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3화 > 1843. 광명승천도
“설마 빙의자냐?”
지금 천유운은 반쯤 확신하고 묻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성격적으로 가능성이 아예 없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물론, 상대를 속이려고 할 때는 예외로. 꼴에 주인공이라고 거짓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는 거다.
“비슷하다고 해야겠지.”
[유희 생활 어플]과 빙의는 비슷하지만 달랐다. 빙의라고 한다면 누군가의 몸을 차지하는 건데, 나는 세계에 끼어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천유운은 자기 혼자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야 이해되는군. 내가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렸던 건 너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군.”
“나라는 변수? 뭔 소리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천유운을 진심으로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염구석인 척 신뢰를 쌓은 뒤에 칼을 꽂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최대한 협조했다. 뭐, 연예하를 따먹는다던가 다소 크고 작은 일이 발생한 건 맞지만 그게 큰 영향을 줬다고 보긴 어려웠다.
“모르는 척하는 거냐? 네가 빙의자라면 원작을 알고 있을 텐데?”
“네가 알고 있는 원작과 내가 아는 원작이 똑같으란 법이 있냐?”
“…천무신군(天武神君). 너도 알 거다. 내가 그 무협지의 악역이란 걸.”
“아, 그랬지.”
내가 아는 원작은 [깨어나 보니 천마가 되어 있었다.]지만, 천유운의 입장에서 원작은 천무신군이란 무협 소설이었다. 그리고 난 천무신군이란 소설에 대해 잘 모른다.
‘분명 시간 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조금 흥미가 생겼으니 적당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머리를 굴린다. 소설 속의 소설인 천무신군이 어떤 소설인지는 알고 있다. 원작에서 자주 언급되니까.
“천무신군의 주인공은 어떻게 했지? 원래라면 악역인 널 막아서야 하지 않나?”
“주인공의 운명을 바꿨다. 이 세계가 무협이 아닌 선협 세계라 찾는 데 힘이 들었지만… 결국 놈을 찾아냈지.”
“죽였나?”
“반대다. 사람을 붙여서 평화를 조성했다. 그놈은 주인공이다. 섣불리 죽이려 했다가 살아남는다면? 무협지는 시련과 함께 기연이 찾아오는 법.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 내게 복수하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시련을 주지 않는다. 무공을 접하게 두지 않는다. 무인이 아닌 양민으로서 죽도록 관리한다. 그게 내 계획이었고, 3년 전에 성공했다.”
“…주인공이 죽었다고?”
“내가 빙의한 지 벌써 60년이다. 주인공은 60살 넘게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다.”
내가 아는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서 천무신군의 주인공은 사파의 무인과 싸우다 죽는다. 이유는 천유운이 주인공의 기연을 채가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선협이라 바뀐 건가. 그게 아니면… 백란이 개입해서인가.’
회귀천마 백란. 그녀는 몇십 년 전부터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 가장 큰 변수는 백란이었다.
“계획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직접 기연을 얻으러 가기 힘들고,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니 죽거나, 이미 누군가가 기연을 채갔다고 하더군. 모두 네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아닌 것 같군.”
“왜 그렇게 확신하지?”
“네가 그 기연들을 얻었다면 내 앞에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천무신공(天武神功)을 익혀서 정파의 고수가 되었겠지.”
원작에서 천무신공은 천마신공의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무공 등이라 불렸다. 세계관이 바뀐 지금 그게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리고 난 천무신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다른 계획도 있었잖아. 예를 들면… 묵지련 말이야.”
“역시 묵지련도 알고 있었나. 아니, 알고 있었기에 일급금위를 움직여 나를 압박한 거겠지.”
천유운은 이 모든 사태가 내 계획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조금 억울했다. 이 계획의 대부분을 짠 건 백란이니까.
“열 가지 일을 벌이면 그 절반은 실패했다. 대부분 우연한 사고로 인해 실패한 것이지만, 꼭 누군가가 내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았지. 백산성에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웬 놈이 튀어나와 나를 방해하고 백양화를 가져갔지.”
백양화는 내가 가져갔지만, 굳이 진실을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천유운은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쯧. 아직 모르겠나? 빙의자는 너와 나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방해하는 빙의자가 있다.”
“그 빙의자를 상대로 손을 잡자는 거냐?”
“그래. 우린 같은 적을 상대해야 한다. 얼마든지 동맹을 맺을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천마의 자리다. 네가 존재하는 이상 나는 천마가 될 수 없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군. 내 의견은 듣지 않는 거냐? 나는 천마가 되고 싶어서 소천마가 된 게 아니다. 깨어나 보니 소천마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천마를 포기할 수 있다고?”
“포기하지 못할 이유는 뭐지? 나는 부귀영화를 원한다. 굳이 천마가 되지 않더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방법은 많지. 나와 손을 잡자. 내가 죽는다면 그놈이 널 노릴 거다.”
천유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원작의 천유운은 권력을 원했다. 그를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쓴다. 천유운은 이렇게 쉽게 천마를 포기할 놈이 아니었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천유운은 망설이고 있다 짐작 했는지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군. 너는 묵지련과 손을 잡은 거다. 저번에 묵지련에 대해 조사를 부탁했을 때… 내게 거짓을 말했던 거군.”
