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2화 > 1852. 이터널 에덴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야?”
나채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연히 나채영이다. 당장 여기서 그녀를 강간할 수 있지만, 그 후에 그녀와 나의 관계는 씹창나겠지. 어쩌면 중요한 순간에 통수를 맞을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나 분위기를 보면 마냥 당하고만 있을 여자는 안 보이니까. 하지만 이런 여자를 옆에 두고 계속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채영은 지배당하는 걸 싫어한다. 그러나 죽는 것도 싫어한다. 플레이어로서 자신감도 있을 테고, 그녀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게 낫다.
“거래하자. 하루 한 시간을 서로에게 주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하루 한 시간 동안 날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줄게. 대신 나도 널 하루 한 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어때? 공평하지?”
“공평? 웃기지 마. 넌 내 몸이 목적이잖아.”
“널 강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하는 거야.”
“…….”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지금 그녀는 무력하다. 그녀의 목숨은 내 손 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아마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하루에 한 시간. 내가 네 칼이 돼주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이런 기회 별로 없다고.”
“…….”
그럼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렸다. 3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가 말했다.
“네게 그 정도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어. 너는 잠재력이 5성이지만, 둔재 특성을 가지고 있지.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잠재력이 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니 내게 네 가치를 증명해.”
“재밌는 소리를 하네. 어떻게 증명하라는 건데? 너랑 싸울까?”
“곧 그럴 상황이 될 거야. 그때 거래를 결정하겠어.”
“난 지금 널 강간하고 죽일 수 있어.”
“모든 게 다 네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야.”
미세하게 흔들리던 나채영의 눈동자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 또한 각오를 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다.
나는 총구를 내렸다. 이어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나채영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지만, 아까 한 이야기도 있으니 일단 참아야 했다. 이제부터 나와 그녀는 대등한 사이였다.
도착한 곳은 논밭 사이에 있는 중고샵이었다.
“이런데 중고샵이 있다고? 이상한데.”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중고샵 건물은 제법 컸다. 건물 주위에는 폐가전 제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중고샵 근처에 벽만 세우면… 방어하기 딱 좋은데?’
아마도 30일 뒤의 사태를 대비해서 선택한 곳인 것 같다.
“차로 5분 거리에 작은 마을이 있어. 이 중고샵은 실질적으로는 제품 수리가 전문이었어. 방치되어 있던 걸 싼 가격에 샀지.”
“얼만데?”
“2,000만 원.”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싼 거 아닌가. 하다가 위치와 건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은 컸으나 너무 낡았다. 기껏해야 창고로 쓰는 게 전부일 것 같다.
나채영을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외형과 달랐다. 나름 정리되어 있었고, 대형 기계들도 있었다. 벽 한쪽에는 총기가 걸려 있었다. 대부분 권총인데 돌격소총도 적지 않았다.
“저 총들 전부 네가 만들었어?”
“그게 아니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나채영은 의자에 걸쳐져 있던 하얀 가운을 입었다. 그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벽에 걸려 있던 총기 중 하나를 잡아서 만지작거렸다. 이 묵직한 느낌. 진짜 총이었다.
“용케도 이런 걸 만들었네. 내가 알기로 권총 부품은 정밀해야 할 텐데.”
“난 테크놀로지스트야. 자원만 있다면 부품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어떻게? 한 번 보여줘.”
나채영은 말없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사각형의 뭔가를 들어 올렸다. 강철? 아니면 플라스틱? 어쨌든 자원으로 보이는 그것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서 자그마한 크기로 줄어들더니 작은 스프링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바꿀 수 있어. 자원 소모가 크지만…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
“그 자원은 어떻게 얻는데?”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작업실 구석에 있는 대형 기계를 가리켰다.
“테크놀로지스트와 바이오닉스의 기본 스킬인 분해기야. 물건을 넣으면 쓰레기와 자원으로 분해해 줘.”
“바이오닉스도? 생물을 넣어도 분해되는 건가?”
“뼈나 근육 등 쓸만한 자원도 있으니까. 그렇게 뛰어난 물건은 아니야. 분해기는 어디까지나 기본 스킬이니까.”
“지금 넌 뭘 만들 수 있지?”
“총기랑 드론. 그리고 포탑 정도가 전부야. 그동안 이곳에서 처박혀서 연구한 건 그것들 정도가 전부거든.”
“새로운 뭔가를 만들려면 연구가 필요하다는 건가.”
“내가 기존에 있는 설계도나 기술 자료 등을 습득하면 만들 수 있어. 자원이 넉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자원만 충분하다면 대량 생산 가능하다?”
“일일이 만드는 건 효율이 안 나와. 능력을 쓰면 체력이 떨어지니까. 권총 하나를 만드는 데도 하루는 걸려. 대량 생산은 공장을 만들어야 해.”
그리고 공장을 가동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다. 테크놀로지스트는 기술 발전은 빠르게 할 수 있으나, 혼자서 무한정 무기를 찍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분해기를 사용했다. 일단 전원을 켜고 그 안에 전자레인지를 넣었다. 위이이이이이잉! 다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분해기가 돌아간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분해기 옆으로 쓰레기와 자원이 나뉘어졌다. 자원은 네모난 뭔가였고, 쓰레기는 말 그대로 쓰레기였다. 의외로 자원보다 쓰레기가 더 적게 나왔다.
“적당한 총 하나 골라봐.”
“선물로 주게?”
“네 실력을 한 번 봐야겠어.”
“그건 상관없는데 난 총잡이가 아니라 칼잡이야. 내 실력을 제대로 보고 싶으면 칼을 달라고.”
“칼이라…. 알았어. 일단 총부터 쏴봐.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총 정도는 당연히 잘 쏘겠지? 지하에 사격실 있으니 거기서 쏴. 아, 나이프도 가져가.”
