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9화 > 1829. 광명승천도
"허억…!"
초대천마 천갈손은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모든 압력이 사라졌다. 아주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느낌이라고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있는 곳은 이 심상 세계의 가장 깊은 곳이었지만.
초대천마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다시 경악했다. 이 공간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무(無). 새하얀 공간만이 존재했다.
심상 세계의 가장 깊은 심처는 인간의 약한 부분이 존재했다. 마음의 상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심상의 핵, 겉치레 하나 없는 온전한 정신이 위치한 곳이었다. 초대천마는 성유진의 심핵(心核)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알았다. 이놈은 천마의 자리로 만족하지 못한다.’
더 높이, 더 넓게 끊임없이 강해지려 할 것이다. 그럴 만한 능력이 놈에게 있었다. 아마도 그를 위해서라면 천마신교는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수 있겠지. 천마신교 따위라 하면서.
천마신교는 초대천마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역사이기도 했다.
‘등선(登仙)을 하지 못했기에 천마신교를 남겼다. 이런 방식으로도 영혼을 남긴 것은 천마신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간에서는 등선을 포기하고 천마신교를 위해 헌신했다니 뭐니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등선을 하기에는 깨달음과 수명이 모자랐다. 이런 방식으로 천마신교를 전수하는 것도 죽은 뒤에도 천마신교를 확인하고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서였다.
‘모든 것은 그때 무덤에서 이름 없는 마공을 발견하고 시작되었지….’
그 이름 없는 마공에 천마신공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지금도 그 마공의 기원이 무엇인지 모른다. 확실한 건 천마신공이 여타의 마공과는 격이 다른 절세의 무공이라는 것뿐.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초대천마는 깊어지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존경하지 않는 천마는 필요 없다. 그 심핵을 박살 내 죽여주마.’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심핵을 박살 내고 자신의 심핵을 그 자리에 구현하면 어떨까? 그럼 이 재능 넘치는 육체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부활의 그날을 기다릴 필요 없이.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지만…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천마신공에는 혼(魂)과 관련된 기술이 있다. 역대 천마들의 혼이 명계로 끌려가지 않고 관에 보관될 수 있었던 것도 천마신공 덕분이지….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는 천마신공을 맹신했다. 천마신공이야말로 자신이며, 자신이야말로 천마신공이다.
앞으로 걸어갔다. 방향은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방향을 알 턱이 있나. 그저 앞으로 걸었다. 뒤로 걷거나, 옆으로 걷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밤하늘이 생겨났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의 기운이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별의 기운은 심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다만, 이런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건 좀 의외였다. 지암성(地暗星)을 타고난 그였기에 별의 기운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강성(天?星)! 이놈은 천강성을 타고났구나! 이런 어마어마한 놈이…!’
별 중 으뜸이라는 천강성. 그 천강성의 기운이라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만, 천강성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지금껏 천강성의 기운을 타고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이 육체만 얻을 수 있다면…!’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등선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써 기쁜 마음을 숨기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초대천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용이 있었다.
검은색 용이었다. 쇠사슬을 칭칭 휘감은 검은 용이 똬리를 틀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구슬이 있었다. 여의주다.
‘아니, 저건 심핵이다. 용은 심핵의 방어를 위한 존재일 뿐이다.’
검은색 용. 그 자태가 대단했다. 그 위압감은 방금 마주했었던 황제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마룡(魔龍)이다.
다행인 점은 마룡은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마룡에게 다가갔다. 마룡이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초대천마는 방심하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며 마룡을 넘어 심핵에 향했다.
허공에 떠 있는 심핵은 구체였다. 크기는 머리통만 하다. 그는 심핵의 형태에 집중했다. 완벽한 하얀색 구체.
‘심핵은 본래 가장 뜻깊은 물건의 형태를 취한다만….’
이 구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마룡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초대천마는 심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매끈한 촉감이 느껴진다.
천마신공을 사용했다. 마기를 이용해 심핵을 터트리고 바로 자신의 존재를 새로운 심핵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검은 마기가 새하얀 심핵으로 파고 들려는 순간이었다. 세계가 확장됐다. 끊임없이 세계가 확장된다.
초대천마는 그것을 보았다. 그것의 앞에서 자신은 한낱 미물만도 못했다.
"……!!"
초대천마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뭐였지? 무언가를 본 것 같은데… 대체 뭘 본 거지?’
