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9화 > 1839. 광명승천도
금이 간 화련비도. 처음부터 금이 가 있긴 했으나,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사람을 아무리 썰어도 화련비도가 부서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금이 간 부분이 더 커졌다!’
이전에는 자세히 봐야지 금이 간 부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충 봐도 칼날에 금이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화련비도는 금이 생겼더라도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했기에 별생각 없이 휘둘렀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화련비도를 허공에 휘둘렀다. 다행히 부서지지 않고 멀쩡했다. 아까는 왜 금이 간 걸까.
‘처음 금이 갔을 때는 백환 세계에서 드래곤을 상대했을 때다. 그만큼 드래곤의 비늘이 더럽게 단단하긴 했어. 드래곤 비늘로 만든 게 화련비도라 그런 걸 수도 있고.’
즉, 다시 말해 방금 내가 휘두른 검격이 드래곤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강력했다는 뜻도 된다.
‘지암성의 힘을 너무 무식하게 사용했나?’
어쨌든 당분간 마겁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미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화련비도에 금이 가며 잊고 있었는데 지금 나는 전투 중이었다. 상대가 워낙 좆밥이었기에 위기감이 부재한 것도 이유였다.
나는 정면을 바라봤다. 일반인들이 피와 살로 질척이는 바닥을 밟으며 내게 진격하고 있었다.
‘5,000 명이 한 번에 뒤지는 걸 보면 좆됐다는 걸 느껴야 하지 않나?’
제정신이라면 날 상대하려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놈들은 주술로 조종당하고 있다.
‘주술사를 죽였는데도 주술은 이어진다라. 성가시군.’
나는 수십만 명을 너무 얕봤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대량의 인간들을 보면 일종의 쓰나미처럼 보였다.
"미령. 저놈들에게 걸린 주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수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애초에 주술 계열은 사용하는 것보다 해주 하는 게 더 힘들어요. 지금 제가 나서봤자 5분에 300명이 고작일걸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이는 편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에요. 문제는 수가 너무 많아서 전부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지쳐버릴 테지만요.
수십만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엄청난 줄 몰랐다.
-가장 효과적인 건 도망치는 거예요. 전이술이 아니어도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잖아요.
"도망치더라도 가주 새끼는 죽이고 가야지."
문제는 동가의 가주가 모습을 감췄다는 거다. 밀려드는 일반인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내겐 천안이 있으나 모래알 하나, 하나를 살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 새끼의 의도는 뻔하다. 나와 미령이 일반인을 상대하며 지치기를 원하고 있다. 완전히 지쳤을 때 막타를 꽂으려 나타날 테지.
‘네 뜻대로 되나 한번 보자.’
화련비도의 칼자루를 손에 쥔다. 칼날에는 금이 갔지만, 화련비도의 내구성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강력한 공격이 아닌 이상 버틸 것이다.
‘화련비도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며 요도의 반열에 올랐다.’
화련비도를 죽인 놈들이 너무 많았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아마 어떤 장인이 오더라도 화련비도의 요기를 빼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화련비도를 최고의 요도로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나.
‘눈앞에 있는 수십만 명. 그냥 두고 가기엔 아깝지. 이렇게 된 이상 화련비도의 제물이 되어라.’
천마기를 끌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온몸을 덮치는 피로를 느꼈다.
‘천강성의 빛을 사용한 대가군.’
천강성의 빛은 마냥 쓰기 좋은 힘은 아니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피로가 덮쳐오고, 다른 별의 힘을 알아야 사용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별의 힘은 지암성뿐이다. 지암성의 힘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거다.
‘자미성이나 천살성이란 이름은 알아도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쓸 수 없다.’
그럼 천강성의 빛은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싶지만, 방법은 있었다.
『천옥 100개를 사용해 랜덤으로 별의 힘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무려 천옥 100개를 사용하는 가챠. 천옥 100개가 옆집 개 이름도 아니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
화살이 수십 발이 날아온다.
일반인들 사이로 궁수가 섞여 있었던것이다. 나는 화련비도의 칼날로 원을 그리듯 크게 휘두르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냈다.
‘…손이 얼얼하다.’
화살에 실린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이건 절대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렇다고 감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힘도 아니고.
‘낭인. 낭인을 고용해서 사람들 사이에 끼워 넣었군.’
강호를 떠도는 낭인은 강호 어디에도 있으니까.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낭인을 고용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떨어져요!
뭐가?
그 의문의 답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불의 비가 내렸다. 주먹만 한 불이 몰려있는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몸에 달라붙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뜨거워!!"
"저놈을 죽여! 죽여야 한다고!!"
수만의 사람이 불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지옥에서 불타는 죄인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고통과 광기가 아우러져 있었다. 고통에 찬 소리를 지르는 건 대부분 낭인이었다. 일반인들과 달리 그들은 주술에 정신이 조종당하지 않는 상태였다. 일반인들은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분노만 내질렀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고통을 느끼지 않고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파형(波形).