나는 권총 하나 들고 지하 사격실로 내려갔다. 사격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길이만 15m 정도.
천장에는 마이크와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나채영은 카메라를 통해 날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권총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자세가 나오네. 군대 갔다 왔구나?”
“아니, 미필인데.”
“…….”
사람 모양을 한 과녁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 슬라이드가 연신 당겨지고 총구가 불을 뿜는다. 탄창 하나를 싹 비우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놀랍네.”
나채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15발 중에 명중은 다섯 발. 그 중에서도 머리나 심장을 맞춘 건 한 발도 없어. 10m 사격이 그렇게 어려웠어?”
“말했잖아. 난 총잡이가 아니라 칼잡이라고.”
나는 권총을 대충 머리 뒤로 넘겼다.
“…총을 함부로 다루지 마. 그거 만드는 데만 하루 걸렸어.”
“그래. 그래.”
대충 대답하고 나이프를 든다. 뭔가 썰어버릴 만한 게 없을까. 과녁이 있긴 한데 10m 거리에 있다. 가까이 다가가기 귀찮았다. 게다가 과녁은 나무판이다. 썰어봤자 재미도 없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강철 탁자.
‘나름 써는 맛이 있겠군.’
파직.
미세한 뇌전을 일으켜 칼날을 살짝 코팅한다. 일종의 검기(劍氣)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탁자에 나이프를 휘둘렀다.
서걱!
강철 탁자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무너진다. 나이프를 본 나는 짧게 혀를 찼다. 검기로 휘감았는데도 칼날이 나갔다.
“…나이프로 강철 탁자를 반으로 가른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당연히 능력을 썼지. 뇌전을 칼날에 덧씌워서 검기처럼 썼다고 할까?”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성공했지. 그보다 제대로 된 칼 한 자루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이것 봐 한 번 썼을 뿐인데 날이 작살 났어.”
“거기서 말해도 여기선 안 보여. 됐으니 올라와.”
위로 올라간 나는 나채영에게 나이프를 건넸다. 나채영은 나이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 검기라는 걸로 칼날을 보호하면 안 되는 거야?”
“소모가 너무 많아. 지금으로선 검기로 칼날을 날카롭게 만드는 게 최선이야.”
“…알았어. 한 번 만들어볼게. 그래봤자 오래 못 쓸 것 같긴 하지만…. 더 강력하고 단단한 칼을 만들려면 연구가 필요하겠어.”
그녀는 자원을 가지고 작업대로 향했다. 바로 작업하는 건가 싶었는데, 컴퓨터로 칼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나는 적당히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나채영의 가슴을 만지고 싶지만… 참았다.
집중하는 그녀를 힐끔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현대 배경답게 이 세계에도 웹툰과 웹소설 등이 있었다.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영화도 내가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떼우고 있을 때였다.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나채영은 동시에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승용차 6대가 건물 앞에 멈췄다.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딱 봐도 알겠다. 조폭이다.
“고산파.”
나채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칼을 빼앗듯이 잡았다.
“완성된 것 같군. 증명하고 올 테니 기다려라.”
“뭐? 자, 잠깐 기다려! 저 인간들 총을 갖고 있어!”
“난 칼을 가지고 있지.”
칼을 보며 밖으로 나갔다. 칼날의 길이는 30cm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식칼보다 날이 날카로웠다.
20명에 달하는 조폭 중 절반이 나를 보자마자 총을 겨눴다. 나는 건물 앞에 놓여 있던 빈 냉장고에 엄폐했다.
“여기가 나 박사의 집이라고 들었는데… 어이. 나 박사는 어디에 있지?”
“내 여자는 왜 찾는 거냐?”
“네 여자? 나 박사의 기둥서방이라도 된다는 거냐?”
“기둥서방은 아니지.”
“이 새끼가!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가장 앞에 있던 조폭은 손을 들어, 나대는 조폭을 저지했다.
“됐다. 궁금한 것 같으니 말해주마. 나 박사는 오늘 우리 형님과 거래하기로 했다. 근데 나 박사는 보이지도 않고, 형님은 목이 잘려 죽여있더군. 우린 실력 좋은 칼잡이 킬러의 짓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 박사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지. 나 박사,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네 짓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 우리랑 대화나 하자고. 나 알지? 나 진강구다.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가 오해할 수도 있다.”
진강구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민했다. 이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간 그대로 벌집이 되어 죽을 것이다. 완전 회복도 없는 이상 미친 척 특공 할 순 없다. 가속도 없어서 총알을 피하는 것도 힘들다.
‘총이라도 가져왔으면 편했을 것 같긴 한데.’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회를 엿봐야 했다. 근데 가까이 다가오긴 하려나?
“나 박사! 우린 널 해치고 싶지 않아. 쌓인 오해는 풀자고!”
지지직.
스피커에서 잡음이 울리더니 곧 나채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바보로 보여? 대화를 원했으면 전화로 해도 됐잖아. 너희는 처음부터 날 생포할 생각이었잖아.”
“캬, 역시 나 박사. 머리가 쌩쌩 돌아가는구먼! 태왕의 보스가 널 만나고 싶어 하고 우리 보스에게 말했거든. 그러니 조용히 같이 가자고, 나 박사.”
“난 누구랑도 만나고 싶지 않아.”
지이이이이이이잉!
건물 정면, 쓰레기 폐가전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포탑 3개가 일어나 그 총구를 조폭들에게 겨누고 총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엄폐해!!”
조폭들이 뒤로 달려가 자동차를 앞에 두고 엄폐하며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총알이 빗발친다. 이건 뭐, 소규모 전쟁이 따로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일단 한 놈은 생포해서 심문해야겠어.’
뜻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폭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넣고 있었다.
‘…약?’