미 영혼. 여기서 죽으면 끝이다.’
다른 천마들이 죽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초대천마에 대한 존중은 있을지언정 충성심은 없었다.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제는 그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는 것.
‘이 심상의 주인, 그 녀석과 거래할 수 있다면 천마신공의 전수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조용히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초대천마는 앞으로 걸어갔다. 땅이 끈적했다. 어디서 나온 지 모를 피가 땅을 적셨다. 피와 흙이 뒤섞인 진흙은 굉장히 불쾌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천마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담긴 비명이었다.
사람이 보였다. 아니, 그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달막하거나, 짐승 귀와 꼬리가 달려 있거나, 귀가 길쭉했으며, 등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에 꽂힌 채 피와 내장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고통. 오직 고통밖에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리라.
"그마아아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반역은 다시는 꿈에도 꾸지 않겠습니다!"
"제 딸을 바치겠습니다!"
"황제 폐하! 간청드리옵니다! 부디 자비를!"
"자비를!!"
그들은 하늘을 보며 빌었다.
피와 고깃덩어리로 가득한 지상과 달리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여긴 지옥인가…."
"시체처럼 보여도 모두 검에 꽂혀 살아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심상의 존재가 확실합니다만 이 광경은 놀랍군요."
"…그 애송이가 이런 끔찍한 지옥을 겪었단 말이오?"
"그리 생각하니 궁금하군요. 대체 그 어린 시절이 어땠을지."
"황제는 누구지? 설마 현 황제를 말하는 건가? 듣기로는 자비로운 황제라 하지 않았나?"
"그거야 18대 천마와 천유운의 정보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황제와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않은 자들입니다. 진짜 황제의 면모를 모르는 거겠지요."
"조용하라."
초대천마가 손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너희는 느껴지지 않느냐? 이 앞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모두 입을 다물고 긴장하라. 여차할 땐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예."
초대천마가 그리 말하지 않더라도 다른 3명의 천마는 이미 한계까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젊은 외모와 달리 최소 500년 이상 살아온 노괴들이다. 초대천마가 말하지 않더라도 상황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고통으로 가득 찬 끔찍한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우뚝.
초대천마가 멈췄다. 후대 천마가 죽을 때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린다. 눈앞에 보인 광경은 그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곳은 정원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들만 있었다.
하나같이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은 정원의 일부로서 장식되어 있다. 이게 시체였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세상에 미친놈들은 많으니 시체로 방을 장식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경우도 몇몇 봤으니.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아있었다. 살아서 정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몸의 여인들이 양팔을 벌리고 나무를 표현하고, 어느 여자들은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다리를 잡아당겨 음부를 강조했다. 음부의 구멍에는 예쁜 꽃 하나가 꽂혀 있었다. 꽃 옆으로 이슬 같은 애액이 주르륵 흐른다.
길가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나무 위에는 여자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녀들의 둔부는 마치 열매라도 되는 것처럼 위치가 절묘했다.
정원사들도 있었다. 헐벗은 그녀들은 앞치마를 입고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각상을 닦고, 보지꽃에 물을 주고, 보지 열매를 하나, 하나 확인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 방선천리~ 주름잡아~ 황제 폐하 나가신다~! 천신님 쓰시던 날벼락~ 오늘은 황제 폐하 쓰신다~"
머리 위로 날개 달린 여인들이 날아다니며 노래한다. 황제를 찬양하는 곡. 묘하게 중독스러워서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곡이었다.
"으음."
초대천마는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천마들도 모두 질린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이게 황제의 짓입니까? 황제는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미녀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허."
정원의 끝에 한 남자가 옥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불청객들을 맞이했다.
남자는 성유진이었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성유진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어서 와라, 버러지들. 짐의 정원에 남자가 들어온 건 처음이군. 그러니 입장값을 받겠다."
그가 손을 흔든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던 정원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 하늘에 검들이 나타났다.
수천 만개의 검들은 모조리 천마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제 성유진의 옆에는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시커먼 공간.
"너희는 이 심상의 가장 깊은 곳을 확인하고 싶겠지. 딱 한 명이다. 딱 한 명만 허락하겠다. 나머지 셋은 이곳에서 죽는다."
"갈(喝)!!"
초대천마가 소리쳤다.
"네놈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구나! 천마는 타협하지 않는다!"
"짐에게 소리칠 줄이야. 자신 있다는 건가? 어디 한번 그 기개를 보여봐라."
