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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49화 (1,629/2,000)

< 1849화 > 1849. 이터널 에덴

가진 재산을 확인했다. 눈에 보이는 값비싼 물건은 코앞에 있는 노트북과 침대 옆에 놓인 스마트폰뿐이다. 현금은 어떨까? 은행 어플을 확인한 결과 현금 재산은 500만 원 정도다. 대학생 1학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순수 현금이 500만 원이면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지원받았나? 아니면 아르바이트인가?’

답은 간단히 알 수 있다. 입출금 내역이 있으니까. 가족에게 한 달에 50만 원을 지원받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로 100만 원 정도 받았다.

‘한 달 50만 원이면 가정 환경은 중산층 이상이라 봐야겠지.’

대학교도 알아냈다.

서울 부영 대학교 1학년 스포츠과학과. 단톡방도 있었기에 확인해봤다. 대충 대화 내역을 위로 올린다.

기승팔: 요즘 1학년들 존나 해이해졌더라. 학교에서 선배 보면 고개 숙여서 인사해라.

기승팔: 특히 성유진.

기승팔: 너 하나한테 껄떡거렸다며?

기승팔: 진짜 씨발 정신 안 차리냐?

기승팔: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내 귀에 들리면 가만 안 둔다. 대학 생활 시궁창에 처박아준다. 씨발.

기승팔: 대답 안 해?

성유진: 네. 죄송합니다.

‘기승팔? 이 새낀 뭔데 깝치지?’

일주일 전의 채팅이었다. 이 세계의 들어오기 전에 한 말임을 안다. 하지만 채팅 내역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몇 번 더 확인해본 결과 기승팔은 성격이 유독 나빴고, 3개월 전부터 유독 나한테 지랄이었다.

‘어차피 현실도 아니고 유희 세상인데… 지금 찾아가서 죽일까.’

막상 그러려니 귀찮았다.

‘나중에 마주치면 죽이든가 하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앞으로 30일. 대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었다.

‘돈이 필요해.’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나, 주식이나 로또는 불가능했다. 이 세계에 있는 기업들의 이름은 생소했고, 원작 게임에서 로또 번호 같은 걸 알려주지 않는다. 30일 내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주가 조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주식을 사놓고 경쟁 회사 사장을 죽여버리면 사놓은 주식이 떡상하지 않나?’

그렇게 해서 많이 벌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질이 제일 현명한 것 같군.’

나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좀비 사태에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본다. 여자, 거처, 식량, 무기. 부하. 당장 떠오르는 건 이 5개였다. 당연히 여자가 중요하다.

‘예쁜 여자가 중요한데… 연예인을 납치해야 하나?’

거처는 어디로 정하는 게 좋지? 되도록 서울이면 좋지만… 좀비 사태가 되면 가장 혼란스러울 곳이 서울이었다.

‘씨발. 식량도 문제잖아. 특히 난 입맛이 까다로우니까. 맛없는 걸 먹으며 살고 싶지 않아.’

요리사가 있으면 좋다. 근데 어지간한 요리사로는 내 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부하도 중요한데. 기왕이면 능력을 각성한 유능한 부하였으면 좋겠군.’

머리를 긁적였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의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30일 뒤에 좀비 사태가 100% 확률로 벌어질 테니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룸 한구석에 있는 가방을 꺼냈다. 튼튼한 등산 가방이었다. 등산용품들이 있는 걸 봐선 등산을 즐기는 취미라도 있는 모양이다.

‘이 썩어빠진 원룸에는 두 번 다시 안 올 것 같으니… 필요한 것만 챙기자. 비싼 물건인 노트북은 당연하고… 옷도 있으면 좋겠지.’

가장 중요한 건 무기였다.

구석에 있는 야구 배트, 테니스 채가 보였다.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손에 넣었다. 파지직. 식칼의 짧은 칼날에 시퍼런 전류가 번뜩거렸다.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역시 무기 하면 칼이지.’

이 세계에 들어오면서 선택한 특성과 스킬은 절대정신, 뇌전, 뇌천류. 이 세계에 마나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정신 에너지 같은 건 존재했다. 뇌전을 사용할 수 있는데 뇌천류를 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철컥.

챙길 건 모두 챙기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 벽에 원룸 문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오래되고 갑싼 원룸이라 그런지 뭔가 닭장 같았다. 나는 옆집 문으로 향했다.

‘꼴에 최신식이라고 홍보할 생각이었나? 죄다 문에 전자 도어락을 설치해놨네. 덕분에 일이 편해지겠어.’

전자 도어락을 붙잡고 뇌전을 사용했다. 파지지직!

띠리리리리!

문이 열린다.

‘전자 도어락 정도는 껌이지. 구조 자체가 별로 복잡하지도 않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돈이 될만한 걸 훔쳤다. 여자의 방이라 그런지 악세서리가 제법 많았다. 침대 아래 서랍에서 속옷을 발견했다. A컵. 흥미가 싹 가셨다. 원룸을 개판으로 만들고 얻은 현금은 2만 3천 원이 전부였다.

