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0화 > 1830. 광명승천도
천마릉.
수천 년 동안 짙은 안개에 감싸여 있던 그곳에 이변이 일어났다.
안개는 사라지고, 구천을 떠도는 망령들은 흩어졌다. 그 지하에 끊임없이 흐르던 음한수(陰寒水)는 어느 한 지점으로 몰렸다.
성유진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하는 곳, 천마 13명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 음한수는 그곳에서 성유진에게 모조리 흡수되고 있었다.
그의 육체에서 새까만 마기가 새어 나온다. 이어 그의 온몸이 마기로 감싸였다.
그의 몸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한치 높이로 떠오른 그의 몸으로부터 막대한 마기가 터져 나와 용의 형상을 취한다. 용의 주위로 푸른 번개가 번쩍였다. 번개를 휘감은 검은 용은 성유진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콰콰콰콰콰콰!
승룡한 용은 검은 기둥이 되어 사라졌다. 그 울음소리가 널리 퍼졌다.
천마릉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생겨난 검은 기둥을 발견했다.
무지한 자들은 재앙의 징조라 여기며, 성난 하늘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준비했다.
식견이 있는 자들은 그 거대한 기운을 보고 새로운 절대고수가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 성유진은 여전히 가부좌를 한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다. 운기행공에 집중한 그는 이 사태를 꿈에도 몰랐다. 지금 막 그는 자신을 가로막던 벽을 부순 참이었다.
넘쳐나던 기운을 한 번 발산되고 난 뒤 조용히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평온한 그의 얼굴만큼이나 일은 순조로웠다.
이윽고 그의 기운은 머리 위로 모여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검은 꽃이 하나 피어나고, 그 옆에 두 번째 꽃이 연이어 이어진다. 세 번째 꽃은 꽃봉오리부터 만들어져 서서히 피었다.
총 3개의 꽃이 그의 머리 위에서 피어난 것이다.
온전한 삼정(三頂)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
눈을 뜬 나는 허공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주위에서 요동치던 음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뿐했고,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드디어 삼정의 경지에 올랐다.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힘을 쓰고 싶군.’
몸에서 흘러넘치는 힘. 이 힘을 당장 사용해보고 싶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군. 느껴진다.’
대충 오기경의 고수가 4명에 떨거지들 70명 정도다. 절반 정도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다.
‘정체는 뻔하지. 여기서 가까운 문파 소속의 무인들일 터.’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뒤처리다. 여기가 천마릉이란 걸 생각하면 십중팔구 천마신교와 엮여 있다.
‘그것도 현 천마와 엮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지금 내가 삼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천마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이제 막 삼정에 올랐고, 천마는 그다음 경지인 조화에 오른 무인이었다.
‘귀찮아지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겠군. 천마릉의 모든 것은 내가 흡수했으니 여긴 텅 빈 공터나 마찬가지다. 아쉬울 게 없다는 뜻이지.’
바로 천마신교로 갈 순 없었다. 백란은 정확히 보름 뒤에 천마신교로 오라고 했었다. 늦어도, 빨라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녀의 계획에 맞추기로 했으니… 대충 일주일 이상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겠군.’
그러니까 일주일 이상의 여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돌아가는 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간 이동 주문서도 있고, 천강성 시스템의 공간 전이도 있으니까.
‘일단은 낙월산으로 가볼까.’
『공간 전이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공간 전이 장소: 낙월산』
『공간 전이 시스템은 24시간 뒤에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야가 단번에 바뀌었다. 나는 낙월산 아래쪽에 나타났다. 마음 같아선 낙월산 정상 부근에 나타나면 좋지만, 미령이 설치한 결계 때문에 공간 전이가 불가능했다.
‘이전에는 산 위의 저택으로 올라가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었지.’
공간함에서 미령이 준 부적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일종의 출입증이었다. 이게 있어야 미령의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금은 비뢰신이 있으니까.’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가볍게 하늘을 향해 뛰었다. 날 듯이 허공을 달려 낙월산 정상에 30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누군가 했더니 제자놈이었군."
낙월산에 내가 지은 조립식 주택 건물 옥상위에 위유가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이 세계 특유의 복장이 아닌 하얀색 선이 들어간 검은색의 트레이닝복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끈으로 질끈 묶었다.
뭐라고 할까. 체육 선생님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스승님!"
나는 바로 그녀의 앞에 내려섰다.
"호오. 벌써 삼정에 올랐느냐? 적어도 30년은 걸릴 줄 알았건만…. 아까 보인 경신공은 네가 만든 것이냐?"
"예. 비뢰신이라 합니다."
"썩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런데 스승님. 그 복장은?"
"운동 중이었다. 움직이기 편해서 좋더구나. 트… 트 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는데."
"트레이닝복."
"그래. 그 이름이었다."
옷이 무척 잘 어울렸다. 적당히 몸에 달라붙어서 굴곡진 선을 드러내니까. 특히 H컵의 풍만한 가슴이 내 시선을 끌었다.