심핵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새하얀 구체는 완벽한 자태를 뽐냈다.
그는 다시 한번 심핵을 부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본능이 저걸 만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손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너의 번뇌가 느껴지는군.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 마룡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초대천마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룡의 붉은 눈동자가 초대천마를 담았다.
"…깨어 있었나?"
-뭘 하는지 지켜봤지만… 역시는 역시군.
파칵!
마룡이 움직이자 그 거체를 휘감고 있던 사슬이 사라진다.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초대천마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마룡이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는 마룡의 입안을 보고 몸이 굳었다. 마룡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용의 몸은 단순히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것은 마(魔)였다.
그저 순수한 마(魔)였다.
콰직!
몸의 절반이 마룡에게 씹혔다.
"크아아아아악!"
초대천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냥 몸이 씹힌 게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찢겨 나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룡은 그의 비명을 즐기며 그저 위로 솟구쳤다.
"이 노오오옴!"
그는 마룡의 악의를 느꼈다.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음에도 일부러 자신의 절반을 씹었다.
-좀 더 발버둥쳐라. 날 더 자극시켜라!
초대천마가 한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소용없었다. 검날은 용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초대천마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써서 안 되는 최후의 수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살아야 한다! 죽을 수 없다!’
애써 그 수단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천마신공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룡에게 빼앗겼다. 마기가 마룡에게 빨려 들어간다.
자신의 천마신공이 마(魔)에게 굴복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천마신공이 없는 초대천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름의 별미였다.
초대천마를 완전히 씹어삼킨 마룡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더 위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는 거다.
촤르르륵!
지상에서 올라온 사슬이 마룡의 거체를 휘감는다.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구속에 마룡이 체념했다.
-…그럼 그렇지.
강제로 몸이 끌어당겨져 지상으로 떨어진다. 사슬은 심핵으로부터 나와 있었다. 심핵에게 붙잡힌 마룡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똬리를 틀었다.
-빌어먹을 천강성. 씹어먹을 절대정신.
마(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용당할 뿐이다.
-성유진 씨발새끼.
***
『천마신공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기존의 천마신공과 합성합니다.』
흡수한 천마신공이 느껴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천마신공의 정보를 확인했다. 꽤 흥미로웠다.
‘이 천마신공은 힘과 검이군.’
무식할 정도로 힘을 추구하는 검이었다.
또한 초대천마가 천마신공을 어떻게 썼는지 알았다.
‘초대천마는 별의 힘을 적절히 섞었네.’
초대천마가 타고난 별은 지암성(地暗星). 그 별의 기운을 사용하면 질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사용하기에 따라선 일검에 태산의 무게를 담을 수 있다.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검의 질량을 태산과 비슷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천강성은 다른 별들과 다르니… 초대천마처럼 사용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천마 13명의 영혼을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한 건 좋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지금 나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내 주위에는 음기가 가득하다.
‘지금 흡수한 천마신공을 만들려면 지금 당장 운기행공에 집중해야한다. 하지만… 천마신공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죽고 다시 부활하더라도 또 죽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황이 위급해.’
그냥 한 번 죽고 공간 이동해버릴까.
‘안전을 추구하면 그렇지만…. 너무 아까워.’
이 자리에서 먹은 것들. 그리고 이 자리에 넘쳐나는 음기들. 이것들 전부를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다. 한 번 해보자.’
막대한 음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약의 기운과 음기가 섞이며 거대한 힘이 되었다. 그 힘이 내 안에서 날뛰며 사라지고,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평소였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특수한 상태였다. 혼을 사용하는 천마신공과 내게 흡수된 13명의 천마의 영혼. 비록 그 영혼의 찌꺼기라고 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천마의 영혼들을 소모해 몸을 보호하고 거대한 기운의 제어를 시도했다.
***
눈앞에 벽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벽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약간 줄어들어 있었으나 여전히 컸다. 그리고 굵었다.
나는 벽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주먹을 꽉 쥐었다.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힘이 넘쳐나는 지금, 이 벽을 부술 기회였다.
쾅!
주먹이 벽을 때렸다.
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더 힘을 주고, 더 강하게 벽을 때렸다.
콰아앙!
벽이 흔들렸다. 주먹을 박아 넣은 벽에 금이 갔다.
주먹이 너덜너덜해졌다. 알게 뭔가. 다시 한번 주먹에 힘을 줬다. 이번에는 힘을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주먹에 담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벽이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