‘젠장.’

이것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다. 여긴 현대 대한민국이니까.

빈 원룸을 죄다 털어서 손에 넣은 돈은 15만 7천 원이 전부였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음을 알기에 혀를 차며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복도와 달리 건물 입구에는 CCTV가 있었기 때문이다. CCTV나 블랙박스를 최대한 피하면 경찰도 쉽게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나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현재 내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좋은 운동선수 수준이다. 스포츠 학과에다가 여러 운동을 한 것 같으니 당연히 그랬다.

‘능력이 있긴 한데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체력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

회복 덕분인지 잠깐 쉬면 체력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리고 일부러 손에 상처를 내며 회복의 효과도 확인했다. 패시브다. 자동으로 체력이 회복된다. 다만 그만큼 체력이 소모된다는 것.

최상위 능력 중 하나인 회복.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은 능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내 능력으로 은행 강도질은 불가능하겠군.’

은행을 털더라도 도망이 문제였다.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현금을 털어도 혼자서 옮기는 것도 힘들다. 경찰이 작정하고 쫓아오면 잡힐 수밖에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나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 들어온 300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왜 자신이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인지 그녀도 잘 모른다. 그녀는 게임인 [이터널 에덴]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게임 속 세상이었고, 2022년 7월 30일의 멸망까지 앞으로 30일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이터널 에덴]은 플레이어 300명이 벌이는 생존 게임이었다. 최후의 1명이 생존하면 이긴다. 그러니 최후의 1명이 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너무 낙천적인 생각이야.’

게임이 현실이 됐다.

처음 그녀는 정부나 기업에 몸을 의탁하려고 했었다. 그녀가 가진 능력을 보여줘서 대상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녀보다 앞서 행동한 플레이어의 결말을 보고 포기했다. 플레이어가 군인들에게 붙잡혀 강원도에 있는 연구실로 끌려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연구실에서 무슨 짓을 당할까. 보나 마나 뻔했다. 온갖 실험을 당하겠지. 나채영은 실험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벌써 30일밖에 남지 않았어. 이대로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야.’

플레이어는 4개의 클래스에 따라 능력을 가진다. 그녀의 클래스는 테크놀로지스트(Technologist). 게임 초반에는 전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클래스다. 그녀가 살아남으려면 정부나 기업 등의 세력에 의탁하는 것이다. 허나 플레이어가 연구소로 끌려가는 걸 대놓고 봤는데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따로 자신만의 그룹을 만들기로 했으나 영 쉽지 않았다.

필요한 건 유능한 인간. 각성자면 더 좋으나, 컴퓨터로 하는 게임에서도 조기 각성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각성자라고 해서 모두 유능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간 자체를 신뢰하기 힘들다.

결국, 그녀는 오늘날까지 그룹을 만들지 못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플레이어인데 플레이어의 이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일은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이 세계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지구가 아니었다. 그녀가 본래 살고 있었던 한국과 달리 이 세계의 한국에는 뒷세계까 제법 컸다. 까놓고 말해 조폭의 세력이 컸다.

나채영은 조폭들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물론 총기다. 그래야 돈이 되니까. 게다가 조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생존에 유리할 테니까. 30일 뒤에 좀비 사태가 일어나면 조폭들은 무기 제작자인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때 협상을 하면 된다. 그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채영은 작업대에 놓인 권총 2자루를 가방에 넣었다. 화이트 코트를 벗었다. 방탄 성능을 가진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티셔츠 위에는 재킷을 하나 걸친다. 좁 덥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니까.

드르르륵!

작업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태양에 짜증이 나기 전에 쫓기듯이 경차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을 건 그녀는 자신의 집을 쳐다봤다. ‘경천 중고샵’. 광주 구석진 곳에 있는 오래된 가게였다. 저 허름한 가게 안에는 자신의 보물들이 있었다. 이제 와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곳.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서울로 올라갔다.

나채영이 거래하는 조폭은 서울 강동구를 지배하고 있는 고산파였다. 주로 사채업을 했다. 그래서인지 돈은 많았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한 그녀는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시선이 모인다. 최대한 평범하게 입어도 타고난 외모 탓에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이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 남자들이 달라붙지 않으니까.

인적이 드문 길로 향한다. 목표는 사채 사무소. 이미 이야기는 끝났으니 가서 총을 건네고 대포통장을 받으면 거래는 끝. 그 돈으로 재료를 구매하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거나 거처를 강화한다.

툭.

골목길을 도는 순간 옆에서 나온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나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는 성욕이 가득한 자신을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고는 말했다.

“죄송.”

싸가지 없이 사과한 남자는 손을 흔들며 사채 사무소로 걸어갔다. 그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힐끔힐끔 나채영을 돌아봤지만, 나채영은 우뚝 서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이 보였으니까.

「개체명: 성유진

잠재력: ★★★★★

각성 능력: 절대정신, 뇌전, 회복.

특성: 둔재, 색정광, 순수성, 민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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