수천만 개의 검이 그들에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평범한 검이 아니다. 한 자루, 한 자루에 대전차미사일 수준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천마들은 일제히 천마신공을 끌어올리며 양팔을 내뻗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마후라(摩?羅).
검은색의 단단한 구슬 같은 반투명한 방어막이 그들 주위에 펼쳐졌다. 그들은 당연하듯이 힘을 합쳐 방어막을 더 견고히 만들었다. 직후, 검이 쏟아지고 튕겨 나간다.
‘반탄력이 대단하군. 웬만한 공격은 전부 반사되겠어.’
황제는 깍지를 풀었다. 흥미가 생겼다는 듯이 옥좌 팔걸이에 팔을 올렸다. 검 몇 자루가 황제를 향해 날아왔으나, 황제의 앞에서 우뚝 멈추더니 사라졌다.
‘나와 달리 이놈들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자, 버틸 수 있겠느냐.’
황제는 웃으며 지켜봤다.
수천만 개의 검이 사정없이 방어막을 두들긴다.
쩍!
검이 백만 개 정도 남았을 무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튕겨 나가던 검들이 사라졌다. 방어막의 반탄력이 쓰러진 것이다. 4명의 천마들은 땀을 줄줄 흘리며 마지막까지 방어에 전념했다.
깡!
마지막 검 한 자루가 튕겨 나갔다.
황제가 작게 감탄했다.
"잘했다. 천마라 칭할 정도는 되는군."
"네놈이 심상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 너와 결착을 내는 건 무의미하니! 거기서 비켜라! 힘의 증명은 이미 끝났다!"
초대천마가 소리쳤다. 물론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단계를 통과했다고 기고만장하기는. 자, 2단계다."
따악!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이 어두워졌다. 천마들이 당황할 때, 가장 먼저 이게 그림자라는 걸 깨달은 건 초대 천마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고 두 눈을 부릅떴다.
달이 떨어지고 있었다.
"초대님!"
"초대천마시여!"
"우리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내력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고 있느니라, 모두 입을 다물라."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초대천마가 달을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꿈틀거리며 검으로 모여든다. 황제는 두 눈에 힘을 줬다. 마기 사이로 은은한 빛이 보인다.
‘별의 힘인가.’
황제는 기대하면서 초대천마를 지켜봤다. 초대천마의 검에 모인 저건 단순한 마기가 아니다. 그의 존재가 육신이 아닌 검에 담겼다. 자신의 모든 것을 검 한 자루에 담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검에 무게가 더해졌다. 못해도 수천 톤…. 아니, 그 이상인가.’
초대천마는 완성된 절대적인 마검을 휘둘렀다.
천마신검(天魔神劍) 마겁(魔劫) 무량(無量).
떨어지던 달이 반으로 정확히 쪼개진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충격은 달 곳곳으로 뻗어나가 달을 산산이 부쉈다. 그 파편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다.
짝짝짝!
황제는 박수를 쳤다. 재밌는 걸 봤으니 박수 정도는 쳐줄 수 있었다.
"이제 비켜라."
초대천마가 가쁜 숨을 감추며 말했다.
"2단계 통과를 축하한다. 마지막 3단계도 통과해라."
초대천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박살 낸 달의 흔적은 온데간데없다. 대신에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
할 말을 잃은 초대천마는 잠깐 두 눈을 감았다 뜨며 황제를 노려봤다.
"본좌는 이 심상의 끝을 봐야겠노라."
"그래라. 나머지 셋은 죽어서 그 값을 치러라."
황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답했다. 그에 놀란 건 다른 천마들이었다.
"초대님!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내가 가겠다! 내가 간다고!"
"이럴 수는 없소! 당신이 그러고도 초대천마요?!!"
초대천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 옆에 있는 시커먼 공간을 향해 달렸다.
"본좌가 너희의 복수를 해주마! 반드시 이 심상의 주인을 죽이겠노라! 본좌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수욱!
초대천마가 공간 속으로 사라지자, 공간은 그대로 닫혔다.
"으아아아아아악!"
"저딴 걸 초대천마라고 섬기고 존경했다니!!"
"죽어서도 네놈과 초대천마를 저주하겠다!!"
황제는 떨어지는 태양을 보며 낄낄 웃었다. 세 명의 천마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고, 누구는 도망치려 했으며, 누구는 이판사판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황제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너희의 죽음은 잘 사용하도록 하마. 무의미한 죽음이 아님을 감사하라."
태양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