"남궁린과 남궁설의 기척이 안 느껴지는군요. 밖으로 나갔습니까?"
"폐관 수련 중이다. 여우 녀석이 쓸만한 진법을 만들어내서 말이지."
"쓸만한 진법이요?"
"그래. 무슨 만화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던데…. 강제로 정신세계에 처박아 실전과 같은 전투를 연이어 하는 수련용 진법… 이라고 하더군. 꽤 쓸만했기에 이용하고 있다."
"저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여우의 말로는 네겐 아무 소용 없을 거라더군."
아마 절대정신 때문에 한 말일 것이다. 미령은 유희 생활 어플에 대해 아는 만큼 절대정신도 알고 있으니까.
"삼정에는 어떻게 올랐느냐? 당연히 평범한 방법은 아닐 테지?"
"아래에 미령이 있지요? 같이 식사나 하며 대화하시죠. 똑같은 말을 두 번 하긴 귀찮으니까요."
"건방진 놈. 스승에 대한 말투가 그게 뭐냐."
"스승님. 제가 평소 스승님에게 얼마나 잘합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에 위유가 움찔댄다.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나왔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머무는 집, 더울 때 틀 수 있는 에어컨과 추울 때 돌릴 수 있는 보일러, 이 세계에선 절대로 맛볼 수 없는 현대의 음식들까지.
"…정색하지 마라. 내가 네놈에게 신세 진 것은 알고 있다. 허나, 난 너의 스승이기도 하다. 제자가 스승의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부일체라는 말도 모르느냐? 그러니 충이자 효라고 생각하거라."
"스승님은 여자이지 않습니까. 군사부일체가 아니라 군사모일체가 아닌지."
"어허, 이놈! 어디 하늘과 같은 스승님에게 말대꾸냐! 젊은 나이에 삼정에 오르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느냐? 천하는 넓다! 너보다 강한 자는 저 하늘의 별… 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으니라."
"……."
위유는 몸을 획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발달 된 골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덮치면 가능성 있나?’
불가능했다.
그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전력으로 발하는 일검을 내가 막아낼 수 있을까?
‘……덮치는 건 역시 안 되겠군.’
삼정의 경지에 오른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를 보니 힘이 쭉 빠진다. 내 심정을 짐작한 것일까. 위유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추고는 나를 돌아봤다.
"지금의 나와 너를 비교하지 말거라. 너는 아직 100년도 살지 않았느니라. 그 경지에 그 나이는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다."
"아, 넵. 혹시 초대천마를 아십니까?"
초대천마와 위유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모르겠군. 내가 한참 강호 활동을 할 때는 여성 천마였다. 분명 18대였던가…?"
"그렇군요. 그럼 황제에 대해선 아십니까?"
"만나본 적 있다. 지나치게 성실한 놈이다."
그녀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
식탁, 내 옆에 앉은 미령은 경악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평소에는 감추고 있는 여우 귀와 여우 꼬리가 바짝 섰다.
"마, 말도 안 돼! 삼정? 삼정?! 삼정이라고요?!!"
덤덤한 위유와 달리 놀라 자빠질 듯 반응하는 그녀를 보니 기분 좋아졌다. 현실에서 개인 방송을 해서 그런지 리액션이 찰지다.
"10분 전쯤에 삼정에 올랐지. 뭐, 해보고 나니 별거 아니더라."
"미, 미친…."
미령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녀는 진심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몇 살이었더라?"
"나, 나이는 관계없잖아요! 전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보다 서방님은 사기라고요! 천강성에 유희생활어플까지! 제가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
"지금 네 경지가 정확히 어디야?"
"…삼정 8단이요."
"7단 아니었어?"
"제가 놀고먹는 줄만 아시죠? 저도 수련하거든요. 특히…."
미령은 맞은편 식탁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위유는 힐끗 바라봤다. 미령의 표정은 복잡했다. 고마움과 원망이 섞여 있다고 해야 하나.
‘미령이 위유에게 시달리긴 했지.’
미령은 유리아 정도는 아니지만, 재능이 뛰어나다. 어떤 일을 시켜도 곧잘 한다. 청소는 물론이고 요리까지.
‘요리는 어느새 유리아를 따라잡은 것 같은데.’
위유에게 요리를 해 바치면서 실력이 대폭 늘었다.
‘위유는 그 보상으로 미령을 굴렀겠지. 미령의 입장에선 보상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미령의 입장에선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이 세계에서 나랑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삼정 4단의 경지였으니까.
"저기 서방님. 일주일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죠?"
미령이 살살 눈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놀러 가지 않을래요? 심심해서요. 가끔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있어요. 사람이 계속 일할 순 없잖아요. 쉴 때는 쉬어야 해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위유를 쳐다봤다.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미령도 위유의 제자나 다를 바 없었다.
위유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령의 말이 맞다. 기분 전환은 중요하지. 일주일 정도면 부담스럽지도 않으니 다녀오너라."
"와아아!"
미령이 환호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고수가 된 기념으로 밖에서 고수질 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