무형의 기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적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일반인들은 감히 기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앞부분이 쓰러지니 뒷부분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무너진 인파로 인해 압사당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에 의해 도시와 육체가 불탄다. 그럼에도 저들의 분노는 꺼지지 않았다.
"죽여라!!"
"죽이라고!!"
"방해하지 마! 저놈을 죽여야 해!"
사지를 버둥거리면서 나를 죽이기 위해 기어 온다. 물론 거의 전부 다가오기 전에 몸이 불타서 죽는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본다. 먹구름은 없었다. 천천히 시작된 비는 폭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불의 비는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고, 인간들을 장작 삼아 타오르던 지상의 불꽃도 빠른 속도로 사그라든다.
-술법이네요. 대충 30명의 술법사가 비를 내리고 있어요.
"느껴진다. 뒤에 있어서 당장 가까이 가기 힘들어."
대륙 끝에 있는 변경이라고 해도 인구수 200만의 도시다. 술법사가 없으면 이상했다.
‘그래도 변경이라 그런지 술법사의 수가 적군.’
몸의 절반이 불탄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돌격한다. 손에 든 것은 중식도였다. 나는 화련비도를 휘둘러 가볍게 적을 죽였다.
쾅! 콰아아앙! 쾅!
적들을 향해 낙뢰가 떨어진다. 미령이 술법으로 벼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낙뢰의 대상은 술법사들이다.
-거슬리는 놈들을 죽이고 있긴 한데…. 아까 불의 비를 내리느라 기를 너무 많이 사용했어요. 원래 그런 대규모 술법은 철저한 준비 끝에 사용해야 하는데… 하아.
"뭐야. 벌써 한계야?"
-한계는 아니에요. 조금 힘들다는 거죠. 서방님 최소 30만 명은 남아 있어요. 미쳐서 달려들고 있죠. 어떻게 할래요?
"다 죽인다."
-네에, 네에.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후우. 대비를 좀 더 철저히 했더라면 쉽게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놀았네요.
인파가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리가 상당히 빠르다. 적 중 누군가가 인파를 적절히 관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정면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천마신검(天魔神劍) 수라난무(修羅亂舞)
하나의 거대한 검기가 적들에게 날아갔다. 검기는 이어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 작고 날카로운 검기들이 사방을 휩쓸며 모든 것을 베어냈다. 검기의 춤은 곧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토막 난 시체가 가득했다.
저벅!
하찮은 무기를 꼬나 쥔 일반인들이 핏물을 밟으며 그 자리를 메꾸었다.
"죽어어어어!"
나는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검기 대신에 검풍을 날렸다. 검기에 비하면 당연히 위력은 떨어졌으나, 지금 상황에선 그게 더 효율적이었다.
서걱!
6명의 머리가 허공에 떠오른다. 몇 번이나 칼을 휘둘렀다. 적을 죽이고 또 죽였다. 허나 적은 줄어들지 않는다.
쾅!
오른쪽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담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수천 명의 일반인들이 오른쪽으로 달려온다.
쾅! 콰아앙! 쾅!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건물과 담장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사람이 채운다. 포위당했다. 폭풍의 눈이 된 기분이다.
‘폭풍과 다른 점은 바람이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온다는 거지.’
나는 화련비도의 칼자루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태풍이라 하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칼날을 가로로 눕히고 몸을 회전했다.
"천마 회오리!!!"
빙글빙글 돌면서 주변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벤다. 심플했지만 꽤 효과적이었다. 시체가 터지기 전까지는.
쾅!
폭발에 휘말린 나는 잠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벽력탄인가!’
이를 악물고 다시 천마 회오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폭발이 일어났다. 한 번이 아니다.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쾅! 콰앙! 쾅쾅쾅!
벽력탄을 던지는 게 아니라서 피할 수 없었다. 이놈들 자기가 죽든, 곁에 있던 사람이 죽든 개의치 않는다. 자폭이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복면을 쓴 살수가 내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살수의 소매에서 칼날이 반짝였다. 이건 위험하다. 타이밍이 완벽하다. 이대로라면 당할 수밖에 없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1]
찰나가 없었다면.
아슬아슬하게 단검을 피하며 살수의 머리에 주먹을 박았다. 살수의 머리가 터진다.
"죽어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니 살수가 날아온다.
‘살수가 소리쳤다고?’
페이크다. 눈치챘을 때는 늦었다. 사각지대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기척은 한, 두 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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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8]
찰나를 연속으로 사용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좋지 않아. 신경 써야 할 건 점점 많아지는데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마후라(摩?羅).
반투명한 방어막을 내 주위로 펼친다. 일반인들은 방어막에 막혀 쓰러지고, 인파 속에 숨은 살수들은 다음 타이밍을 노린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