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4화 > 1834. 광명승천도
"가주님…."
음울한 목소리가 동가(東家)의 동수천을 불렀다. 동수천은 본채 꼭대기 층을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부하이자, 사촌 동생인 동수오에게 말했다.
"…그래. 말해라."
"이대로 그 연놈들이 시키는 대로 하실 겁니까?"
"방법이 없다. 방법이…. 그 연놈들의 힘을 너도 알지 않느냐."
동수천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놈들은 느닷없이 나타났다. 대문을 박살 내고 가문 안으로 성큼 들어와 힘으로 가솔들을 무릎 꿇렸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 앞에서 동수천을 비롯한 가문의 일원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놈을 위해 수백 년 동안 모은 재산을 사용해야 했다. 또한 아내와 딸을 꽃단장하고 놈에게 보내야 했다. 아내와 딸이 오늘 밤에 겪을 일은 뻔했다.
동수천의 가슴 속에는 분노와 증오, 복수심이 꿈틀거리며 끓어오른다. 허나 그것들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방금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이 감정을 내보이는 순간 그 연놈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일 것이다.
약해서 감정조차 내보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 이상으로 자괴감이 차오른다.
"도시의 다른 가문과 문파들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음식을 들여온다는 이유로 결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끌어들이겠습니다."
"그들로 될 것 같으냐? 저들은 삼정의 무인과 술법사다. 도시에 있는 모든 무인들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은 적다."
"무인들뿐만이 아니라 평민들도 불러 모으시죠. 해오시(海娛市)는 인구수만 이백만입니다. 이 중에 1할만 나서도 20만입니다. 특히 거친 바닷일을 하는 어부들은 무기만 쥐여줘도 병사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질이 아니라 물량으로 승부 하자는 말이었다.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삼정의 절대고수라고 해도 인간이었다. 체력의 한계는 존재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시민들을 강제로 동원할 수는 없다. 그럴 권한과 명분이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않느냐."
해오시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동가는 민심이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결국 동가는 시민들의 세금과 피와 살로 영광을 이루었으니까. 동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시민들에게 저 연놈들의 포악함을 알려주면 됩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우리를 먼저 죽일 거라는 사실을 알면 당장에라도 저 연놈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동수오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그는 살심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늘 낮에 죽은 자식들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 떨어진 검은색 마기의 검. 그것이 별채에 떨어지며 그가 자기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던 자식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죽었다.
"…무슨 짓을 할 거냐?"
"6년 전에 해오시로 기어들어 온 주술사 노파를 알 것입니다."
해오시는 대륙 끝에 있는 도시였다. 그에 강호 세력과 황제의 영향이 적게 미쳤다. 때문에 흔히 말하는 무림 공적이나 헌상금 붙은 범죄자들이 기어들어 와 음지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래. 몇 년 전에 보고 받았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 늙은 주술사가 도움이 되겠느냐? 듣기로는 별 볼 일 없는 주술사라고 들었다."
"실제로 별 볼 일 없습니다. 하지만 탕정은 현상금이 붙여지기 전에 작은 마을을 조종해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탕정에겐 일반인을 조종할 수 있는 주술이 있는 겁니다."
"…무슨 뜻인 줄 알겠다. 그 주술을 이용해 일반인들을 끌어들이자는 거로군. 문제는 뒷감당이다. 이 사실이 황실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가주님. 그 연놈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가문에는 뒤가 없습니다. 뒤가 있어야 뒷감당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그 연놈들에게 수탈당한 끝에 죽을 것입니까? 그 연놈들은 관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우리를 모두 죽이고 떠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그 연놈들은 도망갈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죽여야 한다. ……잠깐. 그 연놈들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군. 혹시 너는 기억나느냐?"
"예? 여자 쪽은 아름다운 외모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이런. 이건 술법입니다!"
동수천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망할…. 아주 작정하고 찾아왔구나. 대체 우리 가문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울분을 터트려도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가주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 방법도 병행하시지요."
"무슨 방법이냐?"
"남녀 사이만큼 오묘한 것은 없습니다. 그년은 물욕이 넘치고, 그놈은 색욕에 미쳤습니다. 잘만 이간질하면 서로 싸우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거라."
***
늦은 밤, 동수오는 냄새나는 골목길 안에서 탕정을 만났다. 탕정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노파였다.
"끌끌…. 선자불래 내자불선 (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 미친 연놈들이 동가를 찾아왔다는 거구만.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너는 사람을 조종하는 주술을 쓴다고 들었다. 병사들이 필요하다."
"아하. 시민들을 내 주술로 끌어들여 그 연놈을 죽일 생각이구먼? 물량을 앞세우는 작전인가. 나쁘지 않지. 삼정이라 하더라도 체력이 무한한 건 아니니. 끌끌끌."
당수오는 탕정의 웃음소리가 기분 나빴다. 꼭 짐승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식의 복수를 위해서 참아야 했다.
"죽기 싫으면 협력해라."
"끌끌.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네. 급한 건 내가 아니라 동가가 아닌가?"
"…뭘 원하지?"
"요즘 내가 기가 허해서 말이야. 협력하려고 해도 기운이 있어야 뭘 하지 않겠나?"