봐라. 벌써부터 내 행적을 되짚으며 모든 걸 의심하고 있다. 내가 조용히 마기를 끌어 올리자, 놈 또한 마기를 끌어 올렸다.
두 개의 천마신공. 하지만 내 쪽의 마기가 더 짙고, 더 많았다.
이렇게 차이 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경지의 차이였다. 천유운은 아직 삼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격차를 느낀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묵지련은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묵지련에 뒤통수를 맞았지. 묵지련주의 정체를 알고 있나?”
“나찰녀. 금발 미인이더군.”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 없나?”
“글쎄. 본명은 모르겠군. 나찰녀라고 불리는 건 그 성정 때문이겠지.”
나는 나찰녀가 일종의 별호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선 성질 더럽고 잔인하며 강한 여자를 나찰녀라고 부르니까.
“나찰녀가 본명이다. 그리고 나찰녀라고 하면 서유기가 유명하지.”
“…나찰녀가 서유기에 나오는 나찰녀라고?”
“맞다. 남편이 우마왕이고, 아들로는 홍해아가 있지. 그 년은 우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내가 나찰녀와 갈라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년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다.”
“…….”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세계에 서유기가 섞여 있다고? 왜? 답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나왔다.
‘…무왕 온라인이군.’
[무왕 온라인]은 웹 무협 게임이었다. 그 소스가 중국 게임이다. 그 스토리에 제천대성이나, 우마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묵지련은 무슨 목적으로 역마신공을 퍼뜨리는 거지? 동료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제물이다. 역마신공을 이용해 요괴로 변한 인간은 명인(冥人)이 선호하는 제물이다. 또 나찰녀의 말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개천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
“개천. 몇 번 들어본 말이다. 황제가 경계하는 것 같던데. 정확히 개천은 뭐지?”
“하늘이 열린다. 선계와 명계 등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잘은 모르지만, 먼 과거에 하늘이 열렸던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하더군.”
“…….”
“우린 늦지 않았다. 서로의 방해 없이 서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내 마지막 질문에 답한다면 생각해보지.”
“…마지막 질문? 뭐지?”
“여긴 뭐 하는 공간이냐?”
천유운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공간. 그는 피식 웃었다.
“보다시피 제단이다. 준비한 계획이 절반 이상 실패하면서 깨달았지. 이대로 있다면 전부 망하겠다고. 내키진 않지만 제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역마신공을 익힌 괴물들을 주고 영약과 힘을 받는다. 명계와의 거래다.”
주인공이 인신공양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상대가 천유운이니 이해가 갔다. 놈은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황제가 알면 당장 천마신교부터 쓸어버리겠군.”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한테 들켰잖나.”
“…네가 내 동료가 되어 비밀을 지켜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넌 내 동료가 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그러니 살인멸구 해야겠지.”
천유운의 두 눈에 살의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봤자 전혀 쫄리지 않았다. 괜히 대화를 나눈 줄 아나. 다 자신 있기 때문에 시간 끄는 것에 어울려 준 거다.
칼을 치켜든다. 천유운은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척하더니 그대로 자기 복부에 흑요석 검을 박아넣었다.
천유운의 복부에서는 흘러나와야 할 필 대신에 시커먼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싼다. 마기와 비슷하진 마른 명계의 기운이다.
천마신검(天魔神劍) 격섬(擊閃).
검을 휘둘러 새까만 참격을 날린다. 천유운의 몸을 감싼 명계의 기운이 급하게 움직여 내 참격을 막았다. 아니, 참격과 함께 상쇄됐다.
‘어쭈?’
이래 보여도 힘을 아끼지 않고 전력을 다한 참격이다. 그런데 그걸 막아내? 명계의 기운과 상쇄됐다고 하더라도 기분 나빴다.
나는 다시 칼을 치켜들었다. 그에 위협을 느낀 것일까. 천유운이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귀저(鬼咀)! 계약을 이행해라! 이럴 때를 위해 네놈에게 제물을 바친 건 아니지만… 여기서 내가 죽으면 너도 곤란할 터! 어서 나와라!”
천마신검(天魔神劍) 격섬(擊閃).
다시 한번 참격이 날아간다. 이번에는 명계의 기운이 내 참격을 상쇄하지 않았다. 대신, 천유운의 어깨에서 돋아난 붉은 피부의 근육질 팔이 커다란 칼을 휘둘러 내 참격을 베어냈다.
천유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의 피부가 붉게 변하고, 체격이 커진다. 키는 단숨에 2.5m까지 커졌고 1개의 팔이 더 돋아나 총 4개의 팔이 되었다. 4개의 팔에는 각각 검, 창, 칼, 철퇴를 들고 있었다. 천유운의 얼굴에 시커먼 액체가 모이더니 얼굴이 변했다.
귀신의 얼굴로. 그 이마 중심은 쩍 갈라지더니 세 번째 눈이 개안했다.
저 외형을 한 존재에 대해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다.
‘귀수라(鬼修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