당수오는 공간함에서 영약을 꺼냈다. 가문을 나서기 전에 챙겨온 것들이었다. 탕정의 입가가 찢어졌다. 탐욕으로 가득 찬 노파의 미소는 역했다. 탕정은 영약을 받아들고는 냉큼 입에 가져가 씹었다.
"좋아, 좋아…. 젊어지는 기분이야…."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더 많은 영약을 줄 수 있다. 또한 너를 동가의 식객으로 받아들여 평화로운 말년을 보장하지."
"동가의 식객인가. 나쁘지 않군. 이봐, 어린아이의 피를 가져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어린아이의 피? 그게 왜 필요한 거냐?"
"네가 원하는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서지. 주술이 그냥 쓴다고 되는 줄 알아? 주술은 저주를 다루는 술법이라는 말을 못 들어봤나? 어린아이의 피가 없으면 주술을 쓸 수 없어. 협력도 할 수 없지."
"…그래 최대한 빨리 구해오마."
이를 뿌득 간 동수오는 한 시진 뒤에 어린아이의 시체 3구를 가져왔다. 이 시체들을 가져오기 위해 도시 외곽지역에 사는 농가 하나를 몰살했다.
"쯧쯧. 피만 가져올 것이지."
"…닥치고 시작해라."
탕정은 항아리를 가져와 아이의 시체로부터 피를 빼서 담았다.
"됐다. 조종할 인간들은 어디에 있지? 말해두지만 무공이나 술법을 조금이라도 익힌 자들에겐 내 주술이 통하지 않는다."
"바다 쪽, 어촌으로 간다."
어두운 밤의 어촌은 조용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길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잔잔히 울린다.
"끌끌."
탕정과 동수오는 어촌 중심, 소리가 잘 퍼지는 위치에 섰다. 노파는 마른 걸레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린아이의 피가 든 항아리를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품에서 검은색 피리를 꺼냈다. 그녀의 손가락처럼 가늘고 비틀어진 검은색 피리였다.
그녀는 피리를 항아리 속에 푹 담갔다가 꺼냈다. 피리의 표면에 어린아이의 피가 달라붙었다. 탕정은 웃으며 피리를 입에 물었다.
"―――――"
피리에서는 쇳소리가 울렸다. 결코 시끄럽지도, 조용하지 않은 피에 잠긴 소리는 잠든 어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비악오심(琵惡汚心). 그녀의 주술은 일반인들의 정신을 건드려 조종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로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정신을 완전히 오염시켜야만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6개월. 그러나 지금 동가에게는 6개월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다른 방식을 택했다.
"――――――――"
그 마음에 분노를 심는다. 터지면 제 아비와 자식도 몰라보게 되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는다.
"――――――――――――――"
이 분노가 터지는 건 딱 한 번이다. 분노의 대상은 동가를 지배하고 있는 연놈이 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모른다. 관심도 없다. 다만, 탕정은 알고 있다. 자신은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게 되리라는 것을. 동가가 병신도 아니고 자신을 살려둘 리 없다.
"―――――――――――――――――――――"
피에 젖은 피리소리를 들으면서 탕정은 속으로 웃었다.
‘마지막으로 즐기고 가야지. 끌끌끌.’
이후, 그들은 다른 동네로 향했다.
***
"오오오!"
미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내 입은 찢어지듯이 커졌다. 가주의 아내라, 딸이라고 했던가? 제대로 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하니 선녀와 같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뒤를 따르는 아름다운 기녀들까지!
그녀들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분위기가 달아오를 테고, 그녀들도 적당히 풀어질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오늘은 내 여자가 된다는 것은 변함없다.
"흐으응."
미령은 콧소리를 내며 여자들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여자들의 미색이 자신에 못 미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은 맞았다. 이 여자들보다 미령이 몇 단계는 더 위에 있는 미녀였다.
미령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 또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풍만한 가슴이 손에 잡힌다. 조금씩 딱딱해지는 젖꼭지를 살살 굴리며 기녀들에게 말했다.
"신나는 곡을 연주하고 춤춰라! 제일 춤을 잘 추는 여인에겐 영약과 금자를 내리겠다! 물론 너희도 포함이다."
나는 가주의 아내와 딸에게 말했다. 내 옆에 있는 영약과 금자들은 당연히 동가의 것이었다. 두 모녀는 떨리는 눈으로 영약을 바라봤다.
한 기녀가 벌떡 일어났다. 탐욕을 감추지 못한 기녀는 일부러 옷을 풀고는 중심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아한 춤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110년 하수오와 금 10냥을 하사하지."
"가, 감사합니다!"
기녀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넙죽 엎드렸다. 나는 그녀에게 110년 하수오와 금 10냥을 지급했다. 다른 기녀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긴장하던 그녀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아직까지 굳어 있는 가주의 아내와 딸을 보며 말했다.
"가장 야한 춤을 추는 여인에게 이 내단을 하사하겠다. 대충 물의 기운이 담긴 내단이군. 복용하면 피부가 미끈해지겠지."
"아이참, 그거 내가 갖고 싶었는데… 저도 참가해도 되죠?"
미령이 일어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투는 금지다."
"앗, 서방님의 약점이었는데…. 